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둘리다/오연희
모난 너
그 써늘한 첫만남의 기억은
까맣게 잊었다
마구 쏟아내는 내 마음의 소리
무한정 수용하는 너
진실된 것 헛된 것 가증스러운 것까지
모두 담아도
침묵할 줄 아는 네가 있어
안심이다
너를 부릴 줄 아는 것이
자랑스러운 세월
낡아져 가는 내 저장기능을 탓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잠시만 홀로 두어도 창문을 닫아걸고
죽은 듯이 잠잠한 너
그 섬뜩한 토라짐에
문고리 살짝 흔들어 생존을 확인한다
한숨 길게 돌리고 나면
‘증명하라’ 엄한 소리
서둘러 나를 입력시킨다
‘접속권한이 없습니다. 다시 시도해 주세요’
한치의 오차도 허용 않는 너
또박또박 나를 입력한 후
숨죽여 기다린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마다
얼만큼의 거리를 두는
결국은 모난 너에게
마냥 휘둘리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