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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의 모습 /전차

2007.11.09 16:49

박영호 조회 수:243 추천:4

새야새야파란새야

생각나시죠 ?... 지난날의 우리의 교통 수단
 
 1899년 유명한 ‘전차폭동사건’ 이 일어난 후
전차는 한동안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았다.
전차가 본격적으로 정상 운행된 것은 1910년이 지나서였다.
1920년대 초에는 전차손님이 놀랄 만큼 늘어났다.
1919년 5월 30일 전차이용객수가 하루에 31,781명이었는데,
1921년 같은 날 전차 이용객수는 89,981명이었다.


당시 서울 시내 대중교통수단은 전차가 전부였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전차의 차고는 지금의 동대문종합상가가 있는 곳이었다.
여기서 출발해 차고지로 돌아갔다.
노선은 모두 4개 노선으로 한 구간에 5전(1930년대) 정도 했다.

당시 전차는 급하지 않았다. 느릿느릿 움직였고,
뛰어가면 잡아 탈 수 있었다.
그런데 손님과 전차운전사 사이에 싸움이 곧잘 벌어졌다. 운전사들이 손님 알기를
우습게 알고 걸핏하면 뺨을 때리기도 했고,
손님은 손님대로 운전사가 건방지다며
핏대를 올려 전차 안에서 일장 활극이 벌어졌다.

교외전차라는 것도 있었다.
동대문차고 건너편에서 출발해 안암천·용두교를 건너
뚝섬까지 운행했다.
안암천을 건널 때는 나무 철로인지라 전차가 지날 때마다
다리가 흔들거려 가슴을 졸여야 했다.
이 위기를 넘으면 용두교를 지나면서
인분 냄새를 맡아야 했다
.
왕십리와 뚝섬 일대의 채소밭에 뿌려진 인분 냄새이다.
이 냄새와 함께 전차 안으로는 파리떼가 습격해온다.
이런 전쟁을 치르고 나면
뚝섬의 한강 바람이 시원하게 맞이해 주었다.

전차노선도(1930년대 말)

보신각 앞의 전차 갈림길(1935)

남대문로(남대문시장 앞)의 전차와 우마차

전차 정류장

종로선

전차와 서대문(1914)

전차 정기승차권(왼쪽 : 앞면, 오른쪽 : 뒷면)

다리 위를 달리는 전차

통학길의 전차

1920∼1930년대의 버스, 
곧 승합자동차는 오늘날과 같이 크지 않았으며,
포드 8인승·14인승의 소형이었다. 당시 자동차의 등장은 하나의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자동차가 처음 등장하였을 때,
사람들 사이에는 ‘말보다 빠르다고 한다’
‘기차보다 더 빠르다’ 라는 논의가 벌어질 정도였다. 1930년대 경성 시내의 전차와
버스 요금이 5전이었다. 경성역 구내의 전화를 이용하려면 또한 5전이 들었다.
교통비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대개 웬만한 거리는 걸어다녔다.

버스

경성부영 승합자동차

서대문우편국 앞 승합자동차

수학여행길의 버스(이화여전, 1930년대 후반)

자동차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1911년으로,  
이때 관용 리무진 승용차가 왕실과
총독용으로 각 1대씩 들어왔다. 1914년경부터 총독부의 고관과 주한외교관, 구왕실,
친일 귀족들을 중심으로 승용차를 타기 시작하였다. 당시로서는 승용차란 매우 귀한 것으로
아무나 탈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932년도 관용 승용차는 608대였고,
자가용 승용차는 984대였다.

자동차가 다른 교통수단보다 늦게 들어온 것은 도로 사정 탓도 있었다. 당시 서울의
길은 비좁았고, 한강에 인도교가 없어 자동차가 다니기 불편했다. 1917년 일본인들이 도로
공사를 완공하고, 한강 인도교가 준공되자 자동차 보급이 늘었다. 그 때 수입된 자동차는
대개 미국제였다.

나룻배 위의 승용차

진흙길에 빠진 자동차

손병희의 승용차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택시영업이 시작된 것은 1912년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이 합자하여
포드 T형 자동차를 2대를 들여와서 시간당 5원의 요금을 받고 임대영업을 시작한 것이다.
1930년대 택시요금은 80전이었는데,
당시 전차·버스 요금이 5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택시란 보통사람이 좀처럼 이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택시처럼 탈 사람을 찾아 다니지 않고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손님이 부르면갔다.
1930년대 종로3가 큰길 가에 주차장이 하나 있었는데, 10대 정도 부리고 있었다. 여기를
‘차부’ 라 불렀다. 이곳에 전화를 두고 손님을 기다렸으니 일종의 ‘콜택시’ 였다.
장난꾸러기 아이들은 곧잘 ‘어디 어디로 차를 보내 주세요’ 라고
거짓전화를 해 골탕을 먹였다.

승합택시(1920년대 말)


1930년대의 택시
인력거는 자가용과 영업용 두 가지가 있었다. 1인승으로 인력거의 가장 큰 손님의 하나는
기생이었다. 집에 있다가 손님과 예약이 있거나 요릿집에서 부르면 인력거를  타고 갔다.
돈 많은 기생은 이른바 ‘기마에(돈을 잘 쓰는 것)’ 도 좋았고, 단골 인력거를 이용했다. 인력거는
인력거병문(인력거방)이란 곳에 모여 있었다. 요샛말로 택시터미널 같은 곳이다.

인력거방은 동대문과 서대문 사이에 몇 군데 있었다. 대개 큰 기와집 바깥채의 벽을 헐고
헛간을 만든데다 인력거를 예닐곱 대 들여놓고, 거기 딸린 방에서 인력거꾼들은 손님을 기다렸다.
인력거꾼은 ‘합피’ 라고 부르는 짧은 두루마기 같은 윗도리에 반바지를 입었다. 신발은
검정이나 흰 헝겊으로 울(신발의 가를 두른 부분)을 하고, 바닥은 검정고무를 댄 농구화
비슷했다. 그러나 끈이 없고 엄지발가락이 따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일본인 노동자가
신는 ‘지카다비’ 였다. 머리에는 흰 수건을 동여 메었고 겨울에는 방한모를 썼다.

경성역(서울역) 뒤에는 화물정류장이 있어 기차의 화물은 하역했다. 수송회사·운반업자와
계약을 맺은 마부·트럭기사·지게꾼·리어카꾼은 바빠진다. 창고업자나 도매상 등 지정받은
곳에 짐을 운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남대문 앞은 전차와 우마차·리어카가 함께
도로를 다녔다.

인력거 대기소

우마차와 인력거가 늘어선 거리(한강로)

전차와 우마차·수레가 함께 다니는 남대문 앞 거리


자전거와 가마가 있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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