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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2008.02.19 17:45

박영호 조회 수:295 추천:3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


이룻






제작 Stroy 동영상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


감독 : 빅터 플레밍
출연 : 클라크 게이블
비비안 리
레슬리 하워드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토마스 미첼
원작 : 마가렛 미첼
수상 : 1940년 아카데미 최다 10부문 수상


Gone with the wind OST - Tara's Theme




















"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About the movie

이틀 분량의 런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때마다 TV 안방극장의 단골 레파토리가 되는 영화, 더 이상 이만한 캐스팅과 제작진은 불가능하다는 전설만 떠돈 채 그 누구도 리메이크하기를 꺼리는 영화, 그렇듯 만들어진지 60여년이 된 이 영화가 여지껏 바람처럼 사라지지 않고 우리 곁을 맴도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비비안 리와 클라크 게이블이 뿜어내는 영원불멸의 매력과 남북전쟁의 소용돌이를 딛고 올라서는 한 여인의 강철같은 의지, 그리고 광활한 타라의 풍경 속에 피어나는 불꽃같은 사랑의 대서사시야말로 한 세기에 나올까말까 한 명작이기 때문이다.

1939년에 데이비드 셀즈닉이 제작한<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9세기말 남북전쟁으로 짓밟힌 미국 남부 조지아주를 무대로, 격렬하게 살아간 여인 스칼렛 오하라(Scarlet O'Hara)의 이야기를 그린 마가렛 미첼 여사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상영 4시간의 불후의 명작이다. 이는 할리우드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만한 대작명화로 평가된다.
스칼렛역을 위한 수많은 오디션, MGM사에서 빌려온 레트역의 클라크 게이블, 감독의 교체 등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이 영화는 오래 걸린 제작기간을 충분히 보상할 만큼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원작은 10여 년만에 완성했다고 하며, 600만 달러가 투입된 제작비는 당시로서 전대 미문의 엄청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에서 작품(데이빗 셀즈닉), 여우주연(비비안 리-스칼렛 오하라의 이미지를 거의 완벽하게 구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여우조연(해티 맥다니얼), 감독(빅터 플레밍), 각색(시드니 하워드), 촬영, 실내장치, 편집, ! 특별상 등 11개 부문을 휩쓰는 등 평단의 화려한 각광을 받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의 상실감과 허무감을 그리고 있지만 궁극적인 주제는 「결코 좌절하지 않는 불굴의 투혼」이라고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지금도 많이 팔리고 있고 영화 역시 부단히 재상영되고 있다. 그만큼 이 작품은 미국인들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최근 저자 사후에 속편인 「스칼렛」이 쓰여지고 영화화된 것도 바로 원작의 그러한 인기에 힘입은 것이다. 제목과는 달리,「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소설도 영화도 쉽게 사라지지 않고 앞으로도 오래 살아 남는 불멸의 작품이 될 것이다.


Making Film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오즈의 마법사> <잔 다르크>의 빅터 플레밍 감독의 연출과 타고난 안목을 자랑하는 헐리웃의 큰손, 데이빗 셀즈닉의 제작에 의해 탄생했으며 마가렛 미첼 여사의 퓰리처 상 수상작을 영화화한 것이었다.
클라크 게이블의 그 능청스런 미소와 당시 신인이었던 비비안 리의 눈부신 매력은 누구도 따라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도 걷잡을 수 없는 설레임을 제공했다. 게다가 애쉴리 역의 레슬리 하워드, 멜라니 역의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의 호연은 물론 흑인이 수상하기는 영화제 사상 최초라는 이유로 호들갑을 떨었을 만큼 스칼렛의 하녀 역으로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친 해티 맥다니얼의 여우조연상 수상덕분에 더더욱 화제를 배가시켰던 작품이다.
텔레비전 미니시리즈로 방영되었던 <스칼렛>에서 한때 발 킬머의 아내였던 조안 웰리와 제임스 본드 출신의 티모시 달튼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신화에 의욕적으로 도전했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 격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다.

영화의 무대는 남군 최후의 거점이었던 애틀랜타와 오하라 가문의 타라 농장을 오간다. 미첼 여사는 오직 이 한편만을 쓰고는 자신의 모든 것을 여기에 다 쏟아넣었기 때문에 더 이상 쓸 것이 없다고 하면서 그 후로는 일체 붓을 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36년에 출간되어 베스트 셀러가 된 이 책의 영화화권을 당시로서는 거금인 5만달러에 사들인(후에 다시 5만달러를 추가로 지불) 제작자 데이빗 O. 셀즈닉은 남자주인공 레트 버틀러 역으로는 원작자인 마가렛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화 촬영 중 미첼 여사의 추천에 의해 클라크 게이블을 일찌감치 결정해놓고,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 역의 배우를 찾지 못한 채 일단 촬영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촬영장에 들른 영국출신의 무명 여배우 비비안 리를 스칼렛로 결정하여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 결과는 엄청난 성공이었다. 두 주연의 역사적인 명연과 함께 전 배역진의 참신한 조화와 획기적인 칼라촬영, 헐리우드 최고의 각본가 7명과 셀즈닉 자신까지 참여한 완벽한 시나리오, 맥스 스타이너의 기념비적인 음악, 390만달러 라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거액의 제작비 등이 한데 모여서 애틀랜타 역의 남군 부상병들 장면, 애틀랜타 대화재속의 극적인 탈출장면, 레트와 스칼렛의 폭발적인 러브 씬, 멜라니 역의 하빌랜드가 보여준 은근한 강인함 등 수많은 인상적인 명장면들을 탄생시켰다.

처음에는 죠지 큐커(George Cukor)를 감독으로 촬영을 시작했으나, 의견 차이로 인해서 3주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그래서 <오즈의 마법사>를 막 끝낸 빅터 플레밍(Victor Fleming)에게 메가폰이 넘어갔다. 플레밍은 마지막 1주일을 남기고 과로로 쓰러지는 바람에 나머지는 샘 우드(Sam Wood) 감독이 찍었다. 한가지 이상한 점은 "타라의 테마(Tara's Theme)"를 비롯해서 영화사에 불멸의 명곡을 남긴 맥스 스타이너의 음악이 음악상을 놓친 것이라 할 수 있다.
영화사적으로 보면 1930년대 후반에 이미 실제 촬영과 특수 덧촬영 기법을 동원했고, 무수한 등장인물, 셋트, 동원된 엑스트라, 음악, 촬영, 의상, 고증, 음향 등 세밀한 부분을 꼼꼼히 챙겨 전체적인 영화의 완성도를 높인 그 제작능력 또한 놀라운 것이다.


Original  Sound  Track

영화 음악 역시 영화 음악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획기적인 시도로 충만했다. 작곡가 막스 스타이너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되게 만들었던, 명실공히 영화 음악의 금자탑.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화음악 작곡가인 막스 스타이너는 13살에 비엔나의 음악 황실 아카데미를 졸업했을 만큼 수재였다. 더불어 그는 8년간의 코스를 단 1년 만에 완성한 음악의 신동이었다. 구스타프 말러 밑에서 수학했던 그는, 14살 때 이미 오페라를 작곡했고 16살 때부터 전문적인 지휘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고선 1914년에 미국으로 이주해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상임 지휘자로 일했고 1929년엔 본격적으로 헐리웃으로 건너가 영상과 절묘하게 결합되는 음악의 개발에 주력했다.
그의 전 생애에 걸쳐서 200편이 넘는 영화에 음악적 숨결을 불어넣었으며, 무려 15차례나 아카데미 음악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그리고 35년 와 42년 , 44년 로 아카데미 수상의 영예를 안았음은 물론, 48년 로는 고향인 베니스에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여러 차례의 수상결과에도 불구하고 막스 스타이너의 이름을 드높인 작품이라면 뭐니뭐니해도 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꼽아야 할 것이다. 영화 자체가 워낙 유명세를 톡톡히 치른 탓에 덩달아 주가가 높아진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 영화에서 막스 스타이너가 '영화 음악'의 개념을 전면 수정했기 때문이다.
영화 음악이 단순히 배경 음악으로서의 의미밖에 없었던 그 당시, 영화 음악의 본질에 대해 의구심을 표했던 선구자가 바로 막스 스타이너였다. 당시엔 영화 음악이 배경 음악의 틀을 깨고 노출되면 영상의 리듬이 깨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막스 스타이너가 주인공 각자의 개성을 중시해서 주인공의 성격과 심리곡선을 따라가는 영화 음악을 만들었을 때 빅터 플레밍 감독 역시도 내심 불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모두들 특별한 시도 없이 기존의 틀에 안주해 있을 때 이 막스 스타이너의 위험 천만한 모험담은 영화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끊임없는 시! 도와 모험만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힘이란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는 작업이었다. 그런 만큼 이 영화의 사운드 트랙을 보면 유독 주인공들이 지닌 고유의 음률은 물론 인물들의 관계를 부각시키고 있음을 간과할 수 있다. 물론 이 영화를 관통하는 전설 같은 주제곡으로서 다음과 같은 마지막 대사를 읊조리는 스칼렛의 야무진 표정과 겹쳐지던 타라의 테마야말로,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요약해주는 가장 탁월한 선율임에 틀림없다.


The Plot

그곳은 신사도와 목화밭으로 상징되는 곳이었다. 이 아름다운 지방은 기사도가 살아있는 마지막 땅으로, 용감한 기사와 우아한 숙녀, 그리고 지주와 노예가 함께 존재하는, 책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꿈처럼 기억되는 과거가 오늘로 살아있는 곳. 문명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일까(A Civilization has gone with the wind...)."

1부:
남북 전쟁 전의 미국 남부는 새로운 문명과는 단절된 채 옛 관습과 전통에 뭍혀 살아가는 아름다운 땅이었다. 북부가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남부에도 이를 강요하자 남부는 연방을 탈퇴하고, 남과 북은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1861년, 남북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조지아주 타라 농장주 제럴드 오하라의 장녀 스칼렛 오하라(Scarlett O'Hara: 비비안 리 분)는 빼어난 미모와 늠름한 성격으로 청년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스칼렛이 사랑하는 남자는 어릴 적 소꿉친구였던 애쉴리 윌크스(Ashley Wilkes: 레슬리 하워드 분) 뿐. 그러나 애쉴리가 그녀의 착한 사촌 멜라니(Melanie Hamilton: 올리비아 드 하빌란드 분)와 결혼하자 스칼렛은 홧김에 동생 인디아(India: 알리시아 렛 분)와 결혼하기로 되어?獵? 멜라니의 남동생 찰스(Charles Hamilton: 랜드 브룩스 분)와 사랑 없는 결혼을 한다. 찰스는 입대하자 마자 전사하고, 스칼렛은 2주일만에 미망인이 되어 버린다. 그 무렵 그녀 앞에는 영국 출신이면서 행실이 나쁘다고 소문난 험상궂고 남성다운 레트 비틀러(Rhett Butler: 클라크 게이블 분)가 나타난다. 상복차림의 미망인인 스칼렛은 자신의 처지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에 걷잡을 수 없게 휘말려 버리고 그런 스칼렛을 과감히 탈출시켜 준 이가 레트 버틀러였다. 그렇게 레트 버틀러는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그녀를 도와 준다. 거만한 스칼렛은 그를 미워하면서도 또 한편으?! 灌? 자신도 모르게 이끌려간다. 어울리지 않는 상복을 입은 스칼렛은 여전히 애쉴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데 전황은 점차 남부에 불리해져 조지아주 애틀란타까지 북군이 쳐들어온다. 겁에 질린 스칼렛은 멜라니의 출산이 임박하자 계속 머물게 된다. 애슐리의 실종과 멜라니의 출산으로 스칼렛의 상황은 어려워져만갔다. 멜라니가 아이를 낳고 전쟁의 불길이 거세지자 스칼렛은 양키들을 피하기 위해 레트의 도움으로 죽음의 고개를 넘어 고향인 타라로 피난한다. 그러나 레트는 갑자기 마음을 바꿔 전쟁터로 향한다. 기진맥진한 멜라니와 도착한 고향은 어머니의 죽음과 실성한 아버지, 그리고 혹독한 가난만이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스칼렛은 이를 헤쳐나갈 것임을 하나님께 맹세한다.

2부:
북군으로 인해 남부의 점령지는 수난을 겪한다. 전쟁에 나섰던 남부의 청년들이 점차 돌아오기 시작하는데, 찰스의 형 카네기도 돌아와 스칼렛에게 구애를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애쉴리 뿐이다. 타라에 머무는 동안 전쟁으로 인한 배고픔, 질병들이 그녀를 억척스럽게 일을 하게 만들었다. 스캇렛은 세금 300달러를 내지 못해 고난을 겪고, 이때 정신이 나갔던 아버지가 말을 타다 떨어져 죽는다. 이때 전쟁 때문에 큰 돈을 번 레트가 군형무소에 있다는 사실을 안 스칼렛은 그를 찾아가지만 또다시 그의 빈정거림만 받는다. 이에 스칼렛은 가난을 탈피하기 위해 동생 수엘렌과 결혼약속이 되어 있던 약혼자인 프랭크 케네디(Frank Kennedy: 캐롤 나이 분)와 결혼하여 세금을 해결한다. 전쟁이 끝나고 그녀는 프랭크의 자금으로 제제소를 운영하는데, 여자가 사업을 하는 것에 대한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돈을 버는! 일로 열의에 차 있다. 프랭크와 애쉴리는 정치 모임에 나갔다가 프랭크가 총에 맞아 죽고, 애쉴리는 다행히 레트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다. 다시 상복을 입게 된 스칼렛에게 레트는 청혼을 하고 스칼렛은 결국 돈 많은 레! 트의 구애를 받아들여 결혼식을 올린다. 레트는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음을 알지만 결혼 생활을 하면서 점차 자신을 사랑해주길 기다리며 그녀를 위해 많은 돈을 쓴다. 하지만 애슐리를 연모하던 스칼렛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해가자 스칼렛과 레트는 연일 싸움이 그치지 않고, 레트는 오직 딸 보니(Bonnie Blue Butler: 캐미 킹 분)가 커가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 살아간다. 스칼렛은 애쉴리와 있는 것을 주위 사람들도 알게 되어 곤경에 처하게 되는데, 자신과 애쉴리의 관계를 냉철히 알고 호되게 질책하는 레트에게 점차 이끌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의 진심을 미처 깨닫지 못한 레트는 보니를 데리고 여행을 떠나 스칼렛을 실망시킨다. 스칼렛은 그가 돌아왔을 때, 그토록 싫어하던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레트는 이것 마저 진심으로 봐주지 않는다. 결국 스칼렛이 계단에서 떨어져 유산되자, 레트는 자신의 잘못을 슬퍼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자존심 때문에 두 사람의 다툼은 계속된다. 여기에 그토록 아끼던 보니가 말을 타다 떨어져 죽자, 레트는 더 없는 실의에 빠진다. 더구나 두 사람을 항상 위로해 주고 슬픔에서 헤어나오도록 도와 ?! 少? 멜라니도 쓰러진 후 결국 숨을 거두자, 스칼렛은 커다란 슬픔을 겪 게 ? 홱?. 멜라니의 유언을 통해 뒤늦게 서야 현실을 깨달은 스칼렛은 애슐리에 대한 사랑은 환영이었다는 것과 애슐리가 정말로 사랑했던 사람은 자신이 아닌 멜라니임을 자각한다. 그리고 그제서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레트임을 알고 그에게로 달려가지만, 레트는 이미 이별의 길을 떠난다.
"그를 이대로 보낼 순 없어. 그를 돌아오게 할 방법을 생각해야지, 오 지금은 생각할 수 없어, 그랬다간 미칠 것만 같애. 그래 그건 내일 생각하자. 하지만 생각해 내야 하는데, 꼭 생각해내야 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정말 중요한 게 뭘까."
"타라, 오 내 고향, 타라에 가자. 거기에 가면 그이를 되찾을 방법이 생각날 꺼야. 결국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테니깐 (After All Tomorrow Is Anther Day)."


Review of movie

☜아카데미 시상식에서의 비비안 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헐리우드 영화산업 시스템이 빚어낸 최고의 성공작으로 꼽히며, 비비안 리와 클라크 케이블은 영원한 여성상과 남성상으로 영화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당시 최고의 판권료 5만불을 지불해 노벨상 수상작가 싱클레어 루이스를 비롯하여 스크드 피츠 제랄드, 벤 헥트 등 미국의 내노라 하는 작가 18명이 시나리오화 했다. 3년 제작에 6백만불을 소모한 대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939년 12월 12일 작품의 무대인 애틀랜타 시에서 역사적인 시사회를 가졌다. 이 날은 애틀랜타 시의 공식휴일로 지정됐다. 아카데미 작품, 감독, 여우주연, 여우조연, 각본, 촬영, 미술, 편집, 특별상을 휩쓸었고 1억불 이상의 흥행 수입을 올렸으며, 지구상에서 이 영화가 상영되지 않는 날이 없다고 까지 말한다. 비비안 리가 대스타 60명이 경합한 스칼렛 역에 어떻게 발탁되었는가는 이제 전설로 남게 됐다. 그리고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씬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거야" 같은 대사들 역시 관용어가 됐다. 미국 남북전쟁을 전후하여 조지아주 타라 목장집 딸 스칼렛 오하라의 생명력 넘치는 삶을 조명한 이 영화에 대해 "미국에는 두 개의 영화가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그 나머지들'이라고 까지 평한 평론가가 있다.
1965년에 <사운드 오브 뮤직>이 나오기까지 30년간 세계 영화 흥행수익 1위의 자리를 30년 가까이 지켰는데, 그동안 화폐가치가 6배나 떨어졌다는 사실을 반드시 감안해야만 한다.
지금은 70밀리 화면에 옮겨져서 스테레오 음향을 곁들여 계속 재공개가 되고 있다. 엄청난 방영권료와 셀즈닉의 고집 때문에 TV에는 등장하지 못하다가, 1976년에야 처음으로 CBS에서 이틀간에 걸쳐 방영이 되었다. 이때 시청률 47.6%라는 기록적인 인기를 얻었고, CBS는 1978년부터 20년간 20회까지 방영할 수 있는 권리에 3,500만 달러를 지불했다.
1976년 NBC TV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이틀 동안 방영하였을 때 65%라는 시청률 신기록을 수립한 바 있다. 이 영화가 만들어 낸 유행어인 “이 영화를 보면 빠져 버릴 거야.”라는 표현은 곧 “스칼릿 열병에 걸릴 거야.(You get Scarlett fever.)”로 바뀌어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영화 흥행 측면에서는 4백만 달러를 투자하여 8억 5천만 달러의 흑자를 내 가장 수익성이 좋았던 영화로 기록되고 있다. 아직도 생존해 있는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가 아카데미상을 두 번, 그리고 비비안 리도 이 상을 두 번 수상했다.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었던 클라크 게이블은 아카데미상 10여 개 부문에서 수상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정작 상은 하나도 받지 못해 상복이 없는 불운의 ‘미스터 할리우드’로 남아 있다.
1985년에 MGM의 필름 보관소를 사들인 테드 터너(CNN 사장)는 2년간에 걸쳐 25만 달러를 들여 필름을 완전히 복원시켜, 1989년에 공개 50주년 기념으로 재공개를 해 다시 화제가 되었었다.
"내일 나는 그이를 되찾을 방법을 생각해 낼 것야, 어쨋든 내일은 또 새로운 하루니까(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라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스칼렛 오하라의 말로서 이 명작은 그 끝을 맺는다. 이 영화도 약 50년이 지나 TV 미니시리즈 형식으로 속편이 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