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푸른 소나무

2008.04.01 21:20

윤상기 조회 수:725 추천:3

늘 푸른 소나무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윤상기


산행하는 사람에게는 즐거움이 있다. 쉬어가는 고갯마루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불어오는 시원한 솔바람을 잊지 못한다. 솔잎 향을 맡으면 왜 그렇게 마음이 맑아지며 상쾌하고 편안해지는 걸까? 바람은 솔잎의 은은한 향기로 내 마음을 새롭게 한다.

소나무는 언제부터 이 땅에 자라고 있었을까? 아마 수천 년 전부터 이 땅에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은 토종나무가 소나무일 것 같다. 나무는 우리의 생명과 깊은 관계가 있다. 우리 선조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금줄을 치고 솔가지를 매달아 나뿐 기운을 막고자했다. 옛날 우리어머니들은 집안에서 불경스러운 일이 일어날 때, 당산의 큰 노송 밑에 고사 상을 차려놓고 잡귀가 집안에서 물러가기를 두 손 모아 비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어린 시절 보릿고개를 넘길 때도 가난한 사람들은 소나무 껍질[松皮]을 벗겨 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요즘 공해로 찌든 심신에 정화기능이 있다며 솔잎을 섞어 선식을 만들어 먹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어찌 그뿐이랴? 우리들이 즐겨 마시는 솔잎차,  송화주, 백 복령, 송이버섯 등은 우리 식단의 명품들이다.
소나무는 인간이 세상을 이별할 때 관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소나무 신세를 진다는 말이 과히 틀리지 않는다. 자신의 몸통과 껍질, 잎 등으로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있는 나무가 소나무다. 어쩌면 소나무는 우리 인간의 영혼과 함께 하는 나무인지도 모른다.

소나무는 장수의 나무이다. 나이테가 불어날수록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이 소나무다. 사철 푸른 잎이 너풀거리지 않아 좋고 바늘과 같은 침엽은 선비의 도도한 성품을 보는 듯하다.  조선시대 선비의 변하지 않는 지조와 충절의 뜻을 소나무에 비유했다. 사육신 중 한 분인 성삼문의 시조 한 자락이 소나무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때 독야청청 하리라

죽음에 이르러 자기의 생명을 한 그루의 소나무에 비유한 그의 절개가 의연하다 못해 숙연해진다. 또한 속리산 법주사 입구 정이품 소나무도 유명하다. 세조의 어진이 나뭇가지에 걸리자 나무 스스로 가지를 들어 올려 어진이 지나가게 하였다한다. 이에 감명 받은 세조는 나무에게 관직을 하사했다는 일화가 전해져온다. 참으로 인정 받을만한 영특한 나무다.

우리나라 역사를 더듬어 보면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쓰라린 역사만큼이나 굴곡이 많은 나무다. 조선시대부터 강과 길이 닿는 곳의 올곧은 소나무는 모두 베어져 궁궐, 절, 주택 등의 목재로 쓰였다. 산에는 휘어지고 구부러진 소나무만 남았다. 못난 소나무가 고향의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옳은 말인 것 같다.
금강산을 여행할 때였다. 아름드리 미인송들이 골짜기에 가득했다. 모든 나무들이 몸에 큰 상처를 입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송진을 채취하여 연료로 쓰려한 일본 사람들의 만행이었다. 칼집 난 나무는 나라 잃은 민족의 아픔을 간직한 수난의 문신을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해방 후 땔감부족으로 산의 나무는 모두 베어져 아궁이 속으로 들어갔다. 이제야 많은 사람들이 소나무의 귀중한 가치를 알고 보존하려고 힘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가슴에 와 닿는다. 현대의 조경에서 공원이나 정원에 소나무가 심어지지 않으면 한국적인 운치와 멋이 없다.

소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지난겨울 갑작스런 폭설과 바람으로 소나무가지가 부러져 축 늘어진 모습이 측은했다. 전방에서 초병으로 근무할 때였다. 큰 눈이 오는 밤이면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온 산을 울렸다. ‘부드득 꽝,’ 나무의 비명소리가 내 가슴을 아리게 하였다. 그래도 만고풍상을 견디며 늠름하게 바위 위에 서있는 나무를 보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흙 한 줌 없는 바위 위에 서있는 나무는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살까? 척박한 바위틈에 실 같은 뿌리를 길게 내리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며 땅속의 물길을 찾았을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뿌리는 지구를 몇 바퀴 감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인간의 몸속에 퍼져있는 모세혈관 길이도 지구 두 배를 감을 수 있다고 한다. 소나무와 인간의 상관관계가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부분도 있지 않은가?

우뚝 서있는 소나무와 인생여정을 비교해보니 우리의 삶은 너무 초라하다. 나무는 고정된 한 자리에서 수백 년 동안 우리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짧은 생 속에서 탐욕에 어두워 세상의 죄악 속을 넘나들며 헤매고 다녔다. 나무는 인간의 생명을 위해 맑은 공기를 아무 조건 없이 내어준다. 그러나 인간들은 나무가 살 수 없는 오염된 공해를 배출한다. 나무는 인간의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인간은 나무에게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고 있다. 나무는 이러한 우리들의 추한 모습을 묵묵히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나무는 저만큼 살아올 동안 얼마나 울분을 참고 견디었을까. 긴긴 세월을 인내로 견뎌온 나무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제 우리나라 소나무의 운명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소나무 에이즈라는 재선 충병이 전국으로 퍼져 수많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죽어 가고 있다. 또한 지구의 온난화로 50년 후면 우리나라에서 소나무가 사라질 것이라는 설도 있다.
태초에 하나님은 식물과 함께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에덴동산을 만들어 주셨건만, 우리들은 그 자연을 스스로 외면하고 환경을 파괴하며 살아왔다. 우리나라에 소나무가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가장 한국적인 멋을 내며 민족혼을 자아내는 소나무가 없다면 우리나라 산들은 슬픔으로 가득할 것이다. 호수에 비친 석양의 산 그림자는 천근만근이나 되는 돌덩어리처럼 내 가슴을  짓누르는 듯하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내려오는 호젓한 산모퉁이에서 잘생긴 노송을 만났다. 수많은 연륜을 거친 나무의 표피는 상처투성이였다. 나는 그의 몸통을 어루만지며 나무와 함께 할 수 없는 세상은 모두 내 탓이라는 걸 깨달았다. 푸른 솔이 잠시 머물다 떠나는 산 사람의 뒷모습을 슬픈 얼굴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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