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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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수필) 2월의 봄빛

2024.02.04 06:09

HeeSookYoo 조회 수:53

 

2월의 봄빛

 

                                                                                       이희숙

 

엄마, 생일 선물로 무얼 받고 싶으세요?”

딸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딱히 필요한 물건도 없는 듯했다. 가지고 있던 물건도 정리해야 할 때가 아닌가. 친구가 칠순 기념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몸이 불편한 우리 내외는 여행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동안 힘에 부치도록 일했으니 이제 쉬라며 운전대까지 내려놓은 채 집콕의 주인공이 되었다.

   . 그냥 가까운 바닷가를 걷고 싶다.”라고 소박한 바람을 전했다. 둘째 딸이 김밥을 싼다고 분주했다. 어릴 적 가족 여행에서 먹던 김밥의 추억이 생각났던 게다. 오이, 시금치, 달걀, 우엉, 참치, 햄이 저마다 고유한 색과 맛을 뽐내며 어우러졌다. 발대 속에서 꾸우욱 눌려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생일 소풍 준비물은 김밥 일곱 줄만으로 충분했다. 사위와 손주까지 일곱 명이 된 가족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받았다. 우리의 생이 성취한 것이 아니고 주어졌음을 깨달으면서, 무리하지 않고 욕심 없이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올해가 칠순이란다. 한국 나이로 한 살을 보태어 70이라고 했다. 김형석 교수는 70세가 되어야 내 인생을 내가 걸어가는 단계라고 했다. 이제 삶을 내가 이끌어 갈 수 있으려나. ‘7’ 자를 닮은 지팡이가 남은 생을 인도하리라는 믿음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7’ 자는 행운의 숫자라고도 하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내 앞에 다가온 7학년 교실 문을 여는 것이 두려워 내년으로 미루기로 했다. 미룬다고 오는 세월을 막을 수 있으랴만. 자녀들이 기억하기 좋도록 음력 2월을 양력 2월에 지키니 더 빨라져 이른 봄이 되었다. 작년 생일에 봄을 불러내는 의미를 부여하며 내가 쓴 부족한 시를 되읊어 본다.

       2월에

꽃 시샘 추위를 맞으며/ 30일을 채우지 못한 탓에

열두 달 중 가장 짧은 다리로/ 빈 들 지나 봄 마중 간다

무녀리로 태어나/ 얼어있던 들판/ 계절의 선두로 나서

봉긋봉긋 꽃망울을 여는/ 산도(産道)를 밟는다

어두운 세월의 흙 속에서/ 견디며 쇠약해진 몸으로

겨울을 마감하는 문턱에서/ 썩어져 씨앗을 가르고

생명을 대지로 뿜어내며/ 봄빛으로 바꾸어 낸다

 

Montage Laguna Beach를 찾았다. 야생화가 해변을 노랑, 주황, 보랏빛으로 장식한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꽃망울을 피워내고 있다. 흔들리는 모습이 애잔하다 못해 대견스럽다. 바람 속에 파드득거리지만 자기의 꽃을 피워내는 꽃처럼. 앞에서 가로막는 것들을 받아들이며 세월에 기대어 길을 걸어가 보련다. 차가운 바람이 옷 속으로 파고들지만, 그 기운도 흐르지 않겠는가. 2월이 그렇듯이.

 찰랑이는 파도 결 따라 모래사장을 걷는다. 길이 아닌 모래벌판은 울퉁불퉁 푹푹 파여 발걸음을 떼기 힘들다. 이렇듯 칠십 평생을 발바닥에 부딪히는 모래 위를 분투하며 살아왔나 보다. 누군가는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본다고 했는데. 모래 한 알갱이가 영근 내 삶의 조각으로 남길 바란다.

 새 발자국을 따라가 본다. 한참 후 내 발자국을 남겼다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니 밀려오는 파도에 쓸려 사라져 흔적이 없다. 훗날 우리 생의 지나간 자취도 고요로 남을 것처럼. 그런데 파도가 휩쓸고 간 모래 위는 단단하고 매끄러워 걷기가 쉽다. 시련을 통해 길은 탄탄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곱게 내려앉고 있는 석양을 바라본다. 맛있는 인생을 차려 놓은 생일 식탁이다.

찬 바람 속에 2월의 봄빛이 일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