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고향, 봉하마을을 찾아보니

2008.05.10 13:51

임두환 조회 수:719 추천:5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 봉하마을을 찾아보니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목요반 임두환

  
행촌수필문학회는 해마다 봄가을 두 차례씩 문학기행을 간다. 이번 봄철문학기행은 노무현 대통령 생가(生家)가 있는 봉하마을로 정하고선 4월 26일, 김학 교수님을 비롯하여 최준강 회장님과 32명의 문우들은 아침 일찍 전주를 출발하였다. 매스컴에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방궁 노무현 타운이 궁금했고, 고향사람들과 소박하게 지내는 전임 대통령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고향으로 참 잘 오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신 대통령님을 환영합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노무현 전임 대통령의 귀향을 환영하는 수많은 현수막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임시주차장에는 관광버스와 승용차가 즐비했고, 마을 골목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찾아온 관광객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제16대 노무현 대통령을 탄생시킨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의 풍경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1946년 8월 6일(음력) 농부인 노판석 씨와 어머니 이순례 여사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1973년도 같은 마을의 권양숙 여사와 결혼한 뒤, 1978년 변호사개업 때까지 이 마을에서 살았다고 한다.

대통령 자리에 있을 때는 그토록 인기가 없던 대통령이었는데, 고향으로 돌아온 노무현 전임 대통령을 만나려고 평일엔 3,000여명, 주말엔 배가 넘는 관광객들이 몰려든다고 하였다. 고향에 내려온 지 두 달 남짓, 30여만 명이 다녀갔다는데 찾아오는 이들은 갈수록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으니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일행이 점심을 먹은 ‘이열치열 옛날양푼이 동태찌개 식당’ 임응택 사장의 안내를 받아 노무현대통령 생가를 찾았다. 7세 때까지 살았다는 생가는 작은방 2개와 부엌이 있는 3칸 슬레이트 벽돌집이었다. 초라하긴 했지만 방문객들에게 이곳의 모든 것들은 진귀했다. 흙, 돌, 물 등은 최고 인기품목이라고 하였다.
방문객 중 어떤 이들은 주변의 돌멩이와 흙을 비닐주머니에 담아가기도 하고, 물을 떠가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 사저는 봉화산 기슭에 지상 1층, 지하 1층으로 세 채가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전임 대통령의 사저(私邸)라고 하기엔 오히려 초라해 보였다. 경호원과 비서진들의 사택은 물론이요, 주변경관을 조성하는 것은 필수조건이 아니겠는가? 어떤 신문은 봉하마을에 495억 원의 혈세를 들여 아방궁 노무현 타운을 만들어 놓았다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보도했었다. 이번에 이곳을 들러보니 그 신문보도가 얼마나 터무니없이 과장된 보도였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노무현 타운의 진실은 이제 서서히 오해가 벗겨지는 듯싶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창초등학교, 진영중학교, 부산상업고등하교를 졸업했다.  사법시험에 세 번째 실패한 뒤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으나, 1978년 5월 사표를 내고 변호사개업을 했다. 그런 뒤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정치에 입문하여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90년에는 여야3당합당을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해 버렸다. 14대, 16대 총선에서는 낙선하였고, 이어서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도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전임 김대중 대통령 임기동안 해양수산부장관을 역임한 뒤,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2004년 3월 국회로부터 대한민국 최초로 탄핵소추를 당하여 대통령 권한이 정지되었고, 같은 해 5월 탄핵안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돼,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던 대통령이었다.  

“대통령 님, 나와 주세요!”
마을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세 번을 외치면 카우보이모자를 쓴 노무현대통령이 손을 흔들며 나온다고 했다. 밥 먹다 말고도 나오고, 차 마시다 말고도 나온다고 했다. 오후에 만날 예정시간이 3시라고 해서, 우리 일행은 봉화산(140m)에 올랐다.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사자바위, 정토사 약수터, 비스듬히 누워있는 마애불상이 이채로웠다. 등산을 마치고 대통령사저 입구에 이르니 오후 2시였다. 그 골목에는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때였다.  함성이 들려서 고개를 돌려보니 대통령사저 쪽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카우보이모자를 쓴 채, 손을 흔들며 경호원들과 함께 언덕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순수한 점퍼차림에 만면에 웃음을 띠고 걸어오는 그 모습이 영락없는 농촌 이장님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가까이 다가오자, 인파는 요동을 쳤다. ‘대통령님!’ ‘아저씨!’ ‘오빠!’ ‘멋쟁이!’ 제멋대로 환호하고 손을 흔들며 열광하였다.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저 노무현입니다. 제가 보고 싶어서 이렇게 오셨습니까? 제가 언덕을 내려가서 여러분들과 손도 잡고 대화를 나누고, 사진도 찍고 싶지만, 많은 인파 때문에 경호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니 양해를 해주세요.”
하면서 카우보이모자를 벗어 흔들자, 여기저기서 환호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누군가가 물었다.
“네, 저는 요즈음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정치에 대해서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당분간, 고향에서 할 일이 많아서 오랫동안 머물 생각입니다.”
“왜, 권양숙 여사는 함께 나오지 않으셨습니까?”
“사실, 요즈음 기분이 그렇답니다. 여러분 앞에 나랑 같이 서 있으면 모두들 노무현에게만 관심이 있지, 자기는 들러리라면서 토라져 있는 것 같습니다.”
여유까지 보이며 이렇게 조크도 하였다. 가끔 어디서 왔느냐, 어느 단체에서 왔느냐며 관심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농촌 이장님 같은 순수한 그 모습을 보니 내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마주볼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나로서는 영원히 잊지 못할 행운이었다.

나는 ‘노빠’도 아니고 ‘노사모 회원’도 아니다. 오히려 재직시절, 그를 욕할 때가 더 많았던 사람이다. 거르지 않은 잦은 말실수와 대통령으로서의 우유부단함이 탈이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이명박 대통령도 입빠른 소리에서는 전임 노무현 대통령과 닮은꼴이다.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였다. 국민들은 도덕성을 저버리고 ‘경제메시아’라는 이명박을 선택했다. 노무현 정부의 실정에 실망했던 대다수 민중이 이명박  정부를 출현시켰던 것이다. 선거당시 내걸었던 ‘연 7%성장’ ‘4만 달러, 국민 성공시대’라는 캐치프레이즈는 모든 국민을 장밋빛 희망에 들뜨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전례 없는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경제성장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며, 뜬구름 같은 환상과 기대를 한껏 높여 놓은 것이 부메랑이 됐는지도 모른다.    

고향으로 돌아온 노무현 전임대통령은 솔직히 멋져 보였다. 또 봉하마을 주민이나 국민들로부터 크게 환영을 받고 있기도 하다. 전임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깨끗한 정치문화를 이루고자 야당과 씨름을 하기도 했고, 언론개혁을 하려고 콧대 높은 몇몇 일간지와 싸우기도 했었다.
얼마나 어려웠으면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말까지 했을까? 난국을 헤쳐 나가는 일은 혼자 힘으로는 해낼 수 없다. 대부분의 전직 대통령들이 퇴임 뒤에도 권력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헛되이 용을 쓰는 모습만 보아온 게 우리들이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물러난 뒤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가 서민들과 함께 숨쉬며 쓰레기를 줍고, 지역사회를 위해 땀 흘리는 동네 이장 같은 소탈한 그 전직 대통령에게 마음껏 기쁨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 2008. 4. 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