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버지 부음을 전해 들었다.
‘전해’듣다니 참 기막힌 일도 다 있다.
6.25 전쟁이 나자 우리가족은 피난 가다가 갓난 동생 때문에 서울로 되돌아 왔다.
아버지가 기도서와 묵주를 천장을 뚫고 넣자마자 인민군들이 들이닥쳤다.
대학교수였던 부친과 몇 마디 나누던 장교는 거수경례하고 돌아갔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뵌 것은 붉은 완장을 두른 학생들이 대학관사로 몰려와 모셔(?)갔을 때였다.
“다녀 올께” 마실 가듯 떠나셨다. 결국 동생은 아버지 고향에서 홍역으로
죽었다.
어린 나는 집안 어른들 앞에서 아버지가 가르쳐준 “사랑하는 나의 고향을/ 한번 떠나온 후에/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내 맘속에 사무처...를 부르다가 앙-하고 울어 버려 눈물 바다를 만들었다.
아버지는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 지청천장군의 광복군에서 참모로
지냈다.
해방되면서 중국정부와 교섭하여 배를 빌려 독립군들을 귀향시키던 중,
당신 어머니가 생각나자 마지막 배를 타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4남 2녀 중 막내였다. 김일성 대학 도서관장이라는 풍문, 실낱같은 통일에 대한 기대,
지척인 북에 살아 계실 아버지를 기다리며 어머니는 지금까지 혼자 사셨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다음 우리 가족은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 아버지 대학동창들과 제자들을 처음 만났다. 평범한 아버지가
아님을 원망하던 내게 그분들은 거목 아버지 면모를 알려 주었다.
납북자
가족도 색안경으로 보던 때, 우리 남매의 결혼 청첩인이 되시고
아버지 대학동문
화환도 보내셨다. 때마다 도움들을 주셨다.
친구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내게 각인 시켜주신 분들이다.
중학교 교지에 실린 내 글 제목은 ‘나의 아버지’, 등단 글제도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미국에 와서는 여러 경로로 아버지 소식을 알아보았지만 지금까지도 답이 없었다.
그동안 명절 때면 아버지를 위해 생미사를 드려야할지 연미사를 드려야할지 망설여왔다.
놀라운 사실은 미국에는 나처럼 전쟁통에 아버지와 생이별한 한인들이 많다는 점이다.
부모와의 추억을 나누는
프로그램에서는 같은 조 모두가 그랬다.
그날 우리들은 오랜 세월 참았던 눈물을 한꺼번에 쏟았다.
눈물이 치유가 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일전에 미주 독립운동 유적지 조사차 왔던
보훈처 연구원은 그 시대 인물은 거의 돌아가셨지만 아버지 사진이라도 보내달라고 했다.
이제 와서 그런 확인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미적이다가 돌아가신 소식을 접한 것이다.
10년 전, 아버지가 재직하시던 대학총장을 지낸 분이 정부 고위직이 되어
이 지역을 방문했다. 혹시나 해서 함자를 댔더니 그는 깜짝 놀라면서 거기 모인 총영사와 여러분에게
부친이 동양 최고의 경제학자였으며 북에서
데려 오라는 명단에 있던 분이라고 소개해서 나를 놀래 켰다.
그날 밤 뜬눈으로 새웠다. 너무 평범한 아들인 내가 아버지의 정신적 유산을 감내할 수 없어서였다.
이번에도 그분이 아버지 부음을 알려왔다.
북을 방문했을 때 수소문 해보니 아버지는 그 대학에서 물러나신 후 조용히 지내다 돌아가신 것으로 알려주더라는 것이다.
돌아 가셨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슬프다 어쩌다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았다.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손을 비벼 대다가 세차를 시작했다. 그리고 하늘을 보았다.
어디선가 아버지도 보시겠지 하면서 가끔씩 바라보던 그
하늘이다.
아버지와 공유하던 공기도 이제는 아니다. 그런 생각이드니 큰
나무에서 뚝 떨어지는 느낌이다.
가슴 저 밑에서 커다란 덩어리가 울컥
치밀어 오르면서 봇물 터지듯 눈물이 났다.
한참을 쭈그리고 있다가 아들집엘 갔다. 두 살 손녀가 문을 열더니 배시시 웃는다.
네 살 손자가 달려와 덥석 안기자 손녀도 안아달라고 강중 강중 뛰었다. 두 놈을 함께 안았다.
손자에게 돌아가신 제 외할아버지가 어디계시냐고 물었더니 작은 가슴을 콩콩 치면서
“in my heart!”, 다시 하늘을 가리키
면서 “in the heaven!” 그랬다는 말이 생각이 났다.
그렇다. 아이들 가슴과 내 가슴이 닿은 자리에 아버지 숨결이 있었다.
이제 오랜 방황을 접고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신 것이다.
그나마 사후 영혼으로나마 모실 수 있는
‘풍운의 아버지’였다. 다행스런 일이다.
기사 글 : 2009.10.15 / 샌프란시스코 중앙일보 / 이재상(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