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그 언니를 잊으랴(3)

2008.07.23 18:55

정원정 조회 수:780 추천:10

어찌 그 언니를 잊으랴 (3)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정원정



과수원 대문 밖 신작로에 트럭 두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언니의 신접살이 가구와 혼수품이 잔뜩 싣고 차는 떠났다. 물자가 귀한 일제말기일망정 부잣집은 달랐다. 차에 실려 간 언니의 혼수 옷은 뒷날 언니가 다 못 입었을 것이다. 혼인날을 앞두고 하루 동안 두 차례,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다림질한 그 옷을 차곡차곡 담아 보냈을 터인데 그 많은 옷을 언제 다 입었겠는가. 훨씬 뒤에 생모시 적삼 하나를 내가 얻어 입은 적이 있는데 기막히게 바느질 솜씨가 좋았다. 집안에 침모도 있었지만 혼수품만은 서울 일류 바느질집에서 맞춘 것이었다.

언니가 전주로 시집간 그해 초겨울, 기별이 왔다. 친정 부엌아주머니와 함께 오라는 것이었다. 그 아주머니와 나, 또 여학생 한 사람 등 셋이 언니 집에 가게 되었다. 그 여학생은 언니의 고종사촌 동생이었다. 초등학교 때 공부성적은 부진했지만 전주에서 여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하필이면 가는 날, 눈이 펑펑 내리고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그때는 교통편이 하루에 전주에 갈 수가 없어서 정읍여관에서 묵게 되었다. 나보다 한 살 아래인 그 여학생은 속옷도 따습게 입고 검은 코트까지 입은 데다 몸도 비대했다. 가난한 나는 윗옷은커녕 당목에 검정 물감을 들인 바지와 카키색 물감을 들인 상의, 그것도 내가 손바느질로 재봉틀에서 만든 것처럼 똑 같이 만든 홑옷인 국민복이었다. 물론 속에는 뭔가 입었겠지만, 그 애는 눈치도 없이 남학생까지 만나 천지가 하얀 정읍천변을 걷겠다며 한사코 나에게 동행하자는 것이었다. 얼마나 추웠으면 내가 아래윗니를 부닥치며 오들오들 떨었겠는가.

다음 날 언니 집에 도착했다. 형부가 전주 전매청 공의(公醫)로 있었기 때문에 관사에 살고 있었다. 관사는 일본식 주택이었다. 언니는 아랫목에 쪼그리고 앉아서 우리를 맞았다. 입덧이 심해서 아주머니를 오라고 한 것인데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 보였다.
이튿날 형부는 나를 데리고 예수병원으로 갔다. 16세 시골 아이인 나는 졸랑졸랑 형부 뒤를 따라 난생 처음으로 병원에 들어섰다. 간호견습생으로 간 것이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반겨 맞아주었다. 형부의 친구인 듯싶었다. 나는 그 의사를 보는 순간 어리둥절해 버렸다. 윤기 자르르한 귀공자풍의 인상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그 병원의 의사와 약사들은 어찌나 민첩하고 세련되어 보였던지 그들 앞에서 나는 어리뜩하기만 했다. 시골과는 사뭇 다른 공간에서 한동안 어쩔 바를 몰랐다.

그때가 태평양전쟁 중이었다. 그 병원을 운영하던 선교사들은 떠나고 한국인 의학박사 두 분이 원장으로 있었다. 그때 정신대를 피해 여러 지방에서 처녀들이 간호견습생으로 와 있었다. 다섯 사람이었다. 하는 일은 낮에는 청소하고 주사기 소독하고,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는 옆에서 거들고 심부름을 했다. 차츰 피하주사 놓는 법도 익혔다. 또 밤에는 공부를 했다. 경상도 출신의 독신의사가 원내에 기숙하고 있어서 우리에게 의학상식에 대한 강의를 해 주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엄마 품에서 살다 병원 청소를 하자니 처음엔 누가 보는 것 같아 왜 그리도 창피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드문 일이긴 했지만 환자들 중에 남자의 아랫도리를 소독해야 할 때는 난감하였다. 또 옆방에서 죽은 사람을 뉘어 놓고 식구들이 곡할 때는 귀를 막고 싶었다. 슬픔을 넘어 무섭고 사위스러웠다. 주변이 다 잠든 조용한 밤중에 전등불만 희미하게 비치는 복도를 지나 화장실에 다녀 올 적엔 그 방문 앞에 이르면 죽은 자가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혼자 이기고 견디며 벋서야만했다.

해 저무는 저녁 무렵 창밖 저만치 먼 곳을 바라보고 있으면 찬 공기가 꽁꽁 맴도는 산기슭의 인가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언저리에 잠기는 게 보였다. 집 생각에 비감이 밀려와 몇 날 며칠을 울었는지 모른다. 가슴이 미어지게 슬프고 쓸쓸했다. 주말엔 형부가 두어 차례 찾아 왔었다. 내가 안 잊혀서 찾아 주었을 것이다. 형부가 온 날은 주변이 밝았다. 훤칠한 키에 능준하게 잘 생긴 형부가 성품마저 따뜻하고 넉넉했기 때문이다. 형부가 돌아가고 나면 동료들은 나를 부러워했었다. 그 뒤로는 주말에 내가 언니 집을 찾았다. 그럴 때면 소담스런 더운밥을 먹이고 돌아 올 땐 인력거를 태워 보내 주었다. 그 시절은 인력거가 지금 택시 구실을 했지만 웬만하면 다 걸어 다녔다.

하루는 언니가 내게 책 한 권을 건네주면서 형부가 공부했던 책이니 잘 보고 돌려달고 했다. 푸른 일본어 <생리학계론>이었다. 의학계 쪽으로 진로를 정하고 우선 독학으로 기초를 열심히 해 보라고 했다. 형부의 도움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책 내용은 전문 서적이라 딱딱한 술어(術語)들이어서 생소했지만 열심히 공부하면 되겠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틈틈이 읽었다. 그해 겨울은 그렇게 깊어 갔다.

음력 정월, 아버지의 기일을 맞아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오는 길이었다. 버스 안에서 큰 형부를 만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차가 고장 났다. 그 시절은 차가 고장 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승객들은 차에서 내리고 형부와 나도 찬바람이 스치는 길섶에 서서 차의 수리가 끝날 때까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내가 병원에서 간호견습생으로 있다는 것을 알고 형부는 아예 작정하고 나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요지는 이렇다. ‘간호원은 남자들이 그냥 놓아두지 않는다.’ ‘열이면 열 다 나쁜 길로 빠진다.’ ‘양반 집안에서 처제가 간호원 생활하면 집안이 우세스럽다.’ ‘자기 집에 와서 살림 배워서 좋은 데로 결혼하는 길이 옳다.’ 어차피 우리 집은 가난하지만 자기 집은 잘 사니까. 그렇게 구구하게 능수능란한 언설로 설득을 하다가 내가 숙어 들지 않자, 형부는 마지막으로 ‘처갓집에서 그런 망신스러운 일이 벌어질 터이니 언니와 이혼할 수밖에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아이들이 다섯이나 되는데 이혼할 리도 없지만, 나는 유창한 협박에 못 이겨 며칠 뒤 미욱하게도 형부의 의도대로 형부 집으로 들어갔다. 형부는 사교성이 능한 사람이었다. 시골에 살면서도 활동무대는 서울이었다. 나이가 훨씬 아래인 시골뜨기 열여섯 살짜리 처제 하나 설득을 못했겠는가. 거기에서 내 앞 길의 판도는 허망하게 어긋나버렸다.

(2008.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