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세월의 스승 권태을 선생님께
이 승 하
(시인·중앙대 교수)
권태을 선생님께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72년 3월이었습니다. 김천 성의중학교에 제가 입학한 해가 1972년이었으니까요. 선생님은 그때 그 학교와 김천 성의상업고등학교 국어선생님으로 계셨습니다. 교사생활을 시작한 지 몇 해 되지 않는 30대 초반의 교사는 지금 정년퇴임을 앞두고 계시고, 저는 4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33년…… 지금부터 기나긴 세월의 '만남'에 대해 제 기억을 더듬어 나가겠습니다.
3년 동안 선생님께서는 저희 반 담임을 한 번도 맡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옆 반 친구들을 무척 부러워했는데, 당연히 선생님 담임반의 학생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책읽기를 즐겨했기에 국어과목을 좋아했었고, 국어선생님을 마음속으로 따랐던 것이었지요. 게다가 대구에서 발행되는 어떤 신문에 소설이 당선된 작가라고 하니(훗날 읽어본 그 소설은 제목이 '신농씨'였습니다) 제 존경심은 하늘을 찌를 듯했지요.
제 친구들은 거의 모든 선생님을 업신여겨, 별명을 붙여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선생님들은 대체로 지나치게 엄격했고 때로는 폭력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제자 사랑을 자식 사랑에 못지 않게 하셨습니다. 제 기억이 분명하다면 옆 반은 열등반이었습니다. 우등반은 따로 없었지만 학업 능력이 조금 떨어지는 아이들만 모인 반의 담임을 선생님이 맡고 계셨고, 선생님은 그 아이들의 실력을 조금이라도 올리기 위해 방과후에 국어 아닌 다른 과목을 몇 시간씩 가르치는 열의를 보이셨지요.
저희들 모두는 선생님이 학생들의 실력 향상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계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들 각자를 인격적으로, 인간적으로 대해주셨으니까요. 그래서 저희는 선생님한테만은 '아, 그 미친개 말이지' 하는 식으로 별명을 붙여 호칭하지 않고 반드시 '권태을 선생님'으로만 불렀습니다. 주먹께나 쓰는 깡패 똘마니 같은 친구들도 반드시 그렇게만 불렀습니다. 그 호칭 속에는 선생님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제자를 편애하는 선생님을 특히 미워했었는데, 선생님은 제자들 모두에게 공평히 관심을 갖고, 공평히 애정을 베푸셨습니다. 전교에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있었습니다. 저였지요. (이것은 저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을 따라 백일장 여는 데를 따라다니게 되었습니다. 입상할 때도 있었고 가작 하나도 안 걸릴 때도 있었지만 김천 시내 백일장은 물론 멀리 경주까지 가서 백일장을 치르고 오곤 했습니다. 백일장을 앞두고 문예반 학생들에게 작품 쓰기의 요령을 가르치실 때 예로 드는 작품이 저의 말도 안 되는 글이었으니, 선생님의 저에 대한 편애는 도가 좀 지나쳤습니다.
1972년 가을쯤이었을까요, 선생님은 어느 날 저한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승하야, 작품이 되면 언제라도 갖고 오너라. 교무실의 내 자리 알고 있지? 내가 수업 들어가서 없더라도 작품을 책상 위에 놓고 가면 내가 보고서 너한테 전해주도록 하마."
저는 선생님의 칭찬을 받을 욕심으로 시며 산문이며 독후감이며 두세 편 쓰게 되면 곧바로 선생님께 갖다드렸습니다. 2학년이 되면서 원고를 묶어 아예 문집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淸湖文集'이라는 제호를 붙였지요. 며칠 후 수업시간에 되돌려 받는 작품의 끄트머리에는 꼭 선생님의 첨삭지도가 있었습니다. 붉은 잉크를 넣은 만년필로 선생님은 고칠 점을 지적하셨고 좋은 점이 있을 때는 칭찬해주셨습니다.
그 3년 동안 저는 선생님 덕분에 가슴 벅찬 나날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다른 반에 들어가셔서 제 작품을 종종 낭독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딴 반 친구들한테 "승하 너는 좋겠다. 권태을 선생님이 널 그렇게 좋아하시니까."라는, 부러움 섞인 말을 듣곤 했습니다. 교무실에서도 여러 선생님들 앞에서 저의 신통치 않은 문재와 꾸준한 습작에 대해 칭찬을 몇 번이나 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저는 정말 신바람이 났습니다.
선생님은 저희 반 수업을 하러 들어오시면 꼭 제 자리에 와 머리를 한번 쓰다듬으며, "승하야, 잘해!" 하고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공부를 잘하라는 말씀이 아니었고, 글을 계속해서 열심히 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전폭적인 신뢰와 사랑……. 아니, 제가 쓴 글이 영 신통치 않으면 빨간 글씨로 호된 꾸지람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정신이 번쩍 들곤 했었지요. 선생님 댁에 찾아가서 사모님께 인사도 드렸고, 롱펠로의 {에반젤린}과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책을 빌려 읽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여간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1학년 1학기 때는 공부를 잘해 학기말에 전교 3등을 했습니다. 그래서 2학기 등록금 전액을 면제받았는데 웬걸, 날이 갈수록 성적이 떨어져 갔습니다. '문학병'이란 데 걸려버렸는데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이 눈에 들어왔겠습니까. 중3이 되었을 때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는 몇 주 동안 학교에 나가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문학인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격려와 질책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그마한 재질을 크게 보시고는 줄기차게 채찍질해주셔서 오늘의 제가 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사실 중학교 3년 내내 자살을 생각하며 보낸 어린 염세주의자였습니다. 걸어서 40분 거리에 있는 학교로 가는 길에 다리가 하나 나옵니다. 다리 양켠의 인도도 좁고 양차선 차도도 좁다란 다리였습니다. 저는 그 다리를 건널 때마다 달려오는 버스에 달려들어 죽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했습니다만 저를 인정해주시는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자살로 내 생을 끝내지는 말자'고 마음을 추스르곤 했습니다.
저는 김천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정확히 두 달 동안 다녔습니다. 4월 말에 서울로 가출을 감행하면서 부모님 앞으로 써놓고 간 긴 편지는 유서였고, "지난 3년 동안 자살을 할까 말까 망설이지 않았던 날이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란 문구를 써놓았던 것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이런 편지를 부모님 앞으로 남긴 이유에 대해서는 선생님께 따로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대충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어쨌거나 1975년 8월에 행해진 대입자격검정고시에는 전과목 합격을 했으나 고교생이 아닌 이상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집에서는 속된 표현으로 '내놓은 자식'이 되어 있었고, 앞날은 오리무중의 상태가 되어 저는 낙심천만, 불면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에 그해 연말에 고교 중퇴와 검정고시 합격 등의 소식을 적어 연하장을 보내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해 정월 초하루에 저한테 이런 편지를 써 보내주셨습니다.
지난해는 네 인생에 전기가 마련된 해였다. 절망 없는 노력과 예지의 힘이라 믿자. 너는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으로 올려놓을 유일한 사람이 될 긍지로 노력해주기 바란다. 새해에는 더욱 겸허한 자세로, 더욱 노력하는 사람으로 열심히 살기 바란다. 승하야,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병진 새날, 권태을.
아아, 정말 눈물겨운 편지 내용이었습니다. 낙심해 있을 제자에게 선생님은 여전히, 전폭적인 신뢰와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짧은 편지는 절망의 나락에 빠진 저를 건져 올려주는 튼튼한 삼끈이었습니다. 물론, 세계문학 운운이 용기를 주기 위해 하신 말씀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만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만 저를 그래도 인정해주는 분이 계시다는 것은 크나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저는 마음을 다잡고 입시공부를 했습니다. 학원에도 가지 않고 혼자서 공부를 해(경제적인 이유와 불면증과 대인공포증 같은 신경성 질환 때문이었습니다. 가출도 세 번을 더 했고, 부산·대구·춘천 등지를 떠돌기도 했습니다.) 경북대와 경희대에 응시를 해 떨어졌고, 3번째 예비고사를 쳐서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이때도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일인 양 기뻐하셨습니다. 제가 대학 2학년 때 대학문학상에 시로 당선되고 4학년 때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을 때도 이 세상에서 가장 기뻐하신 분은 선생님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 학교에 적을 두신 상태에서 대구를 오가며 대학원 공부를 하셨고, 박사학위까지 받으셨습니다. 중학교에서 상주대학교로 직장을 옮기신 이후 선생님의 학문 연구는 절차탁마의 표본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의 한학 연구는 제가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할 정도로 넓고 깊었습니다. 박사학위 논문 {息山 李萬敷 文學硏究}와 상주 지방의 한문학을 집대성한 {尙州漢文學} 및 공저 {공검지} {갑장산} 등을 받고서야 선생님의 문학정신을 뒤늦게 깨닫고 배웠습니다. 선생님은 석사과정 시절, 조동일 선생 밑에서 공부를 하셨는데 제가 선생님의 사랑을 받고 자란 것처럼 선생님 역시 조동일 선생의 사랑을 받아서 학문적 넓이와 깊이를 지닐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1972년부터 74년까지 3년 동안만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어도 늘 '권태을 선생님의 제자로서'라는 말을 화두처럼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선생님이 제 자리에 오셔서 까까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그 손길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번에 정년퇴임을 하시지만 선생님의 학문 연구가 이 시점에서 끝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에 대한 믿음과 사랑 또한 계속되리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크신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글쓰고 후학들을 가르치겠습니다.
권태을 선생님!
정년퇴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내내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04년 9월
제자 이승하 삼가 올림.
이 승 하
(시인·중앙대 교수)
권태을 선생님께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72년 3월이었습니다. 김천 성의중학교에 제가 입학한 해가 1972년이었으니까요. 선생님은 그때 그 학교와 김천 성의상업고등학교 국어선생님으로 계셨습니다. 교사생활을 시작한 지 몇 해 되지 않는 30대 초반의 교사는 지금 정년퇴임을 앞두고 계시고, 저는 4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33년…… 지금부터 기나긴 세월의 '만남'에 대해 제 기억을 더듬어 나가겠습니다.
3년 동안 선생님께서는 저희 반 담임을 한 번도 맡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옆 반 친구들을 무척 부러워했는데, 당연히 선생님 담임반의 학생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책읽기를 즐겨했기에 국어과목을 좋아했었고, 국어선생님을 마음속으로 따랐던 것이었지요. 게다가 대구에서 발행되는 어떤 신문에 소설이 당선된 작가라고 하니(훗날 읽어본 그 소설은 제목이 '신농씨'였습니다) 제 존경심은 하늘을 찌를 듯했지요.
제 친구들은 거의 모든 선생님을 업신여겨, 별명을 붙여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선생님들은 대체로 지나치게 엄격했고 때로는 폭력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제자 사랑을 자식 사랑에 못지 않게 하셨습니다. 제 기억이 분명하다면 옆 반은 열등반이었습니다. 우등반은 따로 없었지만 학업 능력이 조금 떨어지는 아이들만 모인 반의 담임을 선생님이 맡고 계셨고, 선생님은 그 아이들의 실력을 조금이라도 올리기 위해 방과후에 국어 아닌 다른 과목을 몇 시간씩 가르치는 열의를 보이셨지요.
저희들 모두는 선생님이 학생들의 실력 향상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계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들 각자를 인격적으로, 인간적으로 대해주셨으니까요. 그래서 저희는 선생님한테만은 '아, 그 미친개 말이지' 하는 식으로 별명을 붙여 호칭하지 않고 반드시 '권태을 선생님'으로만 불렀습니다. 주먹께나 쓰는 깡패 똘마니 같은 친구들도 반드시 그렇게만 불렀습니다. 그 호칭 속에는 선생님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제자를 편애하는 선생님을 특히 미워했었는데, 선생님은 제자들 모두에게 공평히 관심을 갖고, 공평히 애정을 베푸셨습니다. 전교에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있었습니다. 저였지요. (이것은 저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을 따라 백일장 여는 데를 따라다니게 되었습니다. 입상할 때도 있었고 가작 하나도 안 걸릴 때도 있었지만 김천 시내 백일장은 물론 멀리 경주까지 가서 백일장을 치르고 오곤 했습니다. 백일장을 앞두고 문예반 학생들에게 작품 쓰기의 요령을 가르치실 때 예로 드는 작품이 저의 말도 안 되는 글이었으니, 선생님의 저에 대한 편애는 도가 좀 지나쳤습니다.
1972년 가을쯤이었을까요, 선생님은 어느 날 저한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승하야, 작품이 되면 언제라도 갖고 오너라. 교무실의 내 자리 알고 있지? 내가 수업 들어가서 없더라도 작품을 책상 위에 놓고 가면 내가 보고서 너한테 전해주도록 하마."
저는 선생님의 칭찬을 받을 욕심으로 시며 산문이며 독후감이며 두세 편 쓰게 되면 곧바로 선생님께 갖다드렸습니다. 2학년이 되면서 원고를 묶어 아예 문집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淸湖文集'이라는 제호를 붙였지요. 며칠 후 수업시간에 되돌려 받는 작품의 끄트머리에는 꼭 선생님의 첨삭지도가 있었습니다. 붉은 잉크를 넣은 만년필로 선생님은 고칠 점을 지적하셨고 좋은 점이 있을 때는 칭찬해주셨습니다.
그 3년 동안 저는 선생님 덕분에 가슴 벅찬 나날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다른 반에 들어가셔서 제 작품을 종종 낭독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딴 반 친구들한테 "승하 너는 좋겠다. 권태을 선생님이 널 그렇게 좋아하시니까."라는, 부러움 섞인 말을 듣곤 했습니다. 교무실에서도 여러 선생님들 앞에서 저의 신통치 않은 문재와 꾸준한 습작에 대해 칭찬을 몇 번이나 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저는 정말 신바람이 났습니다.
선생님은 저희 반 수업을 하러 들어오시면 꼭 제 자리에 와 머리를 한번 쓰다듬으며, "승하야, 잘해!" 하고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공부를 잘하라는 말씀이 아니었고, 글을 계속해서 열심히 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전폭적인 신뢰와 사랑……. 아니, 제가 쓴 글이 영 신통치 않으면 빨간 글씨로 호된 꾸지람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정신이 번쩍 들곤 했었지요. 선생님 댁에 찾아가서 사모님께 인사도 드렸고, 롱펠로의 {에반젤린}과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책을 빌려 읽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여간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1학년 1학기 때는 공부를 잘해 학기말에 전교 3등을 했습니다. 그래서 2학기 등록금 전액을 면제받았는데 웬걸, 날이 갈수록 성적이 떨어져 갔습니다. '문학병'이란 데 걸려버렸는데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이 눈에 들어왔겠습니까. 중3이 되었을 때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는 몇 주 동안 학교에 나가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문학인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격려와 질책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그마한 재질을 크게 보시고는 줄기차게 채찍질해주셔서 오늘의 제가 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사실 중학교 3년 내내 자살을 생각하며 보낸 어린 염세주의자였습니다. 걸어서 40분 거리에 있는 학교로 가는 길에 다리가 하나 나옵니다. 다리 양켠의 인도도 좁고 양차선 차도도 좁다란 다리였습니다. 저는 그 다리를 건널 때마다 달려오는 버스에 달려들어 죽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했습니다만 저를 인정해주시는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자살로 내 생을 끝내지는 말자'고 마음을 추스르곤 했습니다.
저는 김천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정확히 두 달 동안 다녔습니다. 4월 말에 서울로 가출을 감행하면서 부모님 앞으로 써놓고 간 긴 편지는 유서였고, "지난 3년 동안 자살을 할까 말까 망설이지 않았던 날이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란 문구를 써놓았던 것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이런 편지를 부모님 앞으로 남긴 이유에 대해서는 선생님께 따로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대충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어쨌거나 1975년 8월에 행해진 대입자격검정고시에는 전과목 합격을 했으나 고교생이 아닌 이상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집에서는 속된 표현으로 '내놓은 자식'이 되어 있었고, 앞날은 오리무중의 상태가 되어 저는 낙심천만, 불면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에 그해 연말에 고교 중퇴와 검정고시 합격 등의 소식을 적어 연하장을 보내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해 정월 초하루에 저한테 이런 편지를 써 보내주셨습니다.
지난해는 네 인생에 전기가 마련된 해였다. 절망 없는 노력과 예지의 힘이라 믿자. 너는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으로 올려놓을 유일한 사람이 될 긍지로 노력해주기 바란다. 새해에는 더욱 겸허한 자세로, 더욱 노력하는 사람으로 열심히 살기 바란다. 승하야,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병진 새날, 권태을.
아아, 정말 눈물겨운 편지 내용이었습니다. 낙심해 있을 제자에게 선생님은 여전히, 전폭적인 신뢰와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짧은 편지는 절망의 나락에 빠진 저를 건져 올려주는 튼튼한 삼끈이었습니다. 물론, 세계문학 운운이 용기를 주기 위해 하신 말씀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만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만 저를 그래도 인정해주는 분이 계시다는 것은 크나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저는 마음을 다잡고 입시공부를 했습니다. 학원에도 가지 않고 혼자서 공부를 해(경제적인 이유와 불면증과 대인공포증 같은 신경성 질환 때문이었습니다. 가출도 세 번을 더 했고, 부산·대구·춘천 등지를 떠돌기도 했습니다.) 경북대와 경희대에 응시를 해 떨어졌고, 3번째 예비고사를 쳐서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이때도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일인 양 기뻐하셨습니다. 제가 대학 2학년 때 대학문학상에 시로 당선되고 4학년 때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을 때도 이 세상에서 가장 기뻐하신 분은 선생님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 학교에 적을 두신 상태에서 대구를 오가며 대학원 공부를 하셨고, 박사학위까지 받으셨습니다. 중학교에서 상주대학교로 직장을 옮기신 이후 선생님의 학문 연구는 절차탁마의 표본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의 한학 연구는 제가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할 정도로 넓고 깊었습니다. 박사학위 논문 {息山 李萬敷 文學硏究}와 상주 지방의 한문학을 집대성한 {尙州漢文學} 및 공저 {공검지} {갑장산} 등을 받고서야 선생님의 문학정신을 뒤늦게 깨닫고 배웠습니다. 선생님은 석사과정 시절, 조동일 선생 밑에서 공부를 하셨는데 제가 선생님의 사랑을 받고 자란 것처럼 선생님 역시 조동일 선생의 사랑을 받아서 학문적 넓이와 깊이를 지닐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1972년부터 74년까지 3년 동안만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어도 늘 '권태을 선생님의 제자로서'라는 말을 화두처럼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선생님이 제 자리에 오셔서 까까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그 손길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번에 정년퇴임을 하시지만 선생님의 학문 연구가 이 시점에서 끝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에 대한 믿음과 사랑 또한 계속되리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크신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글쓰고 후학들을 가르치겠습니다.
권태을 선생님!
정년퇴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내내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04년 9월
제자 이승하 삼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