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질투

2008.12.06 15:10

이용우 조회 수:1301 추천:149

1990년 겨울이었다. 자전적 소설 ‘꽃가마 언덕길’을 쓰신 김순애 권사님(고인)의 아파트에서 조촐한 연말 파티가 열렸다. 글마루에 나오시며 한창 문학에 재미를 느끼시던 김순애 권사님이 몇 차래나 우리 집에서 한 번 모이자, 모이자, 노래를 부르던 끝에 어렵사리 성사 된 자리였다. 참석자는 고원 선생님, 이숙표 수필가와 동생 이인표 씨, 그날 모임에 앞장 선 시조 시인 최경희 여사, 최여사의 성인영어학교 동료 라는 일본인 노처녀 사찌꼬, 그리고 김순애 권사님과 나, 이렇게 일곱 사람이었다. 크지 않은 노인 아파트 거실에 교자상을 펴놓고 둘러앉기에는 마침맞은 인원이었다.
올리브 스트릿의 노인아파트 11층에 위치한 김순애 권사님의 리빙룸에서는 다운타운의 아름다운 야경이 시원하게 내다 보였다. 때는 마침 크리스마스 부근이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꿈도 꿀 수 없는 도시이지만 세모에 들뜬 문청들의 가슴에 모닥불을 지피기에는 더없이 좋은 밤이였다. 김순애 권사님이 이웃 친구들과 함께 하루종일 만드셨다는 음식도 맛갈스러웠지만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했다는 석류주와 딸기주는 정말 입에 짝짝 붙도록 달았다. 그래서 그랬던가. 어느만큼 술잔이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으레 그렇듯이 노래판이 시작되었다.
두마안 가앙, 푸른 무래... 분명히 처음엔 그렇게 건전한 국민가요로 시작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때쯤에서부터였는지 일본 노래도 나오고 팝송도 부르더니 까불까불 동요까지 뛰어 다녔다. 지금 그때 부른 노래를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대충 머리를 쥐어짜 보면,
-안따 고노요메 나니시니 기따노... 어쩌구 하는 일본 가요에 ‘예스터데이’ ‘러브미텐더’ 따위 팝송, 그리고 동요와 대중가요를 마구잡이로 섞어 불렀다. 일본 노래는 아마도 최경희 여사와 성인영어학교 동료인 사찌꼬 라는 여인으로 해서 부르게 되었지 않나 생각 된다. 그런데 문제는 처음에는 예의 있게 돌아가며 부르던 노래를 언제부터였는지 나와 인표 누나(나는 이인표씨를 이렇게 부른다) 둘이서만 무슨 경쟁이나 하듯 번갈아가며 불러재낀 데에 있었다. 인표 누나로 말하면 미모는 그저 그렇지만 끼 하나는 철철 넘쳐 흐르는 여성이다. 자기 학교는 물론 남의 학교 동창회에도 불려다닐 만큼 명사회자로 이름 난 사람이다. 지금껏 ‘국민교육헌장’을 한달음에 주르륵 꿰고, 언제라도 노래 열 두곡 쯤은 연속으로 불러재낄 수 있는 만능 엔터테이먼트 이다. 이런 재사가 팔 걷어부치고 꿍짝을 맞추니 한다 하는 나로서도 맛이 살짝 갈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나는 기뻐요, 나는 기뻐요, 나는 기뻐요 정말 기뻐요.
-와이짱 깔라, 와이짱 깔라, 와이짱 깔라 짱짱 깔라.
-와다시와 우레시, 와다시와 우레시... 아이앰 해피, 아이앰 해피...
TV 속의 뽀뽀뽀 한 장면처럼 서로 마주보며 까불까불 고개짓도 하고 손춤도 살레살레 추어가며 인표 누나와 나는 노래를 주고 받았다.
-하늘엔 조각구름 떠어 가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어 있고, 아-아- 대한민국...
-꽃 피이히는 동백 서엄에, 봄은 왔꺼헌만, 형제 떠허난 부산 하앙에...
-yesterday, all my troubles seemed so far a way...
-love me tender, love me sweet, never let me go...
평소 자리를 봐가며 적당히 어울리고 밉상스럽잖게 처신을 한다고 자부하는 나였는데 그 날은 제동장치 없는 경운기가 비탈길을 내달리듯 부르고, 마시고, 낄낄거렸다. 김순애 권사님이 손수 담궜다는 석류주에 취했는지, 연말 분위기에 젖어서였는지 풀어진 기분이 한껏 고조 되어 있었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지만 나는 그쯤에서 ‘제비’를 원어로 부르려고 막 폼을 잡던 중이었다. 그 노래는 놀자판의 분위기와 그날의 컨디션이 잘맞아떨어지면 부르는 내 비장의 십팔번이다. 선생님의 냉랭한 음성이 떨어진 것은 그런 어간에서 였다.  
[이용우!]
세상 모르고 희희낙낙 하던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른 고개를 돌려보니 선생님께서 노한 얼굴로 나를 보고 계셨다. 언제나 이 선생, 하고 부르시며 무엇을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이것 좀 해주실 수 있으신가, 또는 그렇게 하세요, 같은 하오체로 말씀하시는 선생님이시다. 그런데 딱 잘라 이용우! 하고 부르셨다. 얼찐 뵈오니 선생님께서도 취기가 완연 하셨다. 얼굴이 붉으레 상기되셨고 가끔 술이 취하시면 나타나는 선생님 특유의 야성(?)이 노한 눈빛속에 형형히 떠올라 있었다. 아차 싶었다. 김순애 권사님이 애써 자리를 마련한 이유도 존경하는 선생님을 모셔서 대접하려는 뜻에서 였지 우리 노는 꼴 보려고 한 일은 아닐 것이었다. 노래를 부르던 대화를 하던 선생님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깜빡 잊고 방자하게 굴었다는 생각이 그제사 떠오른 것이다. 더구나 그 자리의 여인들 중 가장 젊고 괜찮은(?) 여성을 내가 독차지 하고 있지 않았던가. 큰 일이었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나는 짐짓 영문을 모르는 체 하며 네, 하고 선생님을 바라 보았다. 처분대로 하십시오, 그런 뜻이었다.
[자, 이선생, 내 술 한 잔 받아요.]      
뜻밖에도 선생님은 좀전의 노기를 싹 지우신 음성으로 평소처럼 내 술 한잔 받아요, 하시며 석류주병을 들어 올리셨다. 나는 감지덕지 네, 감사합니다. 하며 두 손으로 받아 마셨다. 나 또한 얼른 선생님의 잔에 석류주를 가득 따라 올렸다. 위기는 그렇게 무마 되었다. 동석했던 사람들도 기억 못할 정도로 선생님의 노기는 한 순간의 바람으로 지나갔다. 허지만 나는 그날의 바람을 지금도 잊지 않는다. 선생님의 안광에 서렸던 그 질투(이 낱말을 죄송한 마음으로 사용한다) 의 눈빛을 선명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남 끼리 만 알아채는 느낌이 있다. 아무리 밑바닥에 꼭꼭 숨겨진 마음도 무심을 가장한 헛기침이나 슬쩍 치뜨는 눈빛에서 꼬투리를 잡히게 되는 것이다. 어떤 자리 건 그곳에 여자들이 있기만 하면 남자들은 약속하지 않고도 당장 경쟁관계에 돌입한다. 경쟁의 농도가 진하냐 엷으냐 하는 그 차이가 있을 뿐, 판세를 읽느라 머리속이 분주하기는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 탁자 아래에서 손을 부비던가 구두코를 탈탈 털며 보이지 않게 견재하고 은근히 공격한다. 속은 꼬이면서도 너그러운 체 허허 웃고, 오줌누러 갈 때도 거룩한 표정으로 자리를 뜬다.  
누구든 자 이제부터 질투를 시작 하겠다, 그렇게 마음 먹고 질투를 시작 하지 않는다. 질투는 무의식 상태에서 생성 된다. 생각이 질투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질투가 생성된 한참 후에 생각이 따라 오는 거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질투는 시작되어 있는 셈이다. 질투는 무의식에서 자란다. 무의식은 마음과 정신의 저변이다. 그러니까 질투는 인간 생명의 원천인 것이다.
이 세상에 여자가 없었다면 모든 남자들은 철학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 고맙게도 우리 문학동네에 여류들이 많은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 인지 모른다. 만약 문학판에 남자들만 득실거린다면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아마도 나는 진즉에 노트북을 팽게치고 문학판을 떠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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