엘에이 사는 이야기

2004.02.28 11:02

이용우 조회 수:2132 추천:55

- LA사는 이야기 -


호박엿

LA 한인타운의 올림픽블러버드와 벌몬트에비뉴가 만나는 곳에 ‘한남체인’ 이라는 슈퍼마켇이 있습니다. 이 슈퍼마켇의 넓은 주차장에 서서 주위를 한바퀴 둘러보면 우측은 물론 길건너편 빌딩에까지 한글간판이 빽빽하게 붙어 있습니다.
미지미용실, 새한여행사, 소공동순두부, 명동당구장, 한남비디오, 리스약국, 종로서적, 신보청기, 장안된장, 강신욱내과, 나라은행 등, 줄잡아 70여 개의 한인업소들이 밀집해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매년 가을에 열리는 한국의날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꽃차 퍼레이드가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이 슈퍼마켇의 전면 두 개의 출입구 주위는 마켇이 문을 열고 있는 동안은 언제나 장터처럼 북적거립니다. 마켇봉지를 주렁주렁 들고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 무료함을 달래며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노인, 교회에서 나온 전도팀, 구걸하는 사람 등등으로 부산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지 신나는 음악과 함께 쇠가위를 쩔렁거리는 호박엿장수가 그 틈을 비집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개량한복을 차려입은 부부 중,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얼굴에 삐에로 분장을 한 여인은 가위질로 엿을 떼어 주고, 남편인 듯 한 오십후반의 남자는 돈을 챙겨받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구경거리는 바로 삐에로 분장을 한 여자의 신나는 가위질 소리였습니다.
“찰각 착, 찰각 착, 찰그락, 찰그락, 착착.”
“찰각, 찰각, 착착, 찰각, 찰각, 착착, 찰각, 찰각, 착착착.”
엿구루마 뒤쪽의 리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가요에 맞춰 엿칼을 두드리는 여자는 음악의 템포에따라 두 번 가위질 하고 한 번 두드리던가, 또는 세 번 가위질 하고 다섯 번 두드리던가, 그도 아니면 연달아 가위질만 하던지 여하튼 가위질과 엿칼 두드림을 정말 엿장수 마음대로 합니다. 몸매 갸름한 여자는 살랑살랑 허리춤 겯들이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리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예외없이 모두가 뽕짝인데 여자의 가위장단과 어울린 그것은 흥겹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보고 있노라면 누구든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흔들게 마련입니다. 한국 사람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남미계나 흑백인의 구분없이 모두들 신기하다는 듯 들여다 보다가는 엉덩이를 슬렁슬렁 흔듭니다.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습니다.
“서울가는 십이열차에(찰칵찰칵,) 기대앉은 젊은 나그네,(찰칵 착, 찰칵 착,) 잘가세요 잘있어요(착,) 눈물의 기적이 운다, (찰칵찰칵, 착착착,)”
여기서 ‘찰칵’은 빈가위질 소리이고, ‘착’은 엿칼을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여자는 박자에 맞추기 위해 엿칼을 세게 두드리거나 또는 약하게 치거나 그럽니다. 박이 짧을 때는 세게 한번 착, 쳐서 엿을 떼어내고, 박자가 길면 여유 있게 착착착, 두드리고 그럽니다. 물론 여자는 노래가 나오는 동안 두드림을 준비하며 음악따라 한들한들 춤을 추는 것이지요.
미국속의 한인타운은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대게 한 두교회의 전도팀이 장보러 온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주느라 마켇입구에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이 마켇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마켇입구의 양쪽에 나뉘어 선 전도팀들은 무조건 팜플렛 한 장씩을 안겨줍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대게 가타부타 하지 않고 무심한 얼굴로 전도지를 받아갑니다. 아마도 난 무신론자이니 필요 없다거나, 다른 종교를 믿는다거나, 이미 나가는 교회가 있다거나 해서 시간을 낭비하느니, 얼른 한 장 받아가는 게 편하다는 생각에서 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방금 받은 전도지를 손에 들고 뚱한 표정으로 마켇문을 나서다가 -영도다리(찰칵,) 난간위에(착,) 초승달이 외로이 떴다(찰칵찰칵, 착착,)- 하고 신나게 꿍짝거리는 호박엿장수를 발견하면 대번에 구겨진 얼굴들을 활짝 폅니다. 엿구루마 곁으로 다가온 사람들은 여자의 가위장단을 지켜보며 공연히 실실 웃음을 흘립니다. 제 엄마를 따라온 아이들도 여자의 분장한 얼굴과 엿판에 놓인 둥그런 호박엿덩이를 번갈아 흘끔거리며 무엇이 좋은지 깔깔 웃고 팔짝팔짝 제자리 뜀을 하고 그럼니다.
“돌아와요(착착,) 부산항에(찰칵찰칵,) 그리운 내 형제여(찰칵찰칵, 착착착,)”
어느덧 가위장단에 맞춰 엉덩이를 슬렁거리던 사람들은 2불, 혹은 3불어치의 호박엿을 사들고 정말 그리운 내형제 라도 만난 표정을 지으며 떠나갑니다. 조금전에 받았던 전도지는 엿구루마 한 귀퉁이에 슬며시 놓아둔 체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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