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에이 사는 이야기
2004.02.28 11:34
-LA사는 이야기-
서울 뚝배기
한글 간판이 다닥다닥 붙은 웨스턴에비뉴 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베벌리블러버드와 멜로스를 지나면 레몬그로브 라는 작은 길이 나옵니다. 그 레몬그로브와 웨스턴에비뉴 교차로의 북서쪽 코너에 조그마한 샤핑몰이 있습니다. 칼국수와 수제비, 그리고 파전과 감자탕 따위 분식 위주의 식당인 ‘서울뚝배기’ 는 그 곳에 있습니다. 90년대 초 본국에서 한창 인기를 끌던 드라마의 제목을 따서 이름을 지은 식당입니다.
-하이고, 어서 오소. 요샌 우째 그리 뜸항교, 이 아지매 보고싶지도 안니껴?
풍기가 고향이라는 육십 중반의 주인 아주머니는 두 달, 때로는 서너 달 건너 한차래쯤 들르는 나를 언제나 그렇게 끈끈한 인사로 맞아줍니다. 카운터 뒤에 앉아 TV를 보던 아저씨도 빙긋이 웃습니다.
-왜 안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왔지요.
-그라믄 좀 자주 오제. 그래 오늘은 국시 할랑교, 수제비 할랑교?
김이 고실고실 올라오는 보리차잔을 내려놓으며 아주머니는 이마가 닿도록 얼굴을 낮게 기우리고 묻습니다. 말 끝의 오무라진 입술을 펴지 않은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숭글숭글 담고 있는 얼굴이 따듯한 정을 함뿍 머금고 있습니다.
-오늘은 수재비가 먹고싶은데요.
-그래, 수재비 좋지, 이러케 꾸무리한 날은 호박 감자 숭숭 쓸어넣고 끓여서 양념간장 얼큰하게 친 수재비국이 제격인기라. 어야, 내 쐬주 한 잔 내오까?
-좋지요, 그런데 여기는 라이센스가 없잖습니까?
-누가 돈 받고 판댜, 이 아줌씨가 싸비스로 내겠다 이기라. 저 양반 마시던 거 한 잔 따라온다 이 말이지. 장사 아인기라, 싸비스라, 싸비스.
기실 내가 ‘서울뚝배기’ 식당을 찾는 것은 직접 손으로 빚는 칼국수와 수제비의 얼큰하고 구수한 맛도 맛이지만, 지금도 고향 강가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고종사촌 형수님을 생각함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십여년전 작고하신 선친과 오륙 년밖에 나이 차이가 없던 고종사촌 형님은 언제나 외숙, 외숙, 하며 마치 형처럼 선친을 따랐습니다. 부창부수 라는 말대로 형수님도 ‘외숙’ 네 일이라면 자기 일처럼 지극정성을 다합니다. 그런 형수님의 시외가에 대한 사랑은 내게 더욱 특별하게 기울어 있습니다. 방학이라도 되어 고향을 찾을라 치면, 마을 입구에 있는 작은형네 집에 엉덩이를 내려놓기 무섭게 어찌 알았는지 조카들을 시켜 불러올리는데, 그 미끼가 다름아니라 형수님의 장기인 국수와 수제비입니다. 콩가루를 섞어 홍두깨로 밀어내는 우리 지방 특유의 칼국수와 묽게 게어 바가지에 담아들고 물이 설설 끓는 가마솥에 숫가락으로 뚝뚝 떼넣어 삶는 수제비는 싱싱한 감자와 애호박의 가미로 내 입맛을 사로잡는 일등 미식입니다. 나의 이런 입맛을 일찍이 감지한 형수님의 사랑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 일 것입니다.
-되련님, 더 잡숴유. 내가 되련님 오신다길래 아주 한 쏱 쒀놨어유, 많이 잡숴, 이따 주무시다가두 출출 하시믄 말해유, 내가 뎁혀 드리께, 핵교 가실때꺼정 오래 기시면서 수재비 실컷 잡숫구 가셔.
땡볕에 그을리고 주근깨가 다닥다닥 앉은 거친 얼굴에 함박웃음을 띤 형수님은 이마가 닿도록 머리를 기우려 어린 나를 들여다 보며, -되련님 더 잡숴유, 되련님 실컨 잡숴, 하며 철철 넘치게 정을 부어줍니다.
그러니까 수재비나 칼국수는 내게 있어 한 끼의 식사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 구수하고 얼큰한 맛 속에는 고향과 사촌형제, 또 생전의 선친과 유년의 내 모습, 그리고 특별히 주근깨가 다닥다닥 앉은 볼로 함빡 웃는 형수님의 정 많은 얼굴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서울뚝배기’ 가 사라졌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곳에 갔던 지난 여름으로부터 치면 대략 서너 달 만입니다. ‘서울뚝배기’ 가 있던 자리에는 무슨 컴퓨터 가게가 들어 서 있었습니다. 처음엔 내가 잘못왔나, 한 블록 더 왔던지 아니면 한 블록을 덜 온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길 이름을 보니 그 곳이 맞습니다. 웨스턴에비뉴와 레몬그로브 두 길에서 모두 파킹장으로 들어올 수 있는 드라이브웨이의 구조를 보아서도 틀림없는 그 몰이었습니다. 컴퓨터 가게를 다시 돌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드나들 정도의 작은 문, 수재비, 손칼국수, 감자탕 등 메뉴가 써붙여 있던 유리창에 이제는 컴퓨터 모니터와 스캐너 따위의 그림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 유리창 어디에도 식당이 이사한다는 안내문은 없습니다.
서울뚝배기 아주머니가 무슨 이유로 식당을 폐업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잠시 일었습니다. 비즈니스란 시작하기도 하고 그만두기도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허지만 종내 허전한 마음이 감춰지질 않았습니다. 이제 다시 수재비와 칼국수 잘하는 식당을 찾아야 하는 일이 숙제로 남은 것도 울적한 일 입니다. 고향 형수님을 추억할 때 어쩌면 ‘서울뚝배기’ 아주머니도 같이 떠오를 것이라는 생각이 잠깐 든 것이 위안이라면 유일한 위안 입니다.
이용우 / 소설가
서울 뚝배기
한글 간판이 다닥다닥 붙은 웨스턴에비뉴 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베벌리블러버드와 멜로스를 지나면 레몬그로브 라는 작은 길이 나옵니다. 그 레몬그로브와 웨스턴에비뉴 교차로의 북서쪽 코너에 조그마한 샤핑몰이 있습니다. 칼국수와 수제비, 그리고 파전과 감자탕 따위 분식 위주의 식당인 ‘서울뚝배기’ 는 그 곳에 있습니다. 90년대 초 본국에서 한창 인기를 끌던 드라마의 제목을 따서 이름을 지은 식당입니다.
-하이고, 어서 오소. 요샌 우째 그리 뜸항교, 이 아지매 보고싶지도 안니껴?
풍기가 고향이라는 육십 중반의 주인 아주머니는 두 달, 때로는 서너 달 건너 한차래쯤 들르는 나를 언제나 그렇게 끈끈한 인사로 맞아줍니다. 카운터 뒤에 앉아 TV를 보던 아저씨도 빙긋이 웃습니다.
-왜 안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왔지요.
-그라믄 좀 자주 오제. 그래 오늘은 국시 할랑교, 수제비 할랑교?
김이 고실고실 올라오는 보리차잔을 내려놓으며 아주머니는 이마가 닿도록 얼굴을 낮게 기우리고 묻습니다. 말 끝의 오무라진 입술을 펴지 않은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숭글숭글 담고 있는 얼굴이 따듯한 정을 함뿍 머금고 있습니다.
-오늘은 수재비가 먹고싶은데요.
-그래, 수재비 좋지, 이러케 꾸무리한 날은 호박 감자 숭숭 쓸어넣고 끓여서 양념간장 얼큰하게 친 수재비국이 제격인기라. 어야, 내 쐬주 한 잔 내오까?
-좋지요, 그런데 여기는 라이센스가 없잖습니까?
-누가 돈 받고 판댜, 이 아줌씨가 싸비스로 내겠다 이기라. 저 양반 마시던 거 한 잔 따라온다 이 말이지. 장사 아인기라, 싸비스라, 싸비스.
기실 내가 ‘서울뚝배기’ 식당을 찾는 것은 직접 손으로 빚는 칼국수와 수제비의 얼큰하고 구수한 맛도 맛이지만, 지금도 고향 강가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고종사촌 형수님을 생각함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십여년전 작고하신 선친과 오륙 년밖에 나이 차이가 없던 고종사촌 형님은 언제나 외숙, 외숙, 하며 마치 형처럼 선친을 따랐습니다. 부창부수 라는 말대로 형수님도 ‘외숙’ 네 일이라면 자기 일처럼 지극정성을 다합니다. 그런 형수님의 시외가에 대한 사랑은 내게 더욱 특별하게 기울어 있습니다. 방학이라도 되어 고향을 찾을라 치면, 마을 입구에 있는 작은형네 집에 엉덩이를 내려놓기 무섭게 어찌 알았는지 조카들을 시켜 불러올리는데, 그 미끼가 다름아니라 형수님의 장기인 국수와 수제비입니다. 콩가루를 섞어 홍두깨로 밀어내는 우리 지방 특유의 칼국수와 묽게 게어 바가지에 담아들고 물이 설설 끓는 가마솥에 숫가락으로 뚝뚝 떼넣어 삶는 수제비는 싱싱한 감자와 애호박의 가미로 내 입맛을 사로잡는 일등 미식입니다. 나의 이런 입맛을 일찍이 감지한 형수님의 사랑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 일 것입니다.
-되련님, 더 잡숴유. 내가 되련님 오신다길래 아주 한 쏱 쒀놨어유, 많이 잡숴, 이따 주무시다가두 출출 하시믄 말해유, 내가 뎁혀 드리께, 핵교 가실때꺼정 오래 기시면서 수재비 실컷 잡숫구 가셔.
땡볕에 그을리고 주근깨가 다닥다닥 앉은 거친 얼굴에 함박웃음을 띤 형수님은 이마가 닿도록 머리를 기우려 어린 나를 들여다 보며, -되련님 더 잡숴유, 되련님 실컨 잡숴, 하며 철철 넘치게 정을 부어줍니다.
그러니까 수재비나 칼국수는 내게 있어 한 끼의 식사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 구수하고 얼큰한 맛 속에는 고향과 사촌형제, 또 생전의 선친과 유년의 내 모습, 그리고 특별히 주근깨가 다닥다닥 앉은 볼로 함빡 웃는 형수님의 정 많은 얼굴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서울뚝배기’ 가 사라졌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곳에 갔던 지난 여름으로부터 치면 대략 서너 달 만입니다. ‘서울뚝배기’ 가 있던 자리에는 무슨 컴퓨터 가게가 들어 서 있었습니다. 처음엔 내가 잘못왔나, 한 블록 더 왔던지 아니면 한 블록을 덜 온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길 이름을 보니 그 곳이 맞습니다. 웨스턴에비뉴와 레몬그로브 두 길에서 모두 파킹장으로 들어올 수 있는 드라이브웨이의 구조를 보아서도 틀림없는 그 몰이었습니다. 컴퓨터 가게를 다시 돌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드나들 정도의 작은 문, 수재비, 손칼국수, 감자탕 등 메뉴가 써붙여 있던 유리창에 이제는 컴퓨터 모니터와 스캐너 따위의 그림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 유리창 어디에도 식당이 이사한다는 안내문은 없습니다.
서울뚝배기 아주머니가 무슨 이유로 식당을 폐업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잠시 일었습니다. 비즈니스란 시작하기도 하고 그만두기도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허지만 종내 허전한 마음이 감춰지질 않았습니다. 이제 다시 수재비와 칼국수 잘하는 식당을 찾아야 하는 일이 숙제로 남은 것도 울적한 일 입니다. 고향 형수님을 추억할 때 어쩌면 ‘서울뚝배기’ 아주머니도 같이 떠오를 것이라는 생각이 잠깐 든 것이 위안이라면 유일한 위안 입니다.
이용우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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