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박사 사진 작은40%.jpg

 맨 앞줄 왼편에 흰옷 입은 분이 보건사회부 결핵고뮨관 유진 로우 박사님과 오른 쪽 검은바지 입고 계신 고 최돈원 박사님/이정민 씨가 보내온 사진

 

이정민 씨가족 줄인것.JPEG

  V 자 모양을 한 분이 이정민 씨 오른 쪽 뒤에 않으신 분이 이정민 씨 어머니 (고 최돈원 박사 따님)/

                                       이정민 씨가 보내온 사진

 

 

인연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김수영

 

   문단에 등단한 지도 어언 17년이 되었다시집 2 권과 수필집 2권과 영문 수필집 1권을 출간했다독자들이 인터넷을 통하여 작가의 작품을 접할 때가 많다며칠 전에  독자가 재미 수필가협회  사이트에 실린 나의 수필을 읽고 댓글을 달아 놓았다 내용인  다음과 같다.

   “안녕하세요저는  최돈원 할아버지의 외손녀인 이정민이라고 합니다처음 인사드립니다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구굴링 하던 중에 우연히 작성하신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너무 짧은 인생을 살다 가신 할아버지에 대해 상상해  때마다 정보가 너무 부족해서 항상 갈증이 있었는데이렇게 귀중한  덕분에 처음으로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정말 감사드립니다바쁘시겠지만 혹시 한국에 계신다면괜찮으시다면 저희 부모님과 함께  한번 뵙고 감사의 인사를 직접 드리고 싶습니다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메일은 ………….@gmail.com  입니다! “

  

   그러니까 63  일이다당시 나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과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수속을 밟고 있었다. 5명의 교수의 추천서가 필요해 피천득 교수님장왕록 교수님정병조 교수님스코필드 박사님사범대학 학장님이시고 영문학자이던 이종수 교수님  추천서를 받아 제출했다얾마 후컬럼비아 대학에서 입학 합격 통지서를 받고는 뛸듯이 기뻤다.

   당시에는 유학을 가려면 신체검사가 필수 조건이었다대학에서는 합격통지서를 받았지만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결과가 나왔다너무나 놀라 아연실색하지 않을  없었다의사의 진단서에는  내가 폐결핵을 앓고 있다고 적혀있었다 23 곱디고운 젊은 나이에 청천벽력과 같은 사형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당시 동생 김영교 시인은 먼저 미국에 유학와서 컬럼비아 대학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고 대한민국학술원 원장이셨던 오라버니도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계셨다.

   나는 모든 꿈이 무너진 현실에 좌절과 슬픔 속에서도   오라버니 소개로 인천 송도 적십자 결핵 요양소에 입원하게 됐다입원하기  제일 먼저  사실을 알렸던 스코필드 박사님은 기도와 함께 성경책과 기독교 책을   주시면서 위로해 주셨다정말 힘겨운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시라고 믿고  기도했다.

   전심전력 투병 생활  결과 완치가 되어 퇴원하게 되었다나는 다시 미국유학을 도전하고 싶었지만 주치의가 재발 위험이 있으니 유학은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했다고등학교 이급 영어 정교사 자격증을 갖고 있었지만교편생활도 백목가루가 폐에 절대적으로 해롭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주치의가 반대했다.

   결핵을 앓았던 터라 결핵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보건사회부에서 WHO (세계보건기구결핵 고문관 이었던 유진 로우 박사(Dr. Eugine Low) 비서로 일하게 되었다.

   보건사회부 장관 명의로영문으로 나가는 모든 영문 서류는 내가 작성해 다시 장관의 결재를 받아 외국으로 발송하였다그리고 로우 박사의 영문편지도 타이핑해서 세계보건기구로 발송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

    당시 방역과장으로 계셨던 최돈원 박사는 나에게 잊을  없는  은인이였다.

이분이 바로 나의 수필에 댓글을 달아  이정민씨의 외할아버지이다재미 수필가협회 웹사이트에 실린 나의 수필은 ‘아름다운 야망이었다. ‘아름다운 야망’ 수필 속에 실린  박사에 관한 내용을 돼새겨 본다.

“…..보사부 방역과장이던 최 박사는  오라버니 친구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보사부에 의무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그는  영어 실력이 대단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나를 동생처럼 사랑해 주었다나는 오라버니처럼 그를 따르고 존경했다그는  슈바이처 박사가 위대한 인물이라며 그를 존경하고 그의 삶에 감동 한다고 말했다친구 의사들은 졸업  대개 개업을 하거나 학교에 남았지만 최 박사는 박봉의 월급쟁이 공무원의 길을 택했다그는  미국 케네디 대통령을 많이 닮아 나는 닥터 케네디 별명을 지어 주었다      

그러던 어는 날 콜레라가 창궐했고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확산했다최 박사는 콜레라 발생지역인 마산에 내려가 최일선에서 방역 대책을 진두지휘하면서 뜬눈으로 밤을 며칠 계속 지새우다 과로로 그만 쓰러졌다쓰러지면서 각혈하다가 핏덩어리가 기도를 막아 숨이 막혀 그만 질식사하고 말았다평상시 아주 건강하게 보였던 그가 아무도 모르게 지병(폐결핵)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분이 돌아가신 뒤에야 모두가 알게 되었다.      자기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일했던 그의 소식에 주위 사람들은 감동해 눈시울을 적셨다젊디젊은 삼 십대 초반의 나이에 요절해 슬픔은 더 컸다나는 Dr. 최의 죽음을 통하여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했다삶을 비관하고 꿈을 잃었던 내가  허물을 벗으면서 서서히 탈바꿈하고 있었다병을 비관만하고 자학만 해 왔던 나와 달리 최 박사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국민의 건강을 위해 일하다가 순직했다우리  사람은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각각 정반대의 명암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슬픔 속에 머무르던 나는 마치 개구리가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기지개를 켜며 인생의 새봄을 맞이할 수가 있었다최 박사가 돌아가신  나는 내가 입원했던 송도에 있는 적십자 결핵 요양소를 다시 찾아갔다봄철이라 만발한 철쭉꽃이 나를 반기는  함박웃음으로 활짝 피어서 하늘을 향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저녁노을이 빨갛게 하늘과 바다를 물들이면서 최 박사의 못다  청춘의 꿈이 그곳에서 활짝  꽃으로 눈부시게 피어 오르는 듯 했다. “

   63년 전에 만났던 최 박사의 후손 외손녀 이정민씨가 외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인터넷을 통하여 찾다가 내 수필을 읽고 할아버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입수했다며 나에게 댓글을 달아준 사실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기적이었다.

   이정민 씨 온 가족이 나를 꼭 만나고 싶다며 고맙다는 말을 연거푸 했다나는 너무나 반가워 내년에 한국에 나가 만나기로 했다만나면 최 박사 생각에 감회가 북받쳐 엉엉 울 것 같다./중앙일보 문예마당/2025년 5월 23일

                     

  아래 사진은 이정민 씨가 보내온 사진이다/왼쪽 최돈원 박사와 오른쪽 김대규오라버니/1958년도에 찍은 사진이다

최돈원 박사와 기매규 오빠사진.jpeg

 

 

****참고로 이정민 씨가 보내온 답장이다

안녕하세요, 갑작스럽게 연락드렸는데 이렇게 반갑게 회신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는 고 최돈원 할아버님의 외손녀 이정민이며, 저 역시도 10년간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들어와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38살으로 손녀처럼 편하게 정민이라고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아마 기억하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저희 할아버님은 11녀를 두셨고 모두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저희 할머니도 연세가 있으시지만 건강하게 잘 계십니다.

말씀주셨듯 할아버님이 너무 젊었을 때 작고하셔서 저희 어머니와 외삼촌 역시 너무 어렸고, 할아버님을 추억할 자료 조차 많지 않아서 항상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특히 왠지 저에겐 할아버님이 너무 막연하고 먼 존재같았지만 항상 궁금하고 그리운 존재로 남아있습니다.

익히 들은 할아버님의 업적 외에, 짧았지만 어떤 삶을 사셨는지, 어떤 사람이셨을지 궁금해했었고, 작고하신 시기가 벌써 60년 전도 더 되었으니, 인터넷에 남은 자료가 많이 없을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실낱같은 희망으로 찾아보던 끝에 작가님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믿을 수가 없었고, 가족들과 쿵쿵 뛰는 가슴으로 작가님께서 적어주신 글 한 글자 한 글자 소중하게 읽고 또 읽었습니다. 너무나 귀중한 우연이기에 설마 하는 마음으로 작가님께 글을 남겼는데 이렇게 회신주시어 정말 행복한 마음입니다.

저희 할아버님의 절친한 벗이었던 대한결핵협회 소속이셨던 김대규 할아버님을 아시는지요? (돌아가신지 몇년 되셨습니다만 저희는 어쩌다가 서울의 같은 아파트에 살게 되어서 몇 번 인사드린 적이 있고 항상 할아버님에 대해 따뜻한 기억을 떠올리며 웃어주셨던 기억이 가득합니다)

우연하게 인터넷에서 서치하다가 김대규 할아버님께서 작성하신 대한결핵사의 글을 찾았고, 그 글에서 Eugene Low 박사님의 흔적도 찾았습니다. 중국계 캐나다인이셨고, 할아버님과 같이 근무했다는 사실과 강릉의료원 정원에 할아버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송덕비에서도 Eugene Low 박사님의 성함을 찾았습니다. 작가님께서  Low박사님과 함께 일하셨다니 저의 막연한 상상들이 하나하나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아 정말 가슴이 뛰고 행복합니다

할아버님 사진 중 제가 생각하는 Eugene Low 박사님과 함께 나오신 사진 첨부하여 드립니다. 어쩌면 이 사진이 찍히는 순간을 기억하실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즐거운 과거를 회상하시는 사진 한 장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서부쪽에 계시는 것 같은데 제가 갈 일이 생기면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한국에 오시는 일이 생기시면 부디 꼭 연락주시고 인사드릴 기회를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부디 건강 조심하시고, 항상 즐거운 일들만 가득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꼭 꼭 직접 뵙고 인사드리는 날이 조만간 오길 정말 기도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정민 드림 

이정민 2 번째 편지/2025 5 25

안녕하세요. 요즘 회사 일이 너무 바빠 회신이 늦어진 점 정말 죄송합니다.
소식 전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미주중앙일보에 실린 목사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저희 온 가족이 함께 돌려보며 읽었고, 할머님께도 전해드렸습니다.
모두가 따뜻한 마음으로 감동했고, 언젠가 꼭 목사님을 직접 찾아뵙고 감사 인사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님과의 인연은 아직도 믿기지 않을 만큼 특별하고, 인생에서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평소에 글쓰는 것을 참 좋아하는데, 언젠가 저희 할아버지와 목사님, 그리고 저희 가족 사이의 이 인연을 언젠가 시나리오든 어떤 형태든 꼭 써서 세상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돌아가신 지 63년이 지난 지금, 목사님 덕분에 최돈원 할아버지의 성함이 다시 매체를 통해 언급된 상황을 보며, 할아버지께서도 먼 곳에서 흐뭇하게 지켜보고 계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디 건강 잘 챙기시어 내년에는 꼭 한국에 오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한국에 오시게 되면 편안히 고국을 둘러보실 수 있도록, 일정이 확정되는 대로 저희 가족도 최대한 준비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정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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