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산
2008.12.06 16:11
승우는 붉은 잔양에 휩싸이는 사막을 취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시에라네바다 산맥 뒤편으로 한낮의 위용을 잃은 태양이 얼굴을 내리는 시간이었다. 부석부석해지는 눈꺼풀을 오무려붙이고 캠프장 너머 아득히 바라보이는 모래산에 멍한 시선을 던져두고 있었다. 일출에 모습을 드러내는 바다의 섬처럼, 샌드듄스의 모래구릉은 일몰을 맞아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키작고 메마른 풀포기와 먼지뒤집어쓴 선인장과 거친 나무들을 싸안은 산야는 회색으로 가라앉고, 석양을 받은 모래산만 여명의 섬처럼 솟아 올랐다. 가장 높은 봉우리를 정점으로 극명하게 빛이 나뉘어졌다. 선 하나를 경계로 눈부신 황금과 깜깜한 암흑이 이 편과 저 편을 갈랐다. 금빛 모래톱에 몸을 누이면 그대로 까무룩히 산화하리라는 가정이 갈망인 듯 일었다. 황홀한 빛의 제전에 홀려 있으면서도 승우는 자신의 마음 한 켠이 눅눅해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쥴리를 샌드듄스에 내려주고 돌아 올 때의 칙칙한 마음이 사위어 가는 햇살에 실려 불안을 심화 시켰다. 캔버스를 들고 모래밭에 한 발을 내딛던 쥴리가 슬며시 돌아서며 굿바이, 하던 모습이 지워지질 않았다. 미소가 없었다. 목소리는 장난스러웠지만 표정은 차가웠다. 그림을 그리러 가는 게 아니라 그림속으로 사라지려 한다는 느낌이었다. 미망을 털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승우는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모래가 들어간 듯 눈속이 까실거렸다. 아릿한 노을의 빛살을 뚫고 날카로운 무엇이 현시할 것만 같은 불안한 예감이 출렁였다. 장작불이라도 피우자, 그가 결단하듯 엉덩이를 드는 때였다.
아빠, 엄마가 죽을 때에... Breathing 을 안했어?
승우는 레이첼의 여린 목소리에 노을보다도 짙게 얼굴을 붉혔다. 편치않던 마음의 정체가 무엇이었던가 가늠이 갔다. 아이의 그 질문 욕구도 일몰의 잔광속에서 태동 되었을 것이었다. 부녀의 가슴속에 도사려 있던 환부가 대지의 몽환적 기운에 스르르 열려버렸다. 자연에 순화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른이나 아이나 다름이 없을 터이다. 단지 어른은 아닌척 할 수 있는 것을 아이는 못한다는 그 차이가 있을 뿐이겠다.
무슨 말이니... 엄마가 많이 아파서 그렇게 됐잖아. 죽으면... 숨을 못쉬지.
승우는 아이의 원하는 답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짐짓 외면했다.
I Know, 그거 말고, 엄마가 Die 할 때... How Doing Her?
그것은 레이첼이 지난 겨울 어느 비오는 날의 자동차속에서도 물어 온 말이었다. 그때는 운전을 핑계로 어물어물 대답을 피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땅위에서 가장 고요가 깊다는 사막에 어둠이 내리고 있다. 안개 같은 적막이 그와 아이 사이를 비켜설 수 없도록 묶고 있는 것이다. 그는 천천히 아이를 돌아 보았다. 레이첼은 과장되게 눈을 둥글려 뜨고, 아랫입술을 쭉 빼문체 그를 올려다 보았다. 아빠가 좋아하지 않을 말을 해놓고 짓는 몽키페이스다. 그는 아이의 한 손을 찾아 쥐었다. 얼굴을 숙여 아이의 큰 눈을 들여다 보았다. 아이의 동공에 붉은 노을이 서려 있다. 죽는 순간의 제 엄마 모습이 어떠했는 지가 아이의 단순한 궁금증일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4 학년 아이가 품을 수 있는 평범한 의문일 수 있다. 그러나 아내의 죽음이 거론될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쥴리의 발가벗은 나신으로 인해 그는 아이가 제 엄마의 죽음을 추궁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하는 것이다. 승우는 고개를 들어 샌드듄스를 바라보았다. 쥴리는 그림을 완성 했을까. 해가 지기 전에 그녀를 데려오려면 별로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아이의 눈으로 되돌아오며 잡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근래에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 일이 없었다. 막바지로 치닫는 아내의 병세가 몹시 위중한 상태여서 술따위를 마신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벌써 삼 년 넘어 계속되고 있는 아내의 병수발로 승우는 한껏 지쳐 있었다. 하루에도 두 서너 차래 이상 다운타운의 옷가게와 3가에 위치한 암병동을 쳇바퀴 돌 듯 들락거리다 보면 몸은 언제나 치킨숩처럼 풀어져 있었다. 식사를 비롯한 집안 일은 어머니가 맡아 주었지만 유치원에 다니는 레이첼의 등하교와 생활속의 이런저런 잡사까지 모두 그의 몫이었다. 아내의 패션감각으로 알차게 운영되던 옷가게도 그의 둔한 안목에 매상이 줄기만 했다. 손익의 분기점을 지나 적자로 돌아선 지가 벌써 일 년이 넘었다. 아내의 병원비는 메디칼로 해결 된다지만 늘어나는 재정 압박은 아내의 병세와 함께 그를 옥죄는 사슬이었다.
쥴리가 휴게실 소파에 앉아 울고 있었다. 승우는 벽걸이 TV에 시선을 주고 있는 그녀가 울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언제 왔어, 남편은 좀 어때?
쥴리곁으로 다가간 승우가 그렇게 말을 건네며 보니 그녀의 볼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승우를 일별한 쥴리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쓸며 말했다.
닥터가... 산소호흡기 제거를... 가족과 의논해보라구...
두 달이 넘게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있는 그녀의 남편에게 예정된 절차가 닥쳤다는 말이었다. 쥴리의 남편이 결국 그렇게 되리라는 것은 굿사마리탄 병원의 중환자실 사람들 사이에 묵계처럼 퍼져 있는 사실이었다. 휴게실이나 구내 식당에서 마주치는 환자 가족들은 짤막한 인사 속에 서로에게 다가서는 어둠을 짐짓 외면 한다. 중환자 병동의 입원 환자가 완치되어 나가는 일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수술과 키모테라피와 방사선에 삭아진 사람들은 눈부신 현대의학에 입은 혜택을 위안으로 삼으며 예정된 소모의 대열로 떠밀려 간다. 오랜 투병과 간병에 지친 그들은 떠나는 사람이나 남는 사람이나 큰 슬픔이 없다. 슬픔이 말라버린 것이다. 수심 가득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는 이들은 방문객이거나 아니면 임종을 보러 온 낯선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과장된 슬픔을 얼굴에 내 건다. 눈시울을 붉히거나 굵은 눈물방울을 떨구며 Oh, No, 하고 비통해 한다. 유심히 살피되 덤덤히 지나치는 사람들은 이미 오랜 간병에 지칠 대로 지친 가족들 뿐이다.
입을 열므로해서 슬픔이 더 커졌는지 쥴리의 두 눈에서는 새 눈물이 또 주르륵 흘러 내렸다. 쥴리가 손바닥으로 그것을 닦았지만 눈물은 자꾸 흘러 나왔다. 승우는 쥴리의 눈물을 보며 이 여자는 정말로 슬픈 것일까, 그런 생각을 했다. 아내가 빨리 죽어버리기나 했으면... 지치고 힘들 때 툭 뱉아놓고 누가 듣지나 않았을까 화들짝 놀라기까지 했던 스스로를 돌아보며 그는 쥴리의 눈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적을 바라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잖느냐고...
담당 닥터가 말하더라며 쥴리는 연해 눈물을 손바닥으로 훔쳤다. 어쩌면 쥴리의 눈물은 슬프다기 보다 어처구니가 없는 건지도 몰랐다. 육신의 기능이 하나 둘 망가져가는 아내를 지키며 삼 년여의 병수발을 들고 있는 승우와, 퇴근길의 차량전복사고로 남편이 뇌사상태에 빠진 쥴리와는 입장이 다를 터였다. 사망으로의 예정된 길을 진이 빠지도록 걷는 쪽과 갑자기 닥친 편의 슬픔에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승우는 자신의 처지 보다 쥴리의 상황이 낳을 거라고 생각 했다. 눈물이 말라버린자 보다는 아직 흘릴 눈물이 남아 있는 자가 행복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자는 낯선 용어가 튀어나온 것은 그 말을 한 승우 자신도 놀란 일이었다. 승우는 물론 쥴리 역시 LACC 시절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망각해 왔다. 서로가 마치 문병객들처럼 과장된 희망과 위로를 주고 받으며 서둘러 자리를 비껴왔다. 그러므로 술은커녕 밥 한끼 먹자는 소리도 터부처럼 금해 온 처지였다. 하지만 정작 놀랄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그녀가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오케이, 하며 발딱 일어선 것이었다.
학생들 간에 자조하듯 UCV(벌몬트주립대학)라고 부르던 LACC(시립대학)시절이 있었다. 중학교 삼 학년에 이민을 온 쥴리는 학점을 쌓아 메직마운틴 근처의 어느 미술대학에 편입하겠다는 꿈이라도 있었다. 허지만 고등학교 졸업장까지 받아들고 이십대 문턱에 도미한 승우는 그런 알찬 계획도 없이, 그저 미국의 학교 생활이나 겪어 본다는 생각으로 그곳에 적을 두고 있었다. 승우 자신은 외삼촌이 운영하는 다운타운의 의류도매상에 곧바로 나가서 일을 하고 싶었지만, 창창한 나이에 대학도 다니고 그래서 본토 영어도 배워야 미국살이가 수월하지 않겠느냐는 어머니의 성화에 밀렸던 것이다. 그는 나름 열심히 ESL 클래스를 들었지만 어머니가 말한 본토 영어는 쉽게 입에 붙지 않았다. 영어가 결코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라는 진리를 터득하여 슬슬 권태에 사로잡힐 즈음 그의 눈앞에 쥴리가 나타났다.
짜증나는 수업시간을 견디는데 일조했던 그녀를 십여 년이 훌쩍 지나 중환자병동에서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처음 입실하던 날, 남자간호사가 끄는 환자용 이동침대를 따라오는 중년의 여자가 쥴리 라고 승우가 알아 챈 것은 그녀의 왼쪽 입술 끝에 붙은 점 때문이었다. 시간의 흐름앞에 마모되는 모래산처럼, 허리아래로 살이 몰리고 머리칼도 짧아졌지만 입꼬리의 흑점은 변함없이 거기에 붙어 있었다. 제법 콩알 만큼 큰 그 점은 영화배우 누구 같다며 그가 놀리곤 하던 흑점이었다. 그녀의 점은 별나게도 세모꼴이어서 기억을 더욱 선명하게 했다. 승우는 가끔 ET처럼 집게손가락을 슬며시 펴들어 잽싸게 그 점을 누르곤 했는데, 나중에는 그것이 키스 하자는 신호로 발전했다. 방과 후면 찻집으로 영화관으로 붙어다니다가 으레 자정이 되어서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곤 하던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 것은 흑인폭동 때문이었다. 한인타운 인근 스와밋에서 운영하던 옷가게를 폭도들의 방화로 잃은 그녀의 부모가 모든 것을 정리하여 형제들이 있다는 동부로 떠나버렸던 것이다. 한 동안은 전화로, 이메일로 관계를 이어 갔지만 시간이 지나며 차츰 시들해지고, 결국 뜸 하게 오고 가던 안부가 어색해지게 되자 아예 연락을 끊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런 두 사람이 엉뚱하게도 중환자병동에서 조우하게 된 것이다. 서로가 표정을 감추려고 애 쓸 필요도 없었다. 중환자병동이라는 공간적 중압감과,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있는 배우자의 위중한 상태로 해서 클라스메이트 이상의 관계는 감쪽같이 증발해버렸다. 승우는 십 년도 넘어 만난 옛여자의 눈을 거리낌없이 들여다보며 그녀 남편의 상태를 물을 수 있었다. 더 작아지거나 커진 것같지 않은 입술 옆의 흑점도 덤덤한 눈으로 바라 보았다. 사람의 생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 앞에서 ET손가락으로 여자 입술에 붙은 흑점을 누른다거나 그래서 키스를 한다는 따위들은 정말 너무도 하찮은 기억에 불과했다. 어머, 하고 얼굴을 살짝 붉히던 쥴리도 이내 표정을 수습하며 설명하지 않아도 뻔한 남편의 상태를 한숨에 섞어 말했다.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두통과 함께 팽창한 방광의 압박으로 잠을 깬 승우는 발가벗은 나신으로 자신의 가슴에 잠들어 있는 여자의 모습에 흡, 하고 숨이 멎었다. 승우는 여자의 머리에 눌린 팔을 뺄 생각도 못하고 초점 잃은 동공을 한 곳으로 모으느라 눈꺼풀을 잔뜩 오무렸다. 지난 밤에 얼마나 술을 마셨던지 빙빙 도는 머릿속을 한참이나 추슬러서야 겨우 시선이 모아졌다. 커텐을 투과해 들어온 어슴프레한 빛 만으로도 자신의 팔에 안겨 있는 여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희미한 어둠속에서도 입술끝의 흑점이 식별 되었다. 승우는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지난 밤 윌셔블러버드의 일식집에서 시작한 술이 웨스턴가의 학사주점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떠올랐다. 전에는 술을 잘 못마시던 쥴리가 부어주는 대로 잔을 들어올리던 모습과, 이사간 동부에서도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했다는 것, 결혼 하고 엘에이로 오게 된 사연 등을 난 아이도 못낳아, 라는 말에 후렴처럼 섞어 하던 기억들이 흔들리는 머리속에 남아 있었다. 쥴리는 입술을 살짝 벌린 체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사치스런 후회도 아니고 그렇다고 원망은 더더욱 아닌, 슬픔 비슷한 감정에 사로잡힌 승우는 쥴리의 벌어진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기다린 끝에 무엇이 무너지는 건지 아니면 뚫려버리는 것인지 승우는 명치끝이 뚝,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큰 불덩이가 목덜미에서 일어나 얼굴을 거쳐 머리꼭대기로 후욱 타올랐다. 그는 눈을 감았다. 뜨거운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진동 전환된 셀률라폰이 뚜루룩, 뚜루룩 떨림 소리를 내었다. 벗어 던진 옷가지의 어디쯤에 묻혀 있을 그것은 이내 떨림을 멈추었다. 승우는 화들짝 눈을 떴다. 검불처럼 삭은 아내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던 것이다. 승우는 벌떡 일어났다. 황망한 손짓으로 휴대폰을 찾았다. 바지와 쟈켇의 어느 주머니에도 휴대폰은 없었다. 또로록, 음성 메일이 도착해 있다는 단발 신호가 티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백에서 났다. 그 속에는 쥴리 것으로 보이는 휴대폰이 승우의 것과 함께 들어 있었다. 승우는 자신의 휴대폰이 왜 거기 들어가 있는지 의문이 갔지만 그런 것을 더 생각하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 충혈된 눈, 개기름이 번들거리는 얼굴로 승우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의 아내는 마지막 여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엄마가 숨을 조금씩... 아주 천천히 쉬었어. 그러니까 두 번 쉬어야 할 시간에 한 번을 쉬었지. 그렇게 하다가 더 느리게... 보통 사람이 세 번 숨쉴 동안에 겨우 한 번을... 그러다 그 다음에는...
승우는 뚫어져라 자신의 눈을 쳐다보는 레이첼의 시선을 피해 멀리 샌드듄스의 주봉을 바라 보았다. 겹치고 겹친 모래구릉들이 뱀의 질주처럼 부드럽게 물결치는 샌드듄스는 조금전 보다 한층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다음에는?
레이첼은 제 아빠의 끝말을 되돌려주며 재촉했다. 승우는 아이가 잔인한 것이 아니라고, 정말 궁금해서 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이른 별을 찾아 하늘로 시선을 들었다.
그 다음에는... 오래 있다가... 그러니까 우리가 열 번쯤 숨을 쉬었을 만큼 긴 시간이 지난 후에... 마지막 숨을... 아주 가늘고 여리게... 쉬었단다.,
아내가 숨쉬는 것조차 거추장스럽다는 듯, 사르르 생을 마감하던 모습이 구름에 물든 노을처럼 또렸이 떠올랐다. 임종에 앞서 손목과 팔뚝은 물론, 목과 옆구리에 주렁주렁 달렸던 호스와 주사바늘, 입을 막고 있던 산소마스크까지 모두 제거된 아내의 모습은 씻은 듯 말끔했다. 세 번에 걸친 수술과 키모테라피와 방사선 치료로 건초처럼 마른 아내의 민둥 머리엔 꼬부라진 머리칼 하나 없이 깨끗했다. 다만 숨이 잦아들며 입꼬리를 비집고 나온 몇 방울의 거품과 함께 아내는 죽음에 들었다. 아내의 마지막 숨결 만큼이나 가냘픈 목소리로 말을 마친 승우의 부석부석한 눈두덩에 뜨끈한 물기가 몰려 왔다. 마지막 숨 이라거나 여리다는 말을 레이첼이 알아듣기나 했는지 의문이었지만, 고개를 숙이면 눈물이 굴러나올 것 같아 그는 아이의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승우에게 손을 잡힌체로 레이첼도 제 아빠가 보는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아빠, 엄마는 지금 Heaven 에 있지?
아이의 그 한 마디에 스모그처럼 어둡던 승우의 마음이 활짝 개었다.
그럼! 헤븐에 있구 말구, 엄마는 저 노을 위, 저 구름보다 더 높은 천당에 있지. 레이첼, 그걸 어떻게 알았니?
승우는 아이의 시선을 구름너머까지 인도하겠다는 듯, 집게손가락을 하늘로 곧추세웠다.
응, Sunday School에서 Sister가 말했어.
오라, 수녀님이 알려주셨구나.
응, 수녀님이 엄마가 Heaven에서 Angel 이래.
그래? 하하하, 천당에 갔으니까 당연히 천사가 됐겠지. 그럼, 엄마는 천사야.
승우는 레이첼에게 가지고 있던 걱정 하나를 덜은 후련함에 활짝 웃었다. 허지만 웃음의 뒤끝은 이내 씁쓸함을 몰고왔다. 엄마는 천사, 라는 말이 아빠는 악마, 라는 반대어를 자연스레 떠올렸기 때문이다. 악마가 아니고서야 중환자병동에 누워 있는 아내를 버려두고 남의 여자와 밤을 지샐수 있을까. 더구나 상대 또한 의식불명인 남자의 아내가 된다. 변명의 여지없이 악마들의 불륜이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죄의식과 부끄러움에 명치 끝이 옥죄였다. 노을에 투영된 아내의 혼이 말갛게 내려다 보는 것 같았다. 방금전 엄마는 천사 라고 했던 자신의 말을 추궁한다는 느낌이었다. 더는 하늘에 시선을 둘 수가 없었다. 그는 아이를 돌아 보았다. 레이첼은 꿈꾸듯 행복한 얼굴로 하늘을 보고 있었다. 아이의 천진한 모습은 승우의 눈물을 마르게 했다.
악!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꽈당, 하고 둔중한 무엇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이제껏 집 안에서 들어 본 적이 없던 소리였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크고 이질적이던지 쏴, 쏟아지는 물소리속에서도 승우는 단번에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서둘러 물꼭지를 잠그고 샤워룸을 뛰쳐나왔다. 무슨 소린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걸까. 그런 의문을 품으며 황급히 수건을 몸에 두르는데 울음소리가 들렸다. 으어, 으흐어, 허으으. 그 울음은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배인 것이었다. 돌뿌리를 잡고 낭떠러지에 매달려 발버둥치는 사람의 비명 같았다. 칼을 든 흉악범에게 뒷덜미를 잡혔을 때나 낼수 있는 소리였다. 집안에는 승우와 레이첼과 아내 뿐이다. 그렇다면 울음소리는 분명 아내의 것이었다. 아내가 울고 있다, 아내가 두려움에 떨며 울고 있다. 순간 승우의 가슴이 쿵, 무너져내렸다. 막았다, 결국 종양이 척추신경관을 막은 것이다.
지금 팥알같은 저 종양이 콩알만큼 커지면 척추신경관을 막게되지요. 그러면 허리 밑의 모든 기능이 마비됩니다.
담당 의사의 경고가 현실로 닥친 것이다. 아내의 척추에 마비증세가 도달한 게 틀림 없다. 유방에서 폐로, 폐에서 척추로 전이 된 암세포가 두뇌로 올라가면 아내는 죽음에 이른다. 승우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살며시 문을 열었다. 아내가 울고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가늠을 해 보았다. 울음소리는 부엌에서 나고 있었다. 혹시 아내가 무엇을 썰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칼질이라도 하다가 넘어졌다면, 하는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더욱 두방망이질 쳤다. 아내는 자신의 건재가 육체의 활동으로 증명 된다는 듯, 불안한 몸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승우의 시선이 못미친다 싶으면 어느새 식탁을 닦던가 설거지를 하던가 했다. 그는 까치발로 내달아 부엌을 들여다 보았다. 아내가 싱크대앞 부엌바닥에 누워 울고 있었다. 흐으으, 허흐으, 온몸을 떨며 울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아내는 다리에 힘이 없다고, 감각이 없어 진다고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그런 아내가 척추 마비의 실체를 온몸으로 겪은 것이다. 아내가 지금 얼마나 무섭고 두려울 것 인지 그는 절절하게 짐작이 갔다. 승우는 어떻게 하면 저 떨리는 아내의 몸을 멈출 수 있을까, 쓸모없는 궁리로 가슴을 벌렁거렸다. 아무것도 보기 싫다는 듯 아내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울었다.
여보, 어떻게 된거야.
승우는 두 팔로 서둘러 아내의 상체를 안아 일으켰다. 아내는 승우의 품에 안겨서도 두려운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얼굴을 가린 손도 풀지 않았다. 아내의 손가락 사이로 굵은 눈물이 쉴새없이 줄줄 새어나왔다. 승우의 머리에서도 닦지 않은 물방울이 아내의 얼굴과 손등으로 뚝뚝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아내는 죽기보다 싫어하는 병원으로 다시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또 수술을 받았다. 수술 횟수가 늘어나는데 비례해서 수술 시간도 길어졌다.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아내의 몸도 더 망가져 나왔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며 승우는 의학이 결코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는 쪽에 믿음을 두었다. 돌이킬 수 없는 가정이지만 아내가 애초 수술 따위를 받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상태에 있을 게 틀림없다고 그는 확신했다. 사람들은 현대의학이라는 거대한 집단의 외형에 현혹되어 육신이 찟기고 잘리는 처참에 동의 하고 마는 것이다. 수술에서 깨어난 아내는 죽어도 좋으니 당장 집으로 가자고 했다. 병원에 있는 것조차 싫다고 했다. 승우는 아내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병원은 환자 마음대로 가고 오는 곳이 절대 아니였다. 별로 옳을 게 없는 그들의 방식에 일방적으로 순응 해야 하는 것이 환자의 의무였다. 결국 아내는 병원이라는 공간적 불쾌감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전혀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강력 수면제를 처방전의 서너곱씩 복용해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종잇장 같이 얇아진 아내의 의지력은 죽음의 그림자를 밀어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아빠, We Sleeping together, 아줌마?
피크닠테이블 뒤쪽에 설치한 텐트를 보며 레이첼이 물었다. 텐트가 하나 뿐이니 그런 의문이 들었나 보았다. 밤에 별이 뜨면 레이첼에게 북두칠성과 은하수를 말해 줄거야. 엘에이를 떠나 오던 아침에 쥴리는 지나가는 말처럼 그렇게 자신의 생각 한 자락을 비쳤다. 쥴리의 영어 실력이라면 아이의 감성에 깊이 다가 설 수 있을 것이기에 못들은 척 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잠 자리에 대한 얘기는 없었지만 그런 것으로 미루어 쥴리와는 셋이 함께 잔다는 묵계가 이루어 졌다고 나름 생각 했다. 그런데 아이의 갑작스런 질문이 승우를 멈칫하게 했다. 쉽게 한 자신의 계획이 아이에게는 부담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은근히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야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그런 우려를 슬며시 덮을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으음, 우리 공주님은 아줌마랑 같이 자는 게 싫어요?
승우는 곤란한 답변을 피하기 위해 짐짓 장난스럽게 되넘겼다. 아이는 또 아빠가 싫어하는 질문을 했다는 듯 몽키페이스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난처한 표정이었다. 으흥으흥, 어깨를 올리고 상체를 흔들며, 목구멍에서 지어낸 앓는 소리를 했다. 아이가 그런 소리를 내는 것은 아빠가 잘 알면서 그러느냐는 의미가 담겨 있다. 승우도 아이를 향해 똑같이 몽키페이스를 지어 보였다. 말해봐, 무슨 말인지 네가 해봐, 승우의 몽키페이스는 그런 뜻이었다.
아빠, Sorry, I'm not Comfortable.
아이는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더 삐죽이 내밀었다. 여차하면 울음이라도 터뜨리겠다는 얼굴이었다. 승우는 가슴이 뜨끔했다.
오케이, 알았어. 아빠와 둘이 자면 되지?
승우는 얼른 그렇게 대답했다. 아이가 불편하다는 데야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레이첼은 의외 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환히 얼굴을 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이는 이내 고개를 떨구며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Are You Sure? How about 아줌마?
아줌마는 어디서 자느냐는 것과 아빠의 진의를 의심하는 마음을 얼버무려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더욱 궁지에 몰렸다. 승우는 헛기침을 큼, 하고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일어 섰다. 백설공주에 나오는 일곱 난쟁이처럼 허리를 굽히며 목소리를 지어 냈다.
공주님, 쥴리 아줌마는 차에서 잡니다. 그러면 되겠지요?
그제서야 아이는 모든 문제가 풀렸다는 얼굴로 활짝 웃었다.
자, 그럼 어서 불을 피우고, 쥴리 아줌마를 데리러 가야지?
쥴리와 함께 모닥불 가에서 밤새울 작정을 속에 묻고 승우는 서둘러 나뭇단을 화덕속에 쌓아 올렸다. 레이첼은 깡충깡충 뛰며 밴으로 들어가더니 바비인형이 그려진 가방을 들고 나왔다. 피크닠 테이블 위에 가방을 열고 내용물을 꺼낸다. 아기곰 모형의 베개, 미키마우스 인형, 그림동화책, 칫솔, 양말, 썬블락크림, 야광펜 따위들이 테이블 위에 펼쳐졌다. 승우는 불붙인 종이를 나뭇가지 밑으로 집어넣으며 아이의 모습을 곁눈질 했다. 아이는 미키마우스 인형을 집어들고 생긋 웃더니 가슴에 꼭 껴안았다. 이미 헐렁해져버린 아기곰베개와 미키마우스는 아이가 가는 곳이면 어디고 따라가는 물건이다. 지난 여름방학의 달라스 여행 때도, 교회 주일학교의 주말 캠프에도, 학교 친구와의 슬립오버에도 어김없이 함께 했다. 물론 밤 마다 머리밑에는 아기곰을, 가슴에는 미키마우스를 안고 잔다. 아기곰 인형이야 잠자리에서 정이 든 베개이니까 그럴 수 있다지만, 어린 아이들이나 좋아할 미키마우스 인형을 4학년이나 된 레이첼이 보물처럼 끼고 다니는 모습은 언제나 승우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아이가 미키마우스를 인형이 아니라 제 엄마로 인식한다는 사실이 그를 옥죄는 사슬이었다. 그 것은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가족이 함께 간 디즈니렌드에서 그의 아내가 사준 것이다. 그 나들이 며칠 후 승우의 아내는 유방암 판정을 통고 받았다. 여보, 그때 디즈니랜드 가길 잘했지? 우리 레이첼에게 저 미키마우스 인형 사주길 참 잘했지? 레이첼이 미키마우스를 안고 다닐 때마다 환자 침대에 누운 아내는 래코드처럼 그에게 동의를 구했다.
아내를 떠나 보낸지 일 년쯤 지난 어느 아침이었다. 지난 밤 꿈자리가 뒤숭숭 했던 승우는 담장위의 장미 한 송이를 꺾어 들고 묘지를 찾았다. 아이 등교와 출근 사이의 짧은 시간을 이용해서 였다. 아내가 뒷뜰에서 호스로 물을 뿌리며 깔깔거리는 꿈이었는데 웃음소리가 뚝 그쳐서 돌아보면 쥴리가 서 있었다. 승우는 아내 꿈을 꾸다 잠이 깨면 더 이상의 수면은 포기해야 했는데, 아내 꿈에는 대개 쥴리가 동행한다는 사실이 불면을 부추기는 더욱 큰 이유였다. 새벽 방뇨 뒤의 후벌잠에서라면 아침이 가까운 시간이니 그래도 좀 나았다. 하지만 한 밤중이나 어둑새벽에 그런 꿈을 만나면 그날 하루는 피곤에 절어지내야 했다.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한 번 달아난 잠은 돌아 오지 않았다. 승우는 어쩔수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시간예약된 자동밥솥의 버튼을 수동으로 바꿔 누르고, 허청허청 아이 도시락의 반찬이나 챙기는 게 고작이었다.
갓길에 차를 세운 승우가 아내의 묘지 부근을 올려다 보니 여인 하나가 앉아 있었다. 어거스틴 성인의 부조상 왼편으로 키 작은 무화가나무 밑은 아내의 묘가 있는 곳이었다. 완만한 능선의 정상에 위치한 아내의 묘는 길에서 올려다 보면 하늘과 맏닿아 있어서 가늠하기가 수월했다. 승우는 아내의 묘를 향해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한 손에 꽃묶음을 든 여인은 길쪽으로 등을 보인체 쪼그려 앉아 하염없이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아내의 활짝 웃는 얼굴과 간략한 내력이 적힌 비석이 누웠을 터였다. 1971 년에 오고, 2007 년에 가다, Belove Husband & Daughter, 그 단순한 글에서 여자가 헤아리는 것은 무엇일까. 평일의 이른 시각에 묘지를 찾아 상념에 젖는 사람이라면 데면데면 한 관계는 아닐 것이다. 아내의 친구일 거 라고 생각은 되지만 쪼그려 앉은 뒷모습으로는 짐작이 가질 않았다. 승우는 궁금증을 누르며 능선을 올라갔다. 뒤돌아 앉은 여인의 크림색 원피스가 아침 햇살을 받아 뽀얗게 빛났다. 여인의 등에서 반사된 빛살 하나가 그의 눈을 찔렀다. 치맛자락에 팽팽히 감싸인 여자의 둔부로 시선이 미끌어졌다. 뭔가 낯익다는 생각이 언 듯 들었다. 승우는 사 오미터 아래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자의 옆모습이라도 보기위해 한쪽으로 고개를 뽑았다. 그때 여자가 허리를 세우며 발딱 일어났다. 어떤 느낌이 있었던지 여자는 빠르게 뒤돌아 섰다. 쥴리였다. 승우는 아래에서 올려다 보고, 쥴리는 위에서 내려다 보며 시선을 부닥쳤다. 쥴리는 입술을 꼭 깨물며 아미를 모았다. 음모가 들통난 스파이처럼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사람이 뜸한 시간을 택했는데 맞닥뜨리고 말았다는 낭패감이 얼굴에 가득했다. 거북스럽기는 승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부끄러운 행위 이후 일 년이 훌쩍 지나서 만난 여자가 편할 리 없었다. 더구나 그 곳이 아내의 묘지라는 사실에 묘한 느낌이 가슴을 후볐다. 마치 죽은 아내에게 불륜 현장을 잡힌 기분이었다. 승우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어째서 저 여자와는 극히 가깝다가 갑자기 먼 사이가 되기를 반복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발가벗고 뒤엉킬 만큼 가까웠으면서도 서로가 휴대폰 번호 하나 교환하지 않았다. 아내의 장례를 치른 후로 암병원이 있는 3가 방면은 의식적으로 피해 다녔다. 장례로 경황없이 흘러간 며칠 후 문득 쥴리 생각이 떠오르기는 했다. 그 날의 행위에 대해 변명이든 정당화든 담판을 짓고 싶었다. 그러나 역부러 중환자 병동을 찾아갈 마음은 내키지 않았다. 쥴리의 남편도 그 어간에 산소호흡기 제거가 이루어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며, 병원으로 찾아가도 그녀를 만날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일찍 왔네.
승우는 묘지에 오면 언제나 만나는 사람에게처럼 말했다. 속은 요동질 치면서도 말은 태연하게 나오는 것이 스스로도 놀라웠다. 쥴리는 꽃 든 손을 들어올리며 어깨를 으쓱 했다. 그녀의 등에 쏟아지던 햇살이 이제야 말로 제자리를 찾았다는 듯, 쥴리의 전신을 화사하게 물들였다. 빛의 각도 때문인지 아니면 치켜보는 위치라서 그런지 승우는 몹시 눈이 부셨다. 불편을 해소하기위해 승우는 쥴리 곁으로 올라갔다. 승우는 정면으로 얼굴을 대하기가 멋적어 그녀 곁으로 나란히 섰다. 쥴리의 눈길이 던져진 근방으로 승우의 시선도 자연스레 따라 갔다. 발아래 펼쳐진 공원묘지를 슬몃 지나 길고 작은 건물들이 빼곡한 도시를 훌쩍 넘어 섰다. 그 곳에 새털구름 같은 바닷자락이 아슴하게 누워 있다. 한 낮의 강렬함을 준비한 캘리포니아의 아침 햇살이 바다위에 금비늘을 뿌리고 있었다.
승우 씬 나를 이상한 여자로 보겠지?
햇살 부서지는 바다에 시선을 던져둔 체 쥴리는 낮은 목소리로 느리게 말했다. 쥴리의 말은 속삭임 같았다. 이상하게 보느냐는 물음이 아니라, 이상하게 보지말라는 애원처럼 들렸다. 승우는 숨을 깊이 들여 마셨다.
무슨... 그러기로 말하면 나는 뭐 정상 인가.
늘어뜨렸던 손을 들어 팔짱을 껴붙이며 승우도 눅은 음성으로 말했다. 쥴리는 꼭 다문 입술을 귀쪽으로 당기며 웃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내가 그러긴 했나 의문이 드는거야. 눈을 떴을 땐 혼자였지만 정황은 그렇지 않게 느껴지고, 꿈처럼 혼미한가 하면 어떤 장면은 사진같이 선명하게 떠올랐어. 내가 남편 이야기 하며 울었던 것과 승우 씨 휴대폰을 빼앗아 핸드백에 넣은 기억은 아주 또렸했지. 내 기억을 확인하려고 핸드백을 열어봤어. 승우 씨 휴대폰이 없는 거야, 그러자 또 모든 게 없었던 일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드는 거 있지?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셔본 것도, 감쪽같이 기억을 잃어보기도 처음이야. 내가 한 일을 모르겠다는 게 너무도 무섭게 느껴졌어. 쥴리, 너 뭐야, 너 뭐냐구... 난 그 말을 열 번도 넘게 했어. 나 자신에게.
쥴리는 두 손으로 모아 쥔 꽃묶음을 가슴에 안고 또박또박 말했다. 승우는 이어질 말이 무엇일까 긴장 되었지만 변명은 아닐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승우는 먼 바다에 시선을 묶어 둔체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기 누워 있는 승우 씨 아내가 그 아침에 운명했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런데 더 무서운 건 그날 내가 남편의 사망을 허락한 거야. 닥터가 내미는 종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싸인을 했다구.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다음날 정오까지 내쳐 잠을 잤어. 한 낮에 잠에서 깨었는 데 흡사 그날 아침처럼 아무 생각도 안나는 거야, 어처구니 없게도 술 많이 마신 기억이 그 때 또 나는 거 있지. 머리도 역시 어지러웠어. 그래도 집을 나섰지. 늘 하던 대로 병원을 향해 차를 몰아 가다가 정지신호에 걸려 네거리에 멈추어 섰어. 그런데 그 빨간 정지신호를 보고 있노라니 그제서야 남편이 죽었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거야. 아니, 죽었다는 게 아니고 죽였다는...
승우는 가슴이 녹지근 했다. 쥴리의 남편이 결국 정해진 길을 가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 결정이 그렇게 빨랐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사람이 참 쉽게 죽는구나, 하는 뻔한 깨달음이 승우의 머리속을 뱅뱅 돌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 쥴리는 의사의 권고에 의해 어쩔수없이 내린 결정이었어. 또 그 사람은 어차피 식물인간이었잖아. 나야 말로 사람이 아니지, 살아 있는 아내가 어서 죽기를 바랬으니까. 한 두 번이 아니야, 파김치가 된 몸을 침대에 뉘일 때면 나도 모르게 그 말을 습관처럼 뱉았어, 짜증난 목소리로 말이야.
그는 말을 하고 나서야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지만 가슴은 후련 했다. 명치 아래 맺혔던 응어리가 쑥,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어깨를 세워 숨을 훅, 내쉬었다. 어두운 이야기를 밝음 아래서 나누는 게 이질스러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본질에 더 명징하게 다가 선다는 희망이 섰다. 때 묻은 상자의 뚜껑을 열자 거기 고여 있던 오물이 태양빛에 훌훌 증발해버리는 느낌이었다. 초가을의 상큼한 아침 햇살이 너무도 깨끗한 때문이었다. 승우는 쥴리에게로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문제는 죽은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경과가 아니야. 그들의 죽음 이전에 있었던 우리의 행위를 어떻게 정리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
승우는 내친김에 오물상자를 활짝 열어졌혔다. 더러운 오물을 말끔히 엎어버리고 뽀얀 햇살로 가득 채워지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거기 있었다.
으음, 그래... 승우씨 말이 맞아. 본질은 그거야, 사람의 의지가 작용되는 것이 문제의 대상이겠지. 우리... 아니, 나 많이 나쁜 여자 인가.
어느새 몸을 돌려 세운 쥴리는 승우의 눈을 똑바로 건네 보며 자문하듯 말했다. 손에 모아쥔 꽃묶음을 더욱 가슴에 붙안으며 그녀는 승우의 시선을 붙들었다. 승우는 그녀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쥴리는 잠시 어리둥절 하더니 꽃묶음을 건네 주었다. 승우는 허리를 굽혀 비석 앞의 철제 화분에 쥴리의 꽃을 꽂았다. 비석위의 아내가 활짝 웃고 있다. 그 것은 하와이 해변에서 찍은 신혼여행 사진이다. 신혼여행의 행복한 미소가 비석으로 옮겨 앉으리라고 아내는 생각이나 했을까. 비석위에서 활짝 웃고 있는 아내의 미소를 볼 때마다 승우의 가슴은 싸아 한 아픔을 느낀다. 승우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우리 관계 참 이상하지? 쉽게 만나서 가볍게 멀어지잖아. 이유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절절 했다고 말 할 수는 없어. 만나면 그 무엇이었다가 헤어지면 아무것도 아닌 관계... 사람의 사이란 결국 그런 건가, 남자와 여자란 건.
승우를 따라 비석의 사진에 눈을 박고 있던 쥴리는 그의 말에 한숨을 호로록 내 쉬며 고개를 들었다. 입술은 웃고 눈은 우는 야릇한 표정이었다.
모르겠어, 세상도 모르겠고 나 자신도 모르겠고 사람 사이는 아니, 우리 관계는 더더욱 모르겠어. 지나고 나서 뒤돌아 보면 위험하기 짝없던 순간들이 오히려 그 시간을 겪는 동안은 감각을 못느껴. 비포장 도로에서 차바퀴가 덜컹, 하고 지나가면 그 뿐인 것처럼 말이야. 승우씨 말같이 아무것도 아닌 관계를 만들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 온 거지. 캔버스를 끼고 살면서도 옳은 그림 한 장 없는... 그런 여자가 됐어.
표토에 착생을 이루지 못해 누렇게 변한 잔디에 무심한 발질을 하고 있던 승우는 옳은 그림 한 장 없다는 쥴리의 말에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잘된 그림 한 장 얻으면 세상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끗이 비워진 오물상자에 아내 죽기를 바라던 마음과 발가벗은 쥴리의 나신을 넣어 천길 모래땅에 묻고, 노을 붉은 모래산을 그려 올 수만 있다면... 그는 희망을 곁눈질하며 빌딩숲 저 너머로 마른 시선을 던졌다.
아주 메마르고 건조한 땅이 있어. 해수면 보다 낮은 곳이야. 태양열이 뜨겁게 지표면을 달구고 열풍이 훅훅 불어 오는 땅이지.
정말 그럴까.
그럼, 주먹 만한 별이 쟈수아 나무에 내려 앉는 곳이야.
그런 곳이 있어?
있구 말구, 노을이 지면 거대한 모래산이 붉은 섬으로 떠오르지.
어디야, 그 땅은?
전갈의 땅이지, 문명과 풍요의 반대 쪽이야.
가고싶어,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 줘, 까맣게 타던가 바짝 마르고 싶어.
승우가 갓길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둘러 보았지만 쥴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올란차로 연결되는 190번 국도가 원만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샌드듄스 입구에 쥴리를 내려주며, 승우는 안내판이 세워진 이 자리로 오겠다는 말을 몇 차래 했던 것을 떠올렸다. 승우는 겹겹이 이어지는 모래구릉의 여기 저기를 목을 늘여 바라 보았다. 가끔 사람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였다. 이 시간대에 샌드듄스를 헤메는 사람들이라면 전문 사진작가나 아니면 모험심 많은 젊은이들 일 것이다. 앞의 제법 높은 봉우리에 삼각대를 세우고 피사체를 담는 늙은 사진사가 보였다. 그 아래로 얕은 구릉들이 겹쳐 있는 부근에도 사람의 움직임이 있는 것 같았지만 큰 봉우리의 아래쪽이라 그늘이 짙고 낮은 위치라서 정확히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승우는 레이첼을 등에 업었다. 그렇게 살피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쥴리가 갔을성싶은 둔덕이 완만하고 아름다운 봉우리를 겨냥해서 모래밭에 발을 들여놓았다. 밖에서 보기와는 달리 꽤 걸었다 싶었지만 겨냥했던 모래둔덕은 쉽게 가까워 지지 않았다. 멀리서 대충 살필 때는 보이지 않던 얕은 구릉들이 제법 되었다. 더구나 아이를 등에 업고 발이 빠지는 모래밭을 걷는 일이 쉽지 않았다. 가끔 모래속에 숨은 돌뿌리나 나뭇가지를 밟기라도 하면 중심이 흔들려서 넘어 질뻔하기도 했다.
와우,
힘들게 목표 했던 둔덕에 올라 선 승우는 가슴이 훵 하게 비는 충격을 받았다. 국도나 캠프장에서 건너다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장엄한 광경이 펼쳐졌던 것이다. 끝없이 이어진 모래산과 구릉들이 거대한 왕국의 성벽처럼 솟아 있었다. 14 스퀘어 마일의 모래 바다에 뜬 수 백척의 전함이었다. 어떤 성은 옆으로 섰고, 어떤 배는 정면으로 항진해오고 있었다. 승우의 감탄에 등에 업힌 아이가 제 아빠의 어깨위로 머리를 들었다.
아빠, Canvas, Over There, 아줌마 Canvas!
레이첼이 어느 지점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응, 캔바스? 어디, 어디야.
저기, 오버데얼 하며 흔드는 아이의 손가락을 눈으로 따라가니 정말 그곳에 쥴리의 캔바스가 세워져 있었다. 승우는 급한 걸음으로 달려갔다. 쥴리의 캔바스 위에는 미완성의 목탄화가 그려져 있었다. 해가 지는 방향의 모래산을 그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봉우리 하나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그 보다 조금 얕은 구릉자락이 감싸고 있는 풍경이었다. 승우는 캔바스 주변을 세심히 살폈다. 깔깔한 모래밭에는 쥴리의 것으로 여길 만한 아무것도 없었다. 승우는 머리를 높이 들어 멀리, 아주 멀리까지 휘둘러 보았지만 쥴리의 모습은 없었다. 그림을 그리던 쥴리는 어디로 갔을까. 이 넓은 모래바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승우는 의혹에 휩싸인 체로 그리다 만 쥴리의 그림을 유심히 바라 보았다. 양쪽에서 감싼 구릉자락의 한 가운데로 중앙의 모래산을 향해 시냇물 같은 길이 그려져 있었다.
모래산으로 가는 길이라..
승우는 해 지는 방향으로 선 모래산들을 찬찬히 살펴 나갔다. 수십 개의 봉우리들은 모두 고만고만 해서 다 비슷해 보였다. 더구나 역광으로 해서 쥴리의 그림이 가리키는 모래산을 찾는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레이첼을 등에 업은 체 승우는 해 지는 샌드듄스를 지그시 노려 보았다. 어쩌면 캔바스 위의 모래산과 그 길은 화가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풍경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만든 그림속의 길을 걸어 갔을 것이었다. 쥴리를 찾는 일이 지나간 만남처럼 쉽지는 않겠다는 예감이 묻어 났다.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느라 지쳐버린 태양이 더 이상 머뭇거리기 싫다는 듯 붉은 꼬리를 슬쩍 내렸다. 레이첼을 등에 업은 승우는 어둠에 묻혀가는 샌드듄스를 지그시 노려 보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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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엄마가 죽을 때에... Breathing 을 안했어?
승우는 레이첼의 여린 목소리에 노을보다도 짙게 얼굴을 붉혔다. 편치않던 마음의 정체가 무엇이었던가 가늠이 갔다. 아이의 그 질문 욕구도 일몰의 잔광속에서 태동 되었을 것이었다. 부녀의 가슴속에 도사려 있던 환부가 대지의 몽환적 기운에 스르르 열려버렸다. 자연에 순화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른이나 아이나 다름이 없을 터이다. 단지 어른은 아닌척 할 수 있는 것을 아이는 못한다는 그 차이가 있을 뿐이겠다.
무슨 말이니... 엄마가 많이 아파서 그렇게 됐잖아. 죽으면... 숨을 못쉬지.
승우는 아이의 원하는 답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짐짓 외면했다.
I Know, 그거 말고, 엄마가 Die 할 때... How Doing Her?
그것은 레이첼이 지난 겨울 어느 비오는 날의 자동차속에서도 물어 온 말이었다. 그때는 운전을 핑계로 어물어물 대답을 피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땅위에서 가장 고요가 깊다는 사막에 어둠이 내리고 있다. 안개 같은 적막이 그와 아이 사이를 비켜설 수 없도록 묶고 있는 것이다. 그는 천천히 아이를 돌아 보았다. 레이첼은 과장되게 눈을 둥글려 뜨고, 아랫입술을 쭉 빼문체 그를 올려다 보았다. 아빠가 좋아하지 않을 말을 해놓고 짓는 몽키페이스다. 그는 아이의 한 손을 찾아 쥐었다. 얼굴을 숙여 아이의 큰 눈을 들여다 보았다. 아이의 동공에 붉은 노을이 서려 있다. 죽는 순간의 제 엄마 모습이 어떠했는 지가 아이의 단순한 궁금증일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4 학년 아이가 품을 수 있는 평범한 의문일 수 있다. 그러나 아내의 죽음이 거론될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쥴리의 발가벗은 나신으로 인해 그는 아이가 제 엄마의 죽음을 추궁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하는 것이다. 승우는 고개를 들어 샌드듄스를 바라보았다. 쥴리는 그림을 완성 했을까. 해가 지기 전에 그녀를 데려오려면 별로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아이의 눈으로 되돌아오며 잡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근래에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 일이 없었다. 막바지로 치닫는 아내의 병세가 몹시 위중한 상태여서 술따위를 마신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벌써 삼 년 넘어 계속되고 있는 아내의 병수발로 승우는 한껏 지쳐 있었다. 하루에도 두 서너 차래 이상 다운타운의 옷가게와 3가에 위치한 암병동을 쳇바퀴 돌 듯 들락거리다 보면 몸은 언제나 치킨숩처럼 풀어져 있었다. 식사를 비롯한 집안 일은 어머니가 맡아 주었지만 유치원에 다니는 레이첼의 등하교와 생활속의 이런저런 잡사까지 모두 그의 몫이었다. 아내의 패션감각으로 알차게 운영되던 옷가게도 그의 둔한 안목에 매상이 줄기만 했다. 손익의 분기점을 지나 적자로 돌아선 지가 벌써 일 년이 넘었다. 아내의 병원비는 메디칼로 해결 된다지만 늘어나는 재정 압박은 아내의 병세와 함께 그를 옥죄는 사슬이었다.
쥴리가 휴게실 소파에 앉아 울고 있었다. 승우는 벽걸이 TV에 시선을 주고 있는 그녀가 울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언제 왔어, 남편은 좀 어때?
쥴리곁으로 다가간 승우가 그렇게 말을 건네며 보니 그녀의 볼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승우를 일별한 쥴리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쓸며 말했다.
닥터가... 산소호흡기 제거를... 가족과 의논해보라구...
두 달이 넘게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있는 그녀의 남편에게 예정된 절차가 닥쳤다는 말이었다. 쥴리의 남편이 결국 그렇게 되리라는 것은 굿사마리탄 병원의 중환자실 사람들 사이에 묵계처럼 퍼져 있는 사실이었다. 휴게실이나 구내 식당에서 마주치는 환자 가족들은 짤막한 인사 속에 서로에게 다가서는 어둠을 짐짓 외면 한다. 중환자 병동의 입원 환자가 완치되어 나가는 일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수술과 키모테라피와 방사선에 삭아진 사람들은 눈부신 현대의학에 입은 혜택을 위안으로 삼으며 예정된 소모의 대열로 떠밀려 간다. 오랜 투병과 간병에 지친 그들은 떠나는 사람이나 남는 사람이나 큰 슬픔이 없다. 슬픔이 말라버린 것이다. 수심 가득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는 이들은 방문객이거나 아니면 임종을 보러 온 낯선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과장된 슬픔을 얼굴에 내 건다. 눈시울을 붉히거나 굵은 눈물방울을 떨구며 Oh, No, 하고 비통해 한다. 유심히 살피되 덤덤히 지나치는 사람들은 이미 오랜 간병에 지칠 대로 지친 가족들 뿐이다.
입을 열므로해서 슬픔이 더 커졌는지 쥴리의 두 눈에서는 새 눈물이 또 주르륵 흘러 내렸다. 쥴리가 손바닥으로 그것을 닦았지만 눈물은 자꾸 흘러 나왔다. 승우는 쥴리의 눈물을 보며 이 여자는 정말로 슬픈 것일까, 그런 생각을 했다. 아내가 빨리 죽어버리기나 했으면... 지치고 힘들 때 툭 뱉아놓고 누가 듣지나 않았을까 화들짝 놀라기까지 했던 스스로를 돌아보며 그는 쥴리의 눈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적을 바라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잖느냐고...
담당 닥터가 말하더라며 쥴리는 연해 눈물을 손바닥으로 훔쳤다. 어쩌면 쥴리의 눈물은 슬프다기 보다 어처구니가 없는 건지도 몰랐다. 육신의 기능이 하나 둘 망가져가는 아내를 지키며 삼 년여의 병수발을 들고 있는 승우와, 퇴근길의 차량전복사고로 남편이 뇌사상태에 빠진 쥴리와는 입장이 다를 터였다. 사망으로의 예정된 길을 진이 빠지도록 걷는 쪽과 갑자기 닥친 편의 슬픔에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승우는 자신의 처지 보다 쥴리의 상황이 낳을 거라고 생각 했다. 눈물이 말라버린자 보다는 아직 흘릴 눈물이 남아 있는 자가 행복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자는 낯선 용어가 튀어나온 것은 그 말을 한 승우 자신도 놀란 일이었다. 승우는 물론 쥴리 역시 LACC 시절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망각해 왔다. 서로가 마치 문병객들처럼 과장된 희망과 위로를 주고 받으며 서둘러 자리를 비껴왔다. 그러므로 술은커녕 밥 한끼 먹자는 소리도 터부처럼 금해 온 처지였다. 하지만 정작 놀랄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그녀가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오케이, 하며 발딱 일어선 것이었다.
학생들 간에 자조하듯 UCV(벌몬트주립대학)라고 부르던 LACC(시립대학)시절이 있었다. 중학교 삼 학년에 이민을 온 쥴리는 학점을 쌓아 메직마운틴 근처의 어느 미술대학에 편입하겠다는 꿈이라도 있었다. 허지만 고등학교 졸업장까지 받아들고 이십대 문턱에 도미한 승우는 그런 알찬 계획도 없이, 그저 미국의 학교 생활이나 겪어 본다는 생각으로 그곳에 적을 두고 있었다. 승우 자신은 외삼촌이 운영하는 다운타운의 의류도매상에 곧바로 나가서 일을 하고 싶었지만, 창창한 나이에 대학도 다니고 그래서 본토 영어도 배워야 미국살이가 수월하지 않겠느냐는 어머니의 성화에 밀렸던 것이다. 그는 나름 열심히 ESL 클래스를 들었지만 어머니가 말한 본토 영어는 쉽게 입에 붙지 않았다. 영어가 결코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라는 진리를 터득하여 슬슬 권태에 사로잡힐 즈음 그의 눈앞에 쥴리가 나타났다.
짜증나는 수업시간을 견디는데 일조했던 그녀를 십여 년이 훌쩍 지나 중환자병동에서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처음 입실하던 날, 남자간호사가 끄는 환자용 이동침대를 따라오는 중년의 여자가 쥴리 라고 승우가 알아 챈 것은 그녀의 왼쪽 입술 끝에 붙은 점 때문이었다. 시간의 흐름앞에 마모되는 모래산처럼, 허리아래로 살이 몰리고 머리칼도 짧아졌지만 입꼬리의 흑점은 변함없이 거기에 붙어 있었다. 제법 콩알 만큼 큰 그 점은 영화배우 누구 같다며 그가 놀리곤 하던 흑점이었다. 그녀의 점은 별나게도 세모꼴이어서 기억을 더욱 선명하게 했다. 승우는 가끔 ET처럼 집게손가락을 슬며시 펴들어 잽싸게 그 점을 누르곤 했는데, 나중에는 그것이 키스 하자는 신호로 발전했다. 방과 후면 찻집으로 영화관으로 붙어다니다가 으레 자정이 되어서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곤 하던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 것은 흑인폭동 때문이었다. 한인타운 인근 스와밋에서 운영하던 옷가게를 폭도들의 방화로 잃은 그녀의 부모가 모든 것을 정리하여 형제들이 있다는 동부로 떠나버렸던 것이다. 한 동안은 전화로, 이메일로 관계를 이어 갔지만 시간이 지나며 차츰 시들해지고, 결국 뜸 하게 오고 가던 안부가 어색해지게 되자 아예 연락을 끊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런 두 사람이 엉뚱하게도 중환자병동에서 조우하게 된 것이다. 서로가 표정을 감추려고 애 쓸 필요도 없었다. 중환자병동이라는 공간적 중압감과,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있는 배우자의 위중한 상태로 해서 클라스메이트 이상의 관계는 감쪽같이 증발해버렸다. 승우는 십 년도 넘어 만난 옛여자의 눈을 거리낌없이 들여다보며 그녀 남편의 상태를 물을 수 있었다. 더 작아지거나 커진 것같지 않은 입술 옆의 흑점도 덤덤한 눈으로 바라 보았다. 사람의 생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 앞에서 ET손가락으로 여자 입술에 붙은 흑점을 누른다거나 그래서 키스를 한다는 따위들은 정말 너무도 하찮은 기억에 불과했다. 어머, 하고 얼굴을 살짝 붉히던 쥴리도 이내 표정을 수습하며 설명하지 않아도 뻔한 남편의 상태를 한숨에 섞어 말했다.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두통과 함께 팽창한 방광의 압박으로 잠을 깬 승우는 발가벗은 나신으로 자신의 가슴에 잠들어 있는 여자의 모습에 흡, 하고 숨이 멎었다. 승우는 여자의 머리에 눌린 팔을 뺄 생각도 못하고 초점 잃은 동공을 한 곳으로 모으느라 눈꺼풀을 잔뜩 오무렸다. 지난 밤에 얼마나 술을 마셨던지 빙빙 도는 머릿속을 한참이나 추슬러서야 겨우 시선이 모아졌다. 커텐을 투과해 들어온 어슴프레한 빛 만으로도 자신의 팔에 안겨 있는 여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희미한 어둠속에서도 입술끝의 흑점이 식별 되었다. 승우는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지난 밤 윌셔블러버드의 일식집에서 시작한 술이 웨스턴가의 학사주점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떠올랐다. 전에는 술을 잘 못마시던 쥴리가 부어주는 대로 잔을 들어올리던 모습과, 이사간 동부에서도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했다는 것, 결혼 하고 엘에이로 오게 된 사연 등을 난 아이도 못낳아, 라는 말에 후렴처럼 섞어 하던 기억들이 흔들리는 머리속에 남아 있었다. 쥴리는 입술을 살짝 벌린 체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사치스런 후회도 아니고 그렇다고 원망은 더더욱 아닌, 슬픔 비슷한 감정에 사로잡힌 승우는 쥴리의 벌어진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기다린 끝에 무엇이 무너지는 건지 아니면 뚫려버리는 것인지 승우는 명치끝이 뚝,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큰 불덩이가 목덜미에서 일어나 얼굴을 거쳐 머리꼭대기로 후욱 타올랐다. 그는 눈을 감았다. 뜨거운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진동 전환된 셀률라폰이 뚜루룩, 뚜루룩 떨림 소리를 내었다. 벗어 던진 옷가지의 어디쯤에 묻혀 있을 그것은 이내 떨림을 멈추었다. 승우는 화들짝 눈을 떴다. 검불처럼 삭은 아내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던 것이다. 승우는 벌떡 일어났다. 황망한 손짓으로 휴대폰을 찾았다. 바지와 쟈켇의 어느 주머니에도 휴대폰은 없었다. 또로록, 음성 메일이 도착해 있다는 단발 신호가 티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백에서 났다. 그 속에는 쥴리 것으로 보이는 휴대폰이 승우의 것과 함께 들어 있었다. 승우는 자신의 휴대폰이 왜 거기 들어가 있는지 의문이 갔지만 그런 것을 더 생각하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 충혈된 눈, 개기름이 번들거리는 얼굴로 승우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의 아내는 마지막 여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엄마가 숨을 조금씩... 아주 천천히 쉬었어. 그러니까 두 번 쉬어야 할 시간에 한 번을 쉬었지. 그렇게 하다가 더 느리게... 보통 사람이 세 번 숨쉴 동안에 겨우 한 번을... 그러다 그 다음에는...
승우는 뚫어져라 자신의 눈을 쳐다보는 레이첼의 시선을 피해 멀리 샌드듄스의 주봉을 바라 보았다. 겹치고 겹친 모래구릉들이 뱀의 질주처럼 부드럽게 물결치는 샌드듄스는 조금전 보다 한층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다음에는?
레이첼은 제 아빠의 끝말을 되돌려주며 재촉했다. 승우는 아이가 잔인한 것이 아니라고, 정말 궁금해서 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이른 별을 찾아 하늘로 시선을 들었다.
그 다음에는... 오래 있다가... 그러니까 우리가 열 번쯤 숨을 쉬었을 만큼 긴 시간이 지난 후에... 마지막 숨을... 아주 가늘고 여리게... 쉬었단다.,
아내가 숨쉬는 것조차 거추장스럽다는 듯, 사르르 생을 마감하던 모습이 구름에 물든 노을처럼 또렸이 떠올랐다. 임종에 앞서 손목과 팔뚝은 물론, 목과 옆구리에 주렁주렁 달렸던 호스와 주사바늘, 입을 막고 있던 산소마스크까지 모두 제거된 아내의 모습은 씻은 듯 말끔했다. 세 번에 걸친 수술과 키모테라피와 방사선 치료로 건초처럼 마른 아내의 민둥 머리엔 꼬부라진 머리칼 하나 없이 깨끗했다. 다만 숨이 잦아들며 입꼬리를 비집고 나온 몇 방울의 거품과 함께 아내는 죽음에 들었다. 아내의 마지막 숨결 만큼이나 가냘픈 목소리로 말을 마친 승우의 부석부석한 눈두덩에 뜨끈한 물기가 몰려 왔다. 마지막 숨 이라거나 여리다는 말을 레이첼이 알아듣기나 했는지 의문이었지만, 고개를 숙이면 눈물이 굴러나올 것 같아 그는 아이의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승우에게 손을 잡힌체로 레이첼도 제 아빠가 보는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아빠, 엄마는 지금 Heaven 에 있지?
아이의 그 한 마디에 스모그처럼 어둡던 승우의 마음이 활짝 개었다.
그럼! 헤븐에 있구 말구, 엄마는 저 노을 위, 저 구름보다 더 높은 천당에 있지. 레이첼, 그걸 어떻게 알았니?
승우는 아이의 시선을 구름너머까지 인도하겠다는 듯, 집게손가락을 하늘로 곧추세웠다.
응, Sunday School에서 Sister가 말했어.
오라, 수녀님이 알려주셨구나.
응, 수녀님이 엄마가 Heaven에서 Angel 이래.
그래? 하하하, 천당에 갔으니까 당연히 천사가 됐겠지. 그럼, 엄마는 천사야.
승우는 레이첼에게 가지고 있던 걱정 하나를 덜은 후련함에 활짝 웃었다. 허지만 웃음의 뒤끝은 이내 씁쓸함을 몰고왔다. 엄마는 천사, 라는 말이 아빠는 악마, 라는 반대어를 자연스레 떠올렸기 때문이다. 악마가 아니고서야 중환자병동에 누워 있는 아내를 버려두고 남의 여자와 밤을 지샐수 있을까. 더구나 상대 또한 의식불명인 남자의 아내가 된다. 변명의 여지없이 악마들의 불륜이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죄의식과 부끄러움에 명치 끝이 옥죄였다. 노을에 투영된 아내의 혼이 말갛게 내려다 보는 것 같았다. 방금전 엄마는 천사 라고 했던 자신의 말을 추궁한다는 느낌이었다. 더는 하늘에 시선을 둘 수가 없었다. 그는 아이를 돌아 보았다. 레이첼은 꿈꾸듯 행복한 얼굴로 하늘을 보고 있었다. 아이의 천진한 모습은 승우의 눈물을 마르게 했다.
악!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꽈당, 하고 둔중한 무엇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이제껏 집 안에서 들어 본 적이 없던 소리였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크고 이질적이던지 쏴, 쏟아지는 물소리속에서도 승우는 단번에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서둘러 물꼭지를 잠그고 샤워룸을 뛰쳐나왔다. 무슨 소린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걸까. 그런 의문을 품으며 황급히 수건을 몸에 두르는데 울음소리가 들렸다. 으어, 으흐어, 허으으. 그 울음은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배인 것이었다. 돌뿌리를 잡고 낭떠러지에 매달려 발버둥치는 사람의 비명 같았다. 칼을 든 흉악범에게 뒷덜미를 잡혔을 때나 낼수 있는 소리였다. 집안에는 승우와 레이첼과 아내 뿐이다. 그렇다면 울음소리는 분명 아내의 것이었다. 아내가 울고 있다, 아내가 두려움에 떨며 울고 있다. 순간 승우의 가슴이 쿵, 무너져내렸다. 막았다, 결국 종양이 척추신경관을 막은 것이다.
지금 팥알같은 저 종양이 콩알만큼 커지면 척추신경관을 막게되지요. 그러면 허리 밑의 모든 기능이 마비됩니다.
담당 의사의 경고가 현실로 닥친 것이다. 아내의 척추에 마비증세가 도달한 게 틀림 없다. 유방에서 폐로, 폐에서 척추로 전이 된 암세포가 두뇌로 올라가면 아내는 죽음에 이른다. 승우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살며시 문을 열었다. 아내가 울고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가늠을 해 보았다. 울음소리는 부엌에서 나고 있었다. 혹시 아내가 무엇을 썰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칼질이라도 하다가 넘어졌다면, 하는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더욱 두방망이질 쳤다. 아내는 자신의 건재가 육체의 활동으로 증명 된다는 듯, 불안한 몸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승우의 시선이 못미친다 싶으면 어느새 식탁을 닦던가 설거지를 하던가 했다. 그는 까치발로 내달아 부엌을 들여다 보았다. 아내가 싱크대앞 부엌바닥에 누워 울고 있었다. 흐으으, 허흐으, 온몸을 떨며 울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아내는 다리에 힘이 없다고, 감각이 없어 진다고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그런 아내가 척추 마비의 실체를 온몸으로 겪은 것이다. 아내가 지금 얼마나 무섭고 두려울 것 인지 그는 절절하게 짐작이 갔다. 승우는 어떻게 하면 저 떨리는 아내의 몸을 멈출 수 있을까, 쓸모없는 궁리로 가슴을 벌렁거렸다. 아무것도 보기 싫다는 듯 아내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울었다.
여보, 어떻게 된거야.
승우는 두 팔로 서둘러 아내의 상체를 안아 일으켰다. 아내는 승우의 품에 안겨서도 두려운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얼굴을 가린 손도 풀지 않았다. 아내의 손가락 사이로 굵은 눈물이 쉴새없이 줄줄 새어나왔다. 승우의 머리에서도 닦지 않은 물방울이 아내의 얼굴과 손등으로 뚝뚝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아내는 죽기보다 싫어하는 병원으로 다시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또 수술을 받았다. 수술 횟수가 늘어나는데 비례해서 수술 시간도 길어졌다.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아내의 몸도 더 망가져 나왔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며 승우는 의학이 결코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는 쪽에 믿음을 두었다. 돌이킬 수 없는 가정이지만 아내가 애초 수술 따위를 받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상태에 있을 게 틀림없다고 그는 확신했다. 사람들은 현대의학이라는 거대한 집단의 외형에 현혹되어 육신이 찟기고 잘리는 처참에 동의 하고 마는 것이다. 수술에서 깨어난 아내는 죽어도 좋으니 당장 집으로 가자고 했다. 병원에 있는 것조차 싫다고 했다. 승우는 아내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병원은 환자 마음대로 가고 오는 곳이 절대 아니였다. 별로 옳을 게 없는 그들의 방식에 일방적으로 순응 해야 하는 것이 환자의 의무였다. 결국 아내는 병원이라는 공간적 불쾌감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전혀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강력 수면제를 처방전의 서너곱씩 복용해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종잇장 같이 얇아진 아내의 의지력은 죽음의 그림자를 밀어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아빠, We Sleeping together, 아줌마?
피크닠테이블 뒤쪽에 설치한 텐트를 보며 레이첼이 물었다. 텐트가 하나 뿐이니 그런 의문이 들었나 보았다. 밤에 별이 뜨면 레이첼에게 북두칠성과 은하수를 말해 줄거야. 엘에이를 떠나 오던 아침에 쥴리는 지나가는 말처럼 그렇게 자신의 생각 한 자락을 비쳤다. 쥴리의 영어 실력이라면 아이의 감성에 깊이 다가 설 수 있을 것이기에 못들은 척 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잠 자리에 대한 얘기는 없었지만 그런 것으로 미루어 쥴리와는 셋이 함께 잔다는 묵계가 이루어 졌다고 나름 생각 했다. 그런데 아이의 갑작스런 질문이 승우를 멈칫하게 했다. 쉽게 한 자신의 계획이 아이에게는 부담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은근히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야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그런 우려를 슬며시 덮을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으음, 우리 공주님은 아줌마랑 같이 자는 게 싫어요?
승우는 곤란한 답변을 피하기 위해 짐짓 장난스럽게 되넘겼다. 아이는 또 아빠가 싫어하는 질문을 했다는 듯 몽키페이스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난처한 표정이었다. 으흥으흥, 어깨를 올리고 상체를 흔들며, 목구멍에서 지어낸 앓는 소리를 했다. 아이가 그런 소리를 내는 것은 아빠가 잘 알면서 그러느냐는 의미가 담겨 있다. 승우도 아이를 향해 똑같이 몽키페이스를 지어 보였다. 말해봐, 무슨 말인지 네가 해봐, 승우의 몽키페이스는 그런 뜻이었다.
아빠, Sorry, I'm not Comfortable.
아이는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더 삐죽이 내밀었다. 여차하면 울음이라도 터뜨리겠다는 얼굴이었다. 승우는 가슴이 뜨끔했다.
오케이, 알았어. 아빠와 둘이 자면 되지?
승우는 얼른 그렇게 대답했다. 아이가 불편하다는 데야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레이첼은 의외 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환히 얼굴을 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이는 이내 고개를 떨구며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Are You Sure? How about 아줌마?
아줌마는 어디서 자느냐는 것과 아빠의 진의를 의심하는 마음을 얼버무려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더욱 궁지에 몰렸다. 승우는 헛기침을 큼, 하고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일어 섰다. 백설공주에 나오는 일곱 난쟁이처럼 허리를 굽히며 목소리를 지어 냈다.
공주님, 쥴리 아줌마는 차에서 잡니다. 그러면 되겠지요?
그제서야 아이는 모든 문제가 풀렸다는 얼굴로 활짝 웃었다.
자, 그럼 어서 불을 피우고, 쥴리 아줌마를 데리러 가야지?
쥴리와 함께 모닥불 가에서 밤새울 작정을 속에 묻고 승우는 서둘러 나뭇단을 화덕속에 쌓아 올렸다. 레이첼은 깡충깡충 뛰며 밴으로 들어가더니 바비인형이 그려진 가방을 들고 나왔다. 피크닠 테이블 위에 가방을 열고 내용물을 꺼낸다. 아기곰 모형의 베개, 미키마우스 인형, 그림동화책, 칫솔, 양말, 썬블락크림, 야광펜 따위들이 테이블 위에 펼쳐졌다. 승우는 불붙인 종이를 나뭇가지 밑으로 집어넣으며 아이의 모습을 곁눈질 했다. 아이는 미키마우스 인형을 집어들고 생긋 웃더니 가슴에 꼭 껴안았다. 이미 헐렁해져버린 아기곰베개와 미키마우스는 아이가 가는 곳이면 어디고 따라가는 물건이다. 지난 여름방학의 달라스 여행 때도, 교회 주일학교의 주말 캠프에도, 학교 친구와의 슬립오버에도 어김없이 함께 했다. 물론 밤 마다 머리밑에는 아기곰을, 가슴에는 미키마우스를 안고 잔다. 아기곰 인형이야 잠자리에서 정이 든 베개이니까 그럴 수 있다지만, 어린 아이들이나 좋아할 미키마우스 인형을 4학년이나 된 레이첼이 보물처럼 끼고 다니는 모습은 언제나 승우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아이가 미키마우스를 인형이 아니라 제 엄마로 인식한다는 사실이 그를 옥죄는 사슬이었다. 그 것은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가족이 함께 간 디즈니렌드에서 그의 아내가 사준 것이다. 그 나들이 며칠 후 승우의 아내는 유방암 판정을 통고 받았다. 여보, 그때 디즈니랜드 가길 잘했지? 우리 레이첼에게 저 미키마우스 인형 사주길 참 잘했지? 레이첼이 미키마우스를 안고 다닐 때마다 환자 침대에 누운 아내는 래코드처럼 그에게 동의를 구했다.
아내를 떠나 보낸지 일 년쯤 지난 어느 아침이었다. 지난 밤 꿈자리가 뒤숭숭 했던 승우는 담장위의 장미 한 송이를 꺾어 들고 묘지를 찾았다. 아이 등교와 출근 사이의 짧은 시간을 이용해서 였다. 아내가 뒷뜰에서 호스로 물을 뿌리며 깔깔거리는 꿈이었는데 웃음소리가 뚝 그쳐서 돌아보면 쥴리가 서 있었다. 승우는 아내 꿈을 꾸다 잠이 깨면 더 이상의 수면은 포기해야 했는데, 아내 꿈에는 대개 쥴리가 동행한다는 사실이 불면을 부추기는 더욱 큰 이유였다. 새벽 방뇨 뒤의 후벌잠에서라면 아침이 가까운 시간이니 그래도 좀 나았다. 하지만 한 밤중이나 어둑새벽에 그런 꿈을 만나면 그날 하루는 피곤에 절어지내야 했다.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한 번 달아난 잠은 돌아 오지 않았다. 승우는 어쩔수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시간예약된 자동밥솥의 버튼을 수동으로 바꿔 누르고, 허청허청 아이 도시락의 반찬이나 챙기는 게 고작이었다.
갓길에 차를 세운 승우가 아내의 묘지 부근을 올려다 보니 여인 하나가 앉아 있었다. 어거스틴 성인의 부조상 왼편으로 키 작은 무화가나무 밑은 아내의 묘가 있는 곳이었다. 완만한 능선의 정상에 위치한 아내의 묘는 길에서 올려다 보면 하늘과 맏닿아 있어서 가늠하기가 수월했다. 승우는 아내의 묘를 향해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한 손에 꽃묶음을 든 여인은 길쪽으로 등을 보인체 쪼그려 앉아 하염없이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아내의 활짝 웃는 얼굴과 간략한 내력이 적힌 비석이 누웠을 터였다. 1971 년에 오고, 2007 년에 가다, Belove Husband & Daughter, 그 단순한 글에서 여자가 헤아리는 것은 무엇일까. 평일의 이른 시각에 묘지를 찾아 상념에 젖는 사람이라면 데면데면 한 관계는 아닐 것이다. 아내의 친구일 거 라고 생각은 되지만 쪼그려 앉은 뒷모습으로는 짐작이 가질 않았다. 승우는 궁금증을 누르며 능선을 올라갔다. 뒤돌아 앉은 여인의 크림색 원피스가 아침 햇살을 받아 뽀얗게 빛났다. 여인의 등에서 반사된 빛살 하나가 그의 눈을 찔렀다. 치맛자락에 팽팽히 감싸인 여자의 둔부로 시선이 미끌어졌다. 뭔가 낯익다는 생각이 언 듯 들었다. 승우는 사 오미터 아래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자의 옆모습이라도 보기위해 한쪽으로 고개를 뽑았다. 그때 여자가 허리를 세우며 발딱 일어났다. 어떤 느낌이 있었던지 여자는 빠르게 뒤돌아 섰다. 쥴리였다. 승우는 아래에서 올려다 보고, 쥴리는 위에서 내려다 보며 시선을 부닥쳤다. 쥴리는 입술을 꼭 깨물며 아미를 모았다. 음모가 들통난 스파이처럼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사람이 뜸한 시간을 택했는데 맞닥뜨리고 말았다는 낭패감이 얼굴에 가득했다. 거북스럽기는 승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부끄러운 행위 이후 일 년이 훌쩍 지나서 만난 여자가 편할 리 없었다. 더구나 그 곳이 아내의 묘지라는 사실에 묘한 느낌이 가슴을 후볐다. 마치 죽은 아내에게 불륜 현장을 잡힌 기분이었다. 승우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어째서 저 여자와는 극히 가깝다가 갑자기 먼 사이가 되기를 반복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발가벗고 뒤엉킬 만큼 가까웠으면서도 서로가 휴대폰 번호 하나 교환하지 않았다. 아내의 장례를 치른 후로 암병원이 있는 3가 방면은 의식적으로 피해 다녔다. 장례로 경황없이 흘러간 며칠 후 문득 쥴리 생각이 떠오르기는 했다. 그 날의 행위에 대해 변명이든 정당화든 담판을 짓고 싶었다. 그러나 역부러 중환자 병동을 찾아갈 마음은 내키지 않았다. 쥴리의 남편도 그 어간에 산소호흡기 제거가 이루어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며, 병원으로 찾아가도 그녀를 만날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일찍 왔네.
승우는 묘지에 오면 언제나 만나는 사람에게처럼 말했다. 속은 요동질 치면서도 말은 태연하게 나오는 것이 스스로도 놀라웠다. 쥴리는 꽃 든 손을 들어올리며 어깨를 으쓱 했다. 그녀의 등에 쏟아지던 햇살이 이제야 말로 제자리를 찾았다는 듯, 쥴리의 전신을 화사하게 물들였다. 빛의 각도 때문인지 아니면 치켜보는 위치라서 그런지 승우는 몹시 눈이 부셨다. 불편을 해소하기위해 승우는 쥴리 곁으로 올라갔다. 승우는 정면으로 얼굴을 대하기가 멋적어 그녀 곁으로 나란히 섰다. 쥴리의 눈길이 던져진 근방으로 승우의 시선도 자연스레 따라 갔다. 발아래 펼쳐진 공원묘지를 슬몃 지나 길고 작은 건물들이 빼곡한 도시를 훌쩍 넘어 섰다. 그 곳에 새털구름 같은 바닷자락이 아슴하게 누워 있다. 한 낮의 강렬함을 준비한 캘리포니아의 아침 햇살이 바다위에 금비늘을 뿌리고 있었다.
승우 씬 나를 이상한 여자로 보겠지?
햇살 부서지는 바다에 시선을 던져둔 체 쥴리는 낮은 목소리로 느리게 말했다. 쥴리의 말은 속삭임 같았다. 이상하게 보느냐는 물음이 아니라, 이상하게 보지말라는 애원처럼 들렸다. 승우는 숨을 깊이 들여 마셨다.
무슨... 그러기로 말하면 나는 뭐 정상 인가.
늘어뜨렸던 손을 들어 팔짱을 껴붙이며 승우도 눅은 음성으로 말했다. 쥴리는 꼭 다문 입술을 귀쪽으로 당기며 웃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내가 그러긴 했나 의문이 드는거야. 눈을 떴을 땐 혼자였지만 정황은 그렇지 않게 느껴지고, 꿈처럼 혼미한가 하면 어떤 장면은 사진같이 선명하게 떠올랐어. 내가 남편 이야기 하며 울었던 것과 승우 씨 휴대폰을 빼앗아 핸드백에 넣은 기억은 아주 또렸했지. 내 기억을 확인하려고 핸드백을 열어봤어. 승우 씨 휴대폰이 없는 거야, 그러자 또 모든 게 없었던 일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드는 거 있지?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셔본 것도, 감쪽같이 기억을 잃어보기도 처음이야. 내가 한 일을 모르겠다는 게 너무도 무섭게 느껴졌어. 쥴리, 너 뭐야, 너 뭐냐구... 난 그 말을 열 번도 넘게 했어. 나 자신에게.
쥴리는 두 손으로 모아 쥔 꽃묶음을 가슴에 안고 또박또박 말했다. 승우는 이어질 말이 무엇일까 긴장 되었지만 변명은 아닐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승우는 먼 바다에 시선을 묶어 둔체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기 누워 있는 승우 씨 아내가 그 아침에 운명했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런데 더 무서운 건 그날 내가 남편의 사망을 허락한 거야. 닥터가 내미는 종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싸인을 했다구.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다음날 정오까지 내쳐 잠을 잤어. 한 낮에 잠에서 깨었는 데 흡사 그날 아침처럼 아무 생각도 안나는 거야, 어처구니 없게도 술 많이 마신 기억이 그 때 또 나는 거 있지. 머리도 역시 어지러웠어. 그래도 집을 나섰지. 늘 하던 대로 병원을 향해 차를 몰아 가다가 정지신호에 걸려 네거리에 멈추어 섰어. 그런데 그 빨간 정지신호를 보고 있노라니 그제서야 남편이 죽었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거야. 아니, 죽었다는 게 아니고 죽였다는...
승우는 가슴이 녹지근 했다. 쥴리의 남편이 결국 정해진 길을 가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 결정이 그렇게 빨랐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사람이 참 쉽게 죽는구나, 하는 뻔한 깨달음이 승우의 머리속을 뱅뱅 돌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 쥴리는 의사의 권고에 의해 어쩔수없이 내린 결정이었어. 또 그 사람은 어차피 식물인간이었잖아. 나야 말로 사람이 아니지, 살아 있는 아내가 어서 죽기를 바랬으니까. 한 두 번이 아니야, 파김치가 된 몸을 침대에 뉘일 때면 나도 모르게 그 말을 습관처럼 뱉았어, 짜증난 목소리로 말이야.
그는 말을 하고 나서야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지만 가슴은 후련 했다. 명치 아래 맺혔던 응어리가 쑥,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어깨를 세워 숨을 훅, 내쉬었다. 어두운 이야기를 밝음 아래서 나누는 게 이질스러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본질에 더 명징하게 다가 선다는 희망이 섰다. 때 묻은 상자의 뚜껑을 열자 거기 고여 있던 오물이 태양빛에 훌훌 증발해버리는 느낌이었다. 초가을의 상큼한 아침 햇살이 너무도 깨끗한 때문이었다. 승우는 쥴리에게로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문제는 죽은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경과가 아니야. 그들의 죽음 이전에 있었던 우리의 행위를 어떻게 정리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
승우는 내친김에 오물상자를 활짝 열어졌혔다. 더러운 오물을 말끔히 엎어버리고 뽀얀 햇살로 가득 채워지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거기 있었다.
으음, 그래... 승우씨 말이 맞아. 본질은 그거야, 사람의 의지가 작용되는 것이 문제의 대상이겠지. 우리... 아니, 나 많이 나쁜 여자 인가.
어느새 몸을 돌려 세운 쥴리는 승우의 눈을 똑바로 건네 보며 자문하듯 말했다. 손에 모아쥔 꽃묶음을 더욱 가슴에 붙안으며 그녀는 승우의 시선을 붙들었다. 승우는 그녀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쥴리는 잠시 어리둥절 하더니 꽃묶음을 건네 주었다. 승우는 허리를 굽혀 비석 앞의 철제 화분에 쥴리의 꽃을 꽂았다. 비석위의 아내가 활짝 웃고 있다. 그 것은 하와이 해변에서 찍은 신혼여행 사진이다. 신혼여행의 행복한 미소가 비석으로 옮겨 앉으리라고 아내는 생각이나 했을까. 비석위에서 활짝 웃고 있는 아내의 미소를 볼 때마다 승우의 가슴은 싸아 한 아픔을 느낀다. 승우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우리 관계 참 이상하지? 쉽게 만나서 가볍게 멀어지잖아. 이유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절절 했다고 말 할 수는 없어. 만나면 그 무엇이었다가 헤어지면 아무것도 아닌 관계... 사람의 사이란 결국 그런 건가, 남자와 여자란 건.
승우를 따라 비석의 사진에 눈을 박고 있던 쥴리는 그의 말에 한숨을 호로록 내 쉬며 고개를 들었다. 입술은 웃고 눈은 우는 야릇한 표정이었다.
모르겠어, 세상도 모르겠고 나 자신도 모르겠고 사람 사이는 아니, 우리 관계는 더더욱 모르겠어. 지나고 나서 뒤돌아 보면 위험하기 짝없던 순간들이 오히려 그 시간을 겪는 동안은 감각을 못느껴. 비포장 도로에서 차바퀴가 덜컹, 하고 지나가면 그 뿐인 것처럼 말이야. 승우씨 말같이 아무것도 아닌 관계를 만들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 온 거지. 캔버스를 끼고 살면서도 옳은 그림 한 장 없는... 그런 여자가 됐어.
표토에 착생을 이루지 못해 누렇게 변한 잔디에 무심한 발질을 하고 있던 승우는 옳은 그림 한 장 없다는 쥴리의 말에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잘된 그림 한 장 얻으면 세상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끗이 비워진 오물상자에 아내 죽기를 바라던 마음과 발가벗은 쥴리의 나신을 넣어 천길 모래땅에 묻고, 노을 붉은 모래산을 그려 올 수만 있다면... 그는 희망을 곁눈질하며 빌딩숲 저 너머로 마른 시선을 던졌다.
아주 메마르고 건조한 땅이 있어. 해수면 보다 낮은 곳이야. 태양열이 뜨겁게 지표면을 달구고 열풍이 훅훅 불어 오는 땅이지.
정말 그럴까.
그럼, 주먹 만한 별이 쟈수아 나무에 내려 앉는 곳이야.
그런 곳이 있어?
있구 말구, 노을이 지면 거대한 모래산이 붉은 섬으로 떠오르지.
어디야, 그 땅은?
전갈의 땅이지, 문명과 풍요의 반대 쪽이야.
가고싶어,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 줘, 까맣게 타던가 바짝 마르고 싶어.
승우가 갓길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둘러 보았지만 쥴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올란차로 연결되는 190번 국도가 원만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샌드듄스 입구에 쥴리를 내려주며, 승우는 안내판이 세워진 이 자리로 오겠다는 말을 몇 차래 했던 것을 떠올렸다. 승우는 겹겹이 이어지는 모래구릉의 여기 저기를 목을 늘여 바라 보았다. 가끔 사람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였다. 이 시간대에 샌드듄스를 헤메는 사람들이라면 전문 사진작가나 아니면 모험심 많은 젊은이들 일 것이다. 앞의 제법 높은 봉우리에 삼각대를 세우고 피사체를 담는 늙은 사진사가 보였다. 그 아래로 얕은 구릉들이 겹쳐 있는 부근에도 사람의 움직임이 있는 것 같았지만 큰 봉우리의 아래쪽이라 그늘이 짙고 낮은 위치라서 정확히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승우는 레이첼을 등에 업었다. 그렇게 살피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쥴리가 갔을성싶은 둔덕이 완만하고 아름다운 봉우리를 겨냥해서 모래밭에 발을 들여놓았다. 밖에서 보기와는 달리 꽤 걸었다 싶었지만 겨냥했던 모래둔덕은 쉽게 가까워 지지 않았다. 멀리서 대충 살필 때는 보이지 않던 얕은 구릉들이 제법 되었다. 더구나 아이를 등에 업고 발이 빠지는 모래밭을 걷는 일이 쉽지 않았다. 가끔 모래속에 숨은 돌뿌리나 나뭇가지를 밟기라도 하면 중심이 흔들려서 넘어 질뻔하기도 했다.
와우,
힘들게 목표 했던 둔덕에 올라 선 승우는 가슴이 훵 하게 비는 충격을 받았다. 국도나 캠프장에서 건너다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장엄한 광경이 펼쳐졌던 것이다. 끝없이 이어진 모래산과 구릉들이 거대한 왕국의 성벽처럼 솟아 있었다. 14 스퀘어 마일의 모래 바다에 뜬 수 백척의 전함이었다. 어떤 성은 옆으로 섰고, 어떤 배는 정면으로 항진해오고 있었다. 승우의 감탄에 등에 업힌 아이가 제 아빠의 어깨위로 머리를 들었다.
아빠, Canvas, Over There, 아줌마 Canvas!
레이첼이 어느 지점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응, 캔바스? 어디, 어디야.
저기, 오버데얼 하며 흔드는 아이의 손가락을 눈으로 따라가니 정말 그곳에 쥴리의 캔바스가 세워져 있었다. 승우는 급한 걸음으로 달려갔다. 쥴리의 캔바스 위에는 미완성의 목탄화가 그려져 있었다. 해가 지는 방향의 모래산을 그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봉우리 하나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그 보다 조금 얕은 구릉자락이 감싸고 있는 풍경이었다. 승우는 캔바스 주변을 세심히 살폈다. 깔깔한 모래밭에는 쥴리의 것으로 여길 만한 아무것도 없었다. 승우는 머리를 높이 들어 멀리, 아주 멀리까지 휘둘러 보았지만 쥴리의 모습은 없었다. 그림을 그리던 쥴리는 어디로 갔을까. 이 넓은 모래바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승우는 의혹에 휩싸인 체로 그리다 만 쥴리의 그림을 유심히 바라 보았다. 양쪽에서 감싼 구릉자락의 한 가운데로 중앙의 모래산을 향해 시냇물 같은 길이 그려져 있었다.
모래산으로 가는 길이라..
승우는 해 지는 방향으로 선 모래산들을 찬찬히 살펴 나갔다. 수십 개의 봉우리들은 모두 고만고만 해서 다 비슷해 보였다. 더구나 역광으로 해서 쥴리의 그림이 가리키는 모래산을 찾는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레이첼을 등에 업은 체 승우는 해 지는 샌드듄스를 지그시 노려 보았다. 어쩌면 캔바스 위의 모래산과 그 길은 화가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풍경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만든 그림속의 길을 걸어 갔을 것이었다. 쥴리를 찾는 일이 지나간 만남처럼 쉽지는 않겠다는 예감이 묻어 났다.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느라 지쳐버린 태양이 더 이상 머뭇거리기 싫다는 듯 붉은 꼬리를 슬쩍 내렸다. 레이첼을 등에 업은 승우는 어둠에 묻혀가는 샌드듄스를 지그시 노려 보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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