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y to essay (살리느냐 죽이느냐)

2017.01.22 05:52

Chuck 조회 수:544



[이 아침에] 살리느냐 죽이느냐 


돈 한 푼 못 벌면서 뭣 때문에 돈 들여 갱신을 하는데?"


불만이 담긴 핀잔이 떨어진다. 한 귀로 들었으니 다른 귀로 내 보내면 좋았을 걸, 가슴에 저장 되었다. 생각이 다르다. 핀잔 받을 일, 물론 아니다. 내 의견 대꾸 해봐야 언성 높아지며 다툼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니 참자. 그리곤 갱신하는 절차를 진행한다.

1973년, 미국 이민 길에 들어서서 잡았던 첫 직장이 일본계 은행이었다. 국제 무역업무만 취급하는 은행이어서 일본에서 파견되는 주재원들과 현지에서 채용된 일반 업무 담당 직원들로 구성된 열 댓 명이 전부인 직장이었다. 

전부 일본인들이다. 몇 년마다 교체되는 주재원들이다보니 현지 채용된 직원들도 일본어로 업무를 본다. 겁도 없이 인터뷰 때부터 일어로 시작했다. 그 정도는 가능했던 내 일어실력이다. 막상 채용되어 출근을 해보니, 아침부터 퇴근할 때까지 일어만 사용한다. 간단한 대화만으로 통할 줄 알았는데, 내가 해야 할 일 전부를 일어로 설명해준다. 

큰일이다. 대강 눈치로 이해는 하면서 자주 묻지 못하며 넘겼다. 영어가 서툰 주재원들. 내 영어 역시 바닥이다. 젊은 총기로 잘 견디기를 2년 반. 시간이 지나면서 직장 생활에 싫증이 났다. 일본어가 듣기 싫어졌다. 내가 하는 업무에도 한계를 느꼈다. 미래가 없다. 

직장에서 구독하는 일본 신문을 뒤적거렸다. 구인광고 란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보다는 월급이 좀 더 많은 곳에 시선이 멈춘다. 하루는 주급이 월등히 많은 곳을 발견하곤 찾아가려 했다. 마사지와 메시지의 스펠링을 혼동했던 경우다. 그 때 그대로 나갔더라면 지금쯤은 일등 마사지사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미국으로 이민 왔으니 영어를 써야 된다. 영어로 일하는 직장을 찾기로 목표를 세우고 두 번째 일터를 결정했다. 일본인이 주인이지만 직원들은 여러 나라 사람으로 섞인 멜팅팟이다. 내가 최초의 한국인이다. 공통어는 영어다. 그곳이 바로 통관사가 있는 통관회사였다.

1975년 새해 첫 월요일에 출근해서 수입하는 무역업자들의 물건을 통관시켜주는 업무에 발을 들여놓았다. 타이피스트로 시작했지만 사무실 안에서 돌아가는 일들을 혼자 빠르게 파악하면서 일을 배워갔다. 특별히 누가 가르쳐주진 않아도 올라갈 길이 보였다. 일터가 아닌 놀이터에서 30여 년 일하고 은퇴를 했다. 면허증을 따고 내 회사를 경영하고 더 재미있는 놀이를 찾아 일은 접었지만 면허증을 포기하진 않았다.

은퇴 후, 십 수 년 동안 몇 차례나 면허증을 갱신하면서 남편에게 받은 핀잔이다. 돈벌이로 이어지지 않는 면허증을 왜 돈 들여가며 끼고 있느냐는 못마땅하다는 의견이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래도 난 이 면허증을 살려 두고 싶다. 일을 하지 않더라도 통관사라는 내 스스로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혹시 또 일을 하고 싶어지면 다시 면허증이 있는 통관사로 일하는 것에 난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다.(노기제/수필가·전 통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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