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속에 태어난 그 무엇

2020.05.01 20:29

노기제 조회 수:13

HIT_4984.jpg


20160629                         고통 속에 태어난 그 무엇

 

 

   세상이 반응을 안 해준다. 남편이 가까운 친구에게 사기를 당했다. 억울하단 생각에 분을 품었다. 그랬더니 살맛이 없다. 참으라 한다. 용서하란다. 잊으라 한다. 뒤범벅이 되어 나를 소멸하는 시간들이 흐른다. 그래도 세상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잘도 돌아간다.

   어느 누구하나 내 편이 되어 함께 분을 내는 사람도 없다. 악을 쓰며 외쳐 봐도 내 주위엔 아무도 없다. 악을 악으로 갚으려 에너지를 소진했다. 더 이상 악을 쓰지 못하기까지 힘이 빠졌다. 살며시 실눈을 떠 보니, 하늘이 맑다. 콱 막혔던 숨통이 트인다. 깊게 숨 한번 들이 마시며 기지개를 켠다. 누구에게 값을 지불하지 않고도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공기가 새삼 싱그럽다. 밝은 태양 빛에 나를 내어 맡긴다. 따스하다. 힘이 생긴다.

   그동안 무엇 때문에 두 눈 꽉 감고 움츠리고 있었나 육 개월이란 시간이 그리도 긴 세월인 것을 처음 알았다. 온통 어둡고, 이리 밀리고 저리 밀쳐지며 사방에 멍이 들어 지낸 날들이다.

   내가 사는 방법은 아니다. 남편이 살아 온 방식이다. 나는 누가 밀치면 바로 받아서 밀쳐버린다. 악을 악으로 갚으려 한다. 이 쪽 맞고 다른 쪽 맞기 전에 손 올려, 막으며 사는데, 남편은 고스란히 맞고만 있다. 내 속이 터진다.

   남편이 말하는 이론은 이렇다. 자신의 친구이고, 자신이 당한 일이고, 자신이 책임져야 할 상황인 만큼 자신이 해결하겠단다. 아내에게도, 하나님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가 없다는 의견이다. 가만히 있으란 말만 거듭한다.

   혼자 감당하려고 아파하는 남편을 지켜보며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물론 내 상식으론 이해 할 수 없다. 답이 안 나온다. 순간적으로 내 가슴을 스치는 것은 남편이 불쌍하다는 생각이다. 자신의 방식대로 아내를 아끼는 마음이 느껴진다. 친구에게 당할 정도로 바보스럽다는 차가운 판단이 앞서지만, 아내를 향한 그만의 철통같은 보호막을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일이 벌어진 처음부터를 내게 자세히 알리지 않았던 거다. 어느 정도 시간을 주면 친구가, 믿었던 만큼의 친구로 돌아서리라 기다렸던 남편이다. 아내가 모르는 채 모든 일이 해결 될 것을 기대했던 그다.

   그러나 결국은 아내가 알게 되고 생각보다 일은 많이 심각해진 상태다. 남편이 원하는 대로 참견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치에도 맞지 않는 말을 하며 경제적 손실을 입히고, 올 곧게 평생을 살아온 남편에게 불명예까지 안기려 하는 사기꾼을 잠잠히 보고만 있어야한다.

   남편이 원하는 대로 맡기고 싶다. 그가 지키고자 하는 자존심이 너무 커서 내가 관여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어렵고 힘든 일을 내게 지우려 않는 남편이다. 입 다물고 곁을 지켜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어려운 현실에 관심 끄고 남편에게만 초점을 맞춘다. 따뜻하니 살 맞대고 손길로 위로한다. 언제나처럼 난 화사하게 웃고, 가끔은 큰소리로 깔깔대며 강아지 재롱에 박장대소한다. 여전히 드라마에 빠지기도 하고, 치과에 가는 것도 메모를 해 둔다. 그런데 그이를 혼자 있게 할 수가 없다.

   남편과 시간이 안 맞으면 혼자 스키 타러 가기도 하고, 친구들과 여행도 떠나곤 했지만, 그럴 수가 없다. 스키타기 최적의 계절임에도, 그냥 남편 곁에 있다. 친구들이 계획하는 차기 여행에도 손들어 답하지 못하고 있다. 언제쯤 남편이 이 고통에서 풀려나게 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게 밍밍해진 내 가슴에 생각지도 못했던 커다란 선물을 그 사기꾼 친구가 내게 주었다. 남편을 처음 만나 불 붙었던 사랑이 다시 찾아온듯하다. 묻지 말고 토닥여 주고, 상한 마음 아물도록 다그치지 말고 잊으라 응원해주자.

   어차피 약국 하나 값은 우리 몫이 아니었다고 포기하자. 다시 차근차근 성실하게 주워 모아보자.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0
전체:
96,6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