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4.05 05:33
퇴고(推敲)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김성은
우리나라 역사교과서 편찬과 관련하여 뜨거운 논란이 빚어졌던 2015년. 집필진이 공개되지 않았고, 대표 집필자는 제자들의 만류로 공식 인터뷰에 참여하지 못하는 등 사회적인 불협화음 속에 추진된 역사교과서 편찬 작업이 현재 진행 중이다.
온 나라가 들썩거릴 정도로 여론이 술렁거렸고, 뜨거운 논란과 논쟁이, '친일파'와 '애국자'라는 단어가 충돌하면서 울리는 굉음(轟音)이 불안했다. 2017년 교육 현장에 배포되는 교과서는 과연 어떤 내용일까?
나는 현재 시각장애 특수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다. 2018학년도부터 우리 학교도 개정된 교과서를 사용해야 하는데, 과분하게도 그 중차대한 작업에 내가 집필진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현장 경험이 10년 이상 되었고, '이료'라는 특수 분야를 가르치며 쌓아온 지식을 최신 정보와 버무려 글로 녹여내는 작업은 과연 만만치가 않다. 2015년 여름, 집필진 선정 과정이 있었고, 2016년 2월 초고본이 완성된 뒤 수도 없이 퇴고와 수정이 거듭되는 가운데 4월 17일이면 교과서 초고본이 출판사로 넘어가게 되어있다. 꼬박 1년 동안 작업하게 된 것이다.
교과서 한 과목에 주 집필을 필두로 하여 집필진들이 협동으로 쓰다 보니 단원 간 난이도나 문장 서술 방식에도 차이가 나기 마련, 며칠 전에는 집필진 전체가 모여 문장을 하나하나 다듬는 밤샘작업이 이루어졌다.
해묵은 인연으로, 교육 현장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여러 선배 선생님들의 조언을 들으며 문장을 다듬고 내용을 수정하는 동안 진이 빠지기도 했지만, 글쓰기 훈련을 열망하는 나에게는 무척 의미가 있고 보람된 시간이다. 퇴고를 거듭할수록 원고는 내용 면에서나 형식면에서 두루두루 모양을 갖추며 진화된다.
문장 부호 하나까지 꼼꼼하게 점검하며 점 하나를 찍었다 빼기를 반복하고, 공들여 써내려간 달락 하나를 통째로 삭제하거나 표로 재정비하기도 하면서, 더 나은 교과서를 만들기 위해 나는 정성과 열의를 쏟는다.
내가 문장을 다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지만 문서 속 문장들은 다소곳하게 정좌하고는 오직 내 처분만 기다린다. 나는 느긋하게 충분히 생각하며 그 녀석들의 운명을 쥐락펴락할 수 있고, 몇 번이고 내 마음에 들 때까지 글자의 배열이나 내용을 조련한 다음, 비로소 저장 버튼을 누른다.
퇴고는 나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초고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수많은 오류가 눈에 띄고, 조사 하나하나까지 집중하며 다듬고 나면 원고는 산뜻하게 세수를 한 어린아이의 촉촉한 얼굴처럼 해맑고 티 없다. 그렇게 변해 가는 모양이 신기하여 나는 퇴고과정을 더 즐기는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성향 자체가 그러한 듯도 한데, 사람과 관계를 맺고 허무는 과정에서도 나는 완벽을 기하려고 애쓴다. 마치 마음 가는대로 우선 초고를 써 놓고 한 자 한 자 잔뜩 집중하여 바라보는 습성처럼 인간관계 사이에서 빚어지는 때로는 산들바람 같고, 때로는 사나운 맹수의 거친 포효와 같은 감정 정리에도 번번이 오랜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렇듯 무언가를 이해하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사람 관계는 묵묵히 나를 기다려주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가 감정을 정리하는 동안 누군가는 내 곁을 떠났고, 누군가는 지쳤으며, 누군가는 나를 오해하는 날들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미련하리만큼 누군가를 기다렸고, 불합리한 처사에 묵묵하게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포기하는 것들이 있었다.
원고 속의 글자들은 언제까지나 그대로인데, 관계는 실시간이다. 시시각각 그야말로 날 것으로 소멸된다. 내가 잠깐이라도 한 눈을 팔거나 게으름을 피우면 즉각 어떤 방식으로든 반응이 따라오고, 나는 부지런히 핑퐁게임 하듯 어떤 감정을 되돌려줌으로써 관계는 지속된다.
나는 시각장애인이다. 끝까지 보편적이고 싶지만 끈질기게 따라붙는 특수성의 꼬리표! 나의 외모부터 머릿속까지 꼼꼼하게 퇴고하고 싶지만, 그조차 여의치 못한 경우가 많은, 그래서 사는 동안 포기하거나 체념해야 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은 무력한 존재다.
실명(失明)하고 20년을 사는 동안 나는 나를 많이 버렸고, 잊었다. 굳이 목청 높일 일도 없었고, 존중 받을 일도 없었다. 아무래도 좋다고 여기며 그저 숨죽인 채 살았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퇴고의 묘미를 알게 되었고, 문득 내 인생도, 내 마음도 퇴고하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그럴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해도 참 느리다. 감정의 찌꺼기를 털어내는 것도 더디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데도 무척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열었던 마음을 닫는 데엔 더더 많은 시간과 감정을 소모해야 하고, 슬픔이나 억울함을 삭히는 데엔 속절없이 많은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기대한다. 뱅크셔나무처럼 내 인생에도 언젠가는 까맣게 타 버린 몸뚱이 위로 아주 여린 새 잎이 살며시 움트리라는 것을….
개미처럼 느린 걸음걸음이라도 퇴고에 퇴고를 거듭한다면,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완성된 원고처럼 정돈되고 깔끔한 모양의 만족스러운 작품 같은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 자 한 자 정성껏 내 글을 손질하듯 나를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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