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김상권
2012.04.19 08:14
자리
꽃밭정이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김상권
논에서 ‘피’를 뽑은 적이 있다. 60여 년 전 초등학교 때 일이다. 지금은 옛일이 되었지만 그땐 왜 그리도 ‘피’가 많았는지. ‘피’는 언뜻 보기에 벼와 비슷하면서 포기에 붙어 있어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세 번 김을 매면서 뽑고, 네 번째 만도리를 하면서 뽑지만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벼 이삭이 팰 때가 되어서야 쉽게 눈에 띈다. 이 고랑 저 고랑을 다니며 ‘피’를 뽑았다. ‘피’는 자기 의지는 아니지만 자리를 잘못 잡은 탓에 뽑힐 수밖에 없었다.
학생 수는 적은데 유난히 정원이 넓은 학교의 교장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정원은 감나무, 모과나무, 소나무 등, 여러 종류의 나무와 잔디로 잘 가꾸어져 있었다. 잔디가 녹색으로 변할 무렵이면, 토끼풀과 잡초가 시샘이라도 하듯 군데군데 나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뾰족한 호미로 토끼풀을 솎아냈다. 없어졌다싶었는데 다음 해에 다시 돋아났다. 이번에는 괭이로 뽑아냈으나 여전히 다시 돋아났다. 3년째 되는 해는 토끼풀을 완전히 없앨 작정으로 삽을 사용하여 아예 땅을 뒤엎었다. 곱던 잔디공원은 온통 곰보 투성이로 변해 버렸다. 토끼풀이 애물단지였다.
토끼풀은 원래 이 땅의 주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원이 만들어지면서 잔디에 밀려 터전을 잃게 된 셈이다. 나중에 뛰어든 잔디가 주인 노릇을 하자, 토기풀이 제자리를 찾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의 터전을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잡초취급을 받게 되니, 어디에 하소연한단 말인가.
토끼풀만 자라는 곳에 잔디가 나면 잔디가 잡초가 되고, 잔디밭에 토끼풀이 나면 토끼풀이 잡초가 된다. 만일 들깨 밭에 참깨가 자라면 참깨는 잡초가 되고, 반대로 참깨 밭에 들깨가 난다면 들깨는 잡초가 된다. 또 우리의 식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벼, 보리, 밀 등이 꽃밭의 한 가운데에서 자란다면, 아무리 식생활의 근본이 된다 해도 잡초에 불과할 것이다. 이처럼 나지 말아야 할 자리에 나면 잡초가 되고 만다.
어제는 아파트 앞 화단에 해바라기 씨앗을 뿌렸다. 우선 화단의 잡초를 뽑아내고 흙을 골랐다. 때를 놓친 바람에 잡초가 많이 자라 뽑아내는데 힘들었다. 나로 말미암아 그들은 졸지에 터전을 잃게 되었다. 내가 뽑지 않더라도 아파트 관리인에게 뽑혔을 것이다. 자리를 잘못 잡은 탓이다. 어떻든 자리가 그들의 생사(生死)를 가름한 셈이다.
천변(川邊)에는 가꾸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이 무성하다. 이 풀들은 땅이 파이는 것을 막아주고, 물의 흐름을 조절해주며, 물을 정화시키기도 한다. 그러기에 이들을 잡초라 하지 않고 야초(野草)라 부른다. 숲이나 언덕, 둑에 자라는 풀도 마찬가지다. 자리를 잘 잡은 덕이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이들이 농경지에 자란다면, 바로 잡초신세가 되고 만다. 내가 태어난 자리에 따라 잡초가 되기도 하고 야초가 되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리가 있기 마련이다. 태어난 자리, 자란 자리, 지금 살고 있는 자리, 일하는 자리가 그것이다. 인간이 자리가 없다면 이 세상에 없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우리는 어찌 보면 자리 때문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학생들에게 “왜, 학교에 다니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매우 궁금하다. 어떤 학생은 자아실현을 위해서라고 대답하겠지만 그것은 겉포장일 뿐 시실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학교에 다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일자리가 삶의 중심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작업의 종류는 얼마나 될까? 선진국에는 3만 5천여 종류가 있고, 우리나라에는 1만 4천여 개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직업의 종류가 다양한데도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를테면 대학교를 졸업고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는 젊은이가 있는가 하면, 하루의 일자리라도 알아보려고 인력공사를 찾는 노동자, 심지어 잠자리가 없어 노숙하는 사람도 있다. 일자리가 없으면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살아가야만 한다. 그래서 요즘의 화두는 일자리창출이 아닌가.
일자리 가운데 임시직도 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같은 선출직, 장관이나 정부산하단체장 들의 임명직이 그들이다. 그들은 그 자리에 있는 동안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할 의무가 있다. 그들이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할 때, 국가는 발전하고 국민은 행복하다. 그런데 그 자리를 이용해서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임시직을 최대한 악용한 것으로서 국민의 원성을 사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리를 잘못 잡은 사람들이다.
자리도 자리 나름이다. 길바닥에 있는 돌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지만, 건축자재로 쓰일 땐 필요한 돌이 된다. 이처럼 뻗어야할 자리가 아닌데 다리를 뻗는 사람이 있다면, 이건 자리를 잘못 잡은 것이다. 또 나설 자리가 아닌데 나서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가 있을 자리에 있어야지 있을 자리가 아닌데 있으면 잡초신세가 되고 만다. 논의 ‘피’나, 잔디의 토끼풀, 화단의 풀처럼 말이다. 누구나 꼭 필요한 자리에 있을 때, 주목을 받고 빛을 발하지 않겠는가. 모든 것은 제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할 때 가장 아름다울 것이다. 지금 나를 바라보자. 내 자리가 어디이고 그 자리에서 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2012. 3. 15.)
꽃밭정이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김상권
논에서 ‘피’를 뽑은 적이 있다. 60여 년 전 초등학교 때 일이다. 지금은 옛일이 되었지만 그땐 왜 그리도 ‘피’가 많았는지. ‘피’는 언뜻 보기에 벼와 비슷하면서 포기에 붙어 있어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세 번 김을 매면서 뽑고, 네 번째 만도리를 하면서 뽑지만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벼 이삭이 팰 때가 되어서야 쉽게 눈에 띈다. 이 고랑 저 고랑을 다니며 ‘피’를 뽑았다. ‘피’는 자기 의지는 아니지만 자리를 잘못 잡은 탓에 뽑힐 수밖에 없었다.
학생 수는 적은데 유난히 정원이 넓은 학교의 교장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정원은 감나무, 모과나무, 소나무 등, 여러 종류의 나무와 잔디로 잘 가꾸어져 있었다. 잔디가 녹색으로 변할 무렵이면, 토끼풀과 잡초가 시샘이라도 하듯 군데군데 나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뾰족한 호미로 토끼풀을 솎아냈다. 없어졌다싶었는데 다음 해에 다시 돋아났다. 이번에는 괭이로 뽑아냈으나 여전히 다시 돋아났다. 3년째 되는 해는 토끼풀을 완전히 없앨 작정으로 삽을 사용하여 아예 땅을 뒤엎었다. 곱던 잔디공원은 온통 곰보 투성이로 변해 버렸다. 토끼풀이 애물단지였다.
토끼풀은 원래 이 땅의 주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원이 만들어지면서 잔디에 밀려 터전을 잃게 된 셈이다. 나중에 뛰어든 잔디가 주인 노릇을 하자, 토기풀이 제자리를 찾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의 터전을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잡초취급을 받게 되니, 어디에 하소연한단 말인가.
토끼풀만 자라는 곳에 잔디가 나면 잔디가 잡초가 되고, 잔디밭에 토끼풀이 나면 토끼풀이 잡초가 된다. 만일 들깨 밭에 참깨가 자라면 참깨는 잡초가 되고, 반대로 참깨 밭에 들깨가 난다면 들깨는 잡초가 된다. 또 우리의 식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벼, 보리, 밀 등이 꽃밭의 한 가운데에서 자란다면, 아무리 식생활의 근본이 된다 해도 잡초에 불과할 것이다. 이처럼 나지 말아야 할 자리에 나면 잡초가 되고 만다.
어제는 아파트 앞 화단에 해바라기 씨앗을 뿌렸다. 우선 화단의 잡초를 뽑아내고 흙을 골랐다. 때를 놓친 바람에 잡초가 많이 자라 뽑아내는데 힘들었다. 나로 말미암아 그들은 졸지에 터전을 잃게 되었다. 내가 뽑지 않더라도 아파트 관리인에게 뽑혔을 것이다. 자리를 잘못 잡은 탓이다. 어떻든 자리가 그들의 생사(生死)를 가름한 셈이다.
천변(川邊)에는 가꾸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이 무성하다. 이 풀들은 땅이 파이는 것을 막아주고, 물의 흐름을 조절해주며, 물을 정화시키기도 한다. 그러기에 이들을 잡초라 하지 않고 야초(野草)라 부른다. 숲이나 언덕, 둑에 자라는 풀도 마찬가지다. 자리를 잘 잡은 덕이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이들이 농경지에 자란다면, 바로 잡초신세가 되고 만다. 내가 태어난 자리에 따라 잡초가 되기도 하고 야초가 되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리가 있기 마련이다. 태어난 자리, 자란 자리, 지금 살고 있는 자리, 일하는 자리가 그것이다. 인간이 자리가 없다면 이 세상에 없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우리는 어찌 보면 자리 때문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학생들에게 “왜, 학교에 다니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매우 궁금하다. 어떤 학생은 자아실현을 위해서라고 대답하겠지만 그것은 겉포장일 뿐 시실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학교에 다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일자리가 삶의 중심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작업의 종류는 얼마나 될까? 선진국에는 3만 5천여 종류가 있고, 우리나라에는 1만 4천여 개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직업의 종류가 다양한데도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를테면 대학교를 졸업고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는 젊은이가 있는가 하면, 하루의 일자리라도 알아보려고 인력공사를 찾는 노동자, 심지어 잠자리가 없어 노숙하는 사람도 있다. 일자리가 없으면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살아가야만 한다. 그래서 요즘의 화두는 일자리창출이 아닌가.
일자리 가운데 임시직도 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같은 선출직, 장관이나 정부산하단체장 들의 임명직이 그들이다. 그들은 그 자리에 있는 동안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할 의무가 있다. 그들이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할 때, 국가는 발전하고 국민은 행복하다. 그런데 그 자리를 이용해서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임시직을 최대한 악용한 것으로서 국민의 원성을 사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리를 잘못 잡은 사람들이다.
자리도 자리 나름이다. 길바닥에 있는 돌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지만, 건축자재로 쓰일 땐 필요한 돌이 된다. 이처럼 뻗어야할 자리가 아닌데 다리를 뻗는 사람이 있다면, 이건 자리를 잘못 잡은 것이다. 또 나설 자리가 아닌데 나서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가 있을 자리에 있어야지 있을 자리가 아닌데 있으면 잡초신세가 되고 만다. 논의 ‘피’나, 잔디의 토끼풀, 화단의 풀처럼 말이다. 누구나 꼭 필요한 자리에 있을 때, 주목을 받고 빛을 발하지 않겠는가. 모든 것은 제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할 때 가장 아름다울 것이다. 지금 나를 바라보자. 내 자리가 어디이고 그 자리에서 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2012. 3.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