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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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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유성호교수) … 유봉희 제3시집 [잠깐 시간의 발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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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와 기억을 통한 근원 탐구의 시학
 유봉희의 시세계


                             - 해설 … 유성호 (문학평론가 · 한양대 교수)


1. 현실과 꿈의 접점에서 피워올리는 시

유봉희 신작 시집 『잠깐 시간의 발을 보았다』(황금알, 2012)는,
깊이 있는 감각과 사유를 통해 시인 자신의 삶과 언어를 개진해
보여준 심미적 결실이다.

시인으로서는 2002년 『문학과 창작』 신인상 수상 이후 10년 만에,
그리고 『소금화석』(2003)과 『몇 만 년의 걸음』(2006) 이후 6년 만에 펴내는 세번째 시집이다.

그동안 유봉희 시인은 주목할 만한 감각과 사유로, 그리고 모어(母語,
mother tongue)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천착으로, 자신만의 시적 진경(眞境)을 꾸준히 개척해왔다. 40년 이국 생활 동안 무뎌질 수도 있는 모국어에 대한 감각을 그녀는 여전히 갈끔하고 단정하고 아름답게 견지하고 있는데, 바로 그 언어 감각을 통해 개개 시편마다 매우 균질적인 시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이번 시집 「시인의 말」에서도 그녀는 “작은 것들과 눈 맞추며/ 오래 무릎을 접고/ 앉아”서 “그들이 들려준 낮은 소리가/ 어떤 마음”에 가 닿기를 소망한다고, 그리고 “먼 능선의 서늘한 눈빛” 과 “예사롭지 않던 저녁 바람결에/ 들려오던 그 소리” 를 따라 자신만의 길을 다시 떠나노라고 말하고 있다. 그 마음과 눈빛과 소리가 그녀 시편의 심원한 내질(內質)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듯이, 모든 서정시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우리가
꾸는 꿈 사이에서 착상되고 씌워진다. 따라서 현실이나 꿈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칠 때, 그것은 인간의 복합적 감각과 사유를 불구적으로 반영한 것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우수한 서정시는 우리의 현실을 순간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꿈의 세계를
상상적으로 마련하여, 현실과 꿈의 접점을 풍요롭게 언표하게 마련
이다. 우리는 그 꿈이야말로 우리 삶 곳곳에 배인 폐허의 기운을 치유하고 새로운 상상력을 추구하게 하는 필연적 형질이 되어준다고 믿는 것이다.

이번 유봉희 시집의 성취는 이러한 현실과 꿈의 접점을 통해,
그리고 그것을 우주적으로 확산해가는 활달한 상상력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가능케 한 어떤 근원을 탐구하는 고전적
태도를 통해 줄곧 나타나고 있다. 그 세계를 한번 깊이 들여다 보자.


2. 자기 회귀와 은유 원리

유봉희 시인이 착목하는 시적 대상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익숙한 자연 사물들이 많다. 이러한 자연 사물과의 오랜 접속과 소통을 통해 그녀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존재 전환을 적극 도모한다.
그리고 일상적이고 물리적인 현실을 벗어나 전혀 다른 곳으로 이동
하려는 꿈을 꾼다. 이때 이루어지는 시적 경험은, 자연 사물로 시선을 한껏 옮겼다가 다시 궁극적 자기 발견으로 회귀하는 과정을 통해 한결같이 이루어진다. 시인은 이러한 사물 발견과 자기 회귀 그리고 궁극적 자기 발견을 차례대로 치러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편을 읽어보자.

억수로 비 쏟던 엊그제
어느 누가 어떤 마음으로
이 언덕 모퉁이를 걸어갔을까요.
물 고인 발자국 안에 내려앉은 하늘
작은 웅덩이에 동그만 하늘
구름도 산드르 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작은 호숫가에서
그만 가던 길을 놓아 버렸습니다.

나도 일상을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호수 하나 만들고 싶습니다.
붙일 곳 없는 어떤 쓸쓸한 마음에게
혹은 적적한 당신에게
작은 발자국 호수로 놓여
지질린 낮에 잠깐 옹크리고 앉으면
어쩌다가는 물방개 한 마리 건너오고
바람 부는 밤, 별 소나기 쏟아질 때는
아기별들 소근소근 놀다가
별바래기 하나 가만히 놓고 가는 호수
― 「발자국 호수」 전문


시인의 시선은 폭우가 쏟아지던 날 누군가 언덕 모퉁이를 걸어가고 난 후 남겨진 발자국에 머문다. 그 사람의 마음이 머물러 있을 빗물 고인 발자국은 시인에게 하늘이 내려앉은 작은 호수로 다가온다. 빗물 고인 작은 웅덩이에 동그만 하늘과 구름이 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세상에서 제일 작은” 호수 앞에서 가던 길을 놓아버린 시인은 자신도 호수 하나를 만들고 싶어한다. 일상을 살다가 문득 마주치게 될, 쓸쓸하고도 적적한 마음들이 머물게 될 작은 ‘발자국 호수’ 말이다. 그 ‘발자국 호수’ 안에는, 마치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自畵像) 에서 우물 안에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듯이, 물방개가 건너오고 바람이 불고 별이 쏟아지고 아기별들이 놀다 별바래기 하나 놓고 가는 풍경들이 하나하나 상상적으로 이어진다.
무심하게 지나칠 법한 작은 발자국 속에 비친 하늘과 구름을 발견한 시인은 이렇게 우주적으로 화창(和唱)하는 상상의 파문을 그려나가고, ‘발자국 호수’에 일렁이는 심미적 파문은 유봉희 시 전편의 문양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음 시편도 ‘비’와 관련되어 있다.

밤바다에 비, 비 내린다.
천길 빙하 바다, 여객선 갑판 위로
밤비 날아든다.
차갑고 따갑게 얼굴에 맺히는 빗방울들
조그만 연체동물로 손등을 기어가는 빗방울들
먼 들판을 달려서 첩첩 산길을 넘어왔을 그들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먼 인연들인가
이제는 머뭇거리며 악수를 청해야 하는 인연들인가

다시 밤바다로 끝없이 뛰어내리는 빗방울들
눈 밖으로 멀어지는 것은 그냥 사라지는 것인지
머리를 들어 뱃머리를 보니
흘러내리는 불빛 줄기 속에서
밤비가 반짝 반짝 은빛 날개를 편다.
날개를 서로 부비며 무리를 지어
겹겹이 쌓인 어둠의 나이테를 벗긴다.
우리 지나온 길 또한 저러했겠지

내일 아침 몇 사람은
지중지중 배 난간에 기대어서
바다에 떨어진 그 은빛 날개 조각을 볼 수 있을는지
― 「밤비의 날개」 전문


이 시편은 사물에 대한 뛰어난 묘사와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치환하는 시인의 예리한 시선을 잘 보여준다. 바다 위 여객선으로 밤비가 내린다. “천길 빙하”와 “첩첩 산길”을 건너온 빗방울들은 얼굴에 맺히기도 하고 연체동물처럼 손등을 기어가기도 한다. 이러한 물질적 접촉을 통해 시인은 빗방울들이 “어떤 먼 인연들”이자 “머뭇거리며 악수를 청해야 하는 인연들”로 다가옴을 느낀다. 밤바다로 끝없이 뛰어내리며 사라져가는 빗방울들을 바라보면서, 불빛 줄기와 섞여 반짝거리는 밤비의 “은빛 날개”를 바라본다. 어느새 빗방울들은 날개를 서로 부비며 자신들의 “겹겹이 쌓인 어둠의 나이테”를 벗기고, 시인은 어둠의 나이테를 벗기며 은빛 날개로 살아온 세월을 스스럼없이 고백한다. 그렇게 바다에 떨어진 빗방울들의 은빛 날개 조각은 시인 자신의 삶의 흔적으로 몸을 바꾼다. 시인으로서는 자연 사물로 시선을 한껏 옮겼다가 다시 궁극적 자기 발견으로 회귀하는 과정을 다시 한 번 보여준 것이다. 이처럼 유봉희 시인은 “어떤 이의 울먹임이/어떤 이의 고단한 쓸쓸함이/조금씩 넘치고 얼어서/결빙의 무늬” ( 하이든을 연주하는 새벽 달 )를 이루고 있는 사물들을 향해 한껏 나아갔다가 결국 자신에게로 귀환하는 상상적 과정을 한결같이 보여준다. 이러한 서정시의 자기 회귀성은 사물의 발견과 함께 그것을 자신의 삶과 등가적 원리로 결합하는 은유적 속성을 곧잘 구현한다. 사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주체의 자기 표현에 원용하는 은유 원리는 서정시의 자기 회귀성에 적극 이바지한다. 주체의 시선으로 사물의 고유성을 발견하고 그 응시의 힘으로 자신의 삶의 태도를 다시금 성찰하는 은유 원리는 그 점에서 유봉희 시학을 감싸고 있는 양도할 수 없는 기율이 되고 있는 것이다. 유봉희 시인은 바로 그 응시의 힘으로 사물들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시적 상상의 과정을 치러내고 있는 것이다.


3. 시간에 대한 경험과 해석

표제가 암시하듯이 유봉희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지나온 시간의 깊은 심연을 성찰하려는 의지를 적극 드러낸다. 그래서 그녀에게 ‘시간’은 매우 중요한 시적 대상이 된다. 사실 시간은 시적 대상이기에 앞서 시적 후경(後景)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시를 감싸는 물리적 조건일 때가 많다. 하지만 유봉희 시인은 시간의 움직임을 통해 생의 ‘다른 목소리(the other voice)’를 들으면서 자신만의 존재 전환을 상상하고 실천하려 한다. 그 목소리를 통해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과 성찰의 이중적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편을 읽어보자.

길게 다리 뻗은 능선
저 아래는 실눈 뜬 바다
바위 위에 앉아 숨을 고르는데
소라와 조개껍질이 바위 등에 총총히 박혀 있다.
화석이 된 송곳니 같은 조그만 몸채가
몇 만 년 전 바다를 악물고 있다.

산의 높이가 바다의 깊이로 떨어지는 이곳
눈 감으면 파도 소리인 듯 바람 소리인 듯
만 년 전 소금기 먹은 바람이
바위산을 휘휘 서늘하게 핥고 있는
산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는 여기에서
문득 걸어가는 시간의 발을 잠시 목격했다.

그 발걸음 소리 듣지 못할지라도
언젠가 누군가는
싱싱한 해초 사이로 물고기 떼의 운무를 보겠지.
지금 개미 한 마리 자기보다 세 배로 큰 먹이를 물고
바위틈을 오르고 있는 여기에서
― 「현장은 왕복여행권을 가졌다」 전문


이 시편은 바다가 바라보이는 산의 가파른 능선을 배경으로 택했다. 아래로 실눈 뜬 바다가 보이는 그 능선에서 시인은 “화석이 된 송곳니”로 몇 만 년 전 바다를 악물고 있는 바위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두 번째 시집 제목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스케일의 시공간이 펼쳐지고 있다. 그렇게 수직 낙하의 감각이 출렁이는 이를테면 “산의 높이가 바다의 깊이로 떨어지는” 곳에서 시인은 “파도 소리인 듯 바람 소리인 듯/만 년 전 소금기 먹은 바람”이 바위산을 훑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산인지 바다인지 구분이 안 되는 아득한 곳에서 시인은 문득 “시간의 발”을 목격한다. 시간이 걷는 발걸음 소리는 비록 들리지 않았지만, 시인은 싱싱한 해초 사이로 물고기 떼의 운무가 밀려오고 개미가 자기보다 몇 배 큰 먹이를 물고 오르는 바위 위에서 잠깐 발을 보여주는 시간을 문득 바라본 것이다. 그리고 오래고 오랜 시간의 흐름을 파도 소리로 바람 소리로 들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어느 순간 듣게 되는 생의 ‘다른 목소리’일 것이다. 이렇게 시원(始原)의 형상이 살아 있는 곳에서, 시인은 자기가 걸어온 시간에 대한 확인과 성찰의 이중적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편도 그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그때 고래가 나타났다.
수평으로 활짝 펴서 천천히 물 속으로 떨어지는 꼬리지느러미
조각조각으로 흐르는 빙하 속을 물레방아 돌리며
고래 한 마리가 침실 발코니 앞으로 오고 있다.
여행객들이 다이닝룸에서 저녁 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
멀리서 안테나를 올렸었는지
모자도 없이 바람에 날리는 한사람을 읽었나 보다.

아득한 시간 넘어 바다로 들어간 그가
가장 크고 오래된 그의 책장을 넘긴다.
이 두근거림을 그냥 침묵이라고 말해버릴 수는 없겠다.
이제 알 것도 같다.
왜 나는 자꾸 바다로만 가고 싶었던지
이제 어두워가는 빙하 위에서
몇 천만 년 만의 해후를
안타까운 10초로 만났다.

그래, 세상 밖에서도 내가 진정으로 만나는 것들은
머리가 아닌 꼬리였었지.
내일 아침 이 배는 항구에 닿고
바다를 떠난 오랜 후에도
고래는 바다를 넘듯 시간을 넘어 나에게 올 것이다.
― 「고래 꼬리」 전문


고래는 꼬리지느러미를 수평으로 펴 천천히 물 속으로 가라앉아 있다가 그 꼬리로 빙하 속을 뚫고 시인의 앞에까지 와 있다. 하루가 기운 배 위에서 고래는 모자도 없이 바람에 날리는 한사람을 읽은 것이다. 그때 시인은 아득한 시간을 넘어 바다로 들어간 그가 넘기는 크고 오랜 책장을 상상한다. 고래와 시인이 ‘침묵’을 통해 한 몸이 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고래’는 시원의 형상이 살아 있는 상상적 존재이자 바다를 유영(遊泳)하며 시인으로 하여금 바다로 가고 싶게 하고 궁극에는 “어두워가는 빙하 위에서/몇 천만 년 만의 해후”를 가능케 한 실물적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게 잠깐 만난 고래를 통해 시인은 자신이 세상 밖에서 만난 것들이 머리가 아닌 ‘꼬리’였다는 것, 그리고 배를 떠난 후에도 고래가 바다를 넘어 시간을 넘어 자신을 찾아올 것을 상상한다. 말할 것도 없이 고래는 오랜 시간을 격절(隔絶)하여 찾아오는 생의 ‘다른 목소리’일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눈감고 세상 앞에 서라고/때로는 눈감고 세상을 보라고/때로는 눈감아주라고” ( 정말 좋은 사진 ) 말해주는 생의 도반(道伴)이기도 할 것이다. 앞으로도 유봉희 시인은 심원한 스케일과 감각으로 고래와 함께, 고래가 되어, 이 거친 바다를 헤쳐 갈 것이다. 우리가 보아왔듯이 유봉희 시인은 시간에 대한 시적 탐구에 매진하고 있다. 그녀가 꿈꾸고 복원하는 ‘시간’은 순결했던 날들을 추억하는 차원에서 시작하여, 가장 근원적인 형상을 한 메타적 시간을 포괄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그렇게 유봉희 시인은 ‘시간’에 대한 새로운 경험과 해석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면서, 직선적이고 분절적인 근대적 시간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차원의 시편을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득하고 깊다.


4. 깊은 기억의 인화

우리가 잘 알듯이, 기억이란 서정시가 구현할 수 있는 시간 예술적 속성을 충족하면서 인간의 깊고 오래된 근원을 유추하게끔 하는 유력한 형질로 기능한다. 대부분의 시간은 시 안에서 기억의 형식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기억은 서정시가 오랫동안 지켜온 기율이기도 하고, 망각된 것들을 재구(再構)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온 시인들의 경험적 방법이기도 하다. 유봉희 시인 역시 자신만의 고유한 기억을 통해 자신을 있게 한 근원적인 것들을 적극 탐구한다. 그렇게 그녀는 기억을 통해 근원적 사유와 감각으로 나아가면서 자신의 현재형을 살피고 있다.

시퍼런 물이 가로 놓여 있었어
꼭 건너가야 하는데 뛰어넘을 수도 없고
돌아가는 길도 보이지 않는데.
죽을힘을 다하여 펄쩍 뛰어보는 수밖에
물가에 닿은 발이 뒤로 넘어가려는, 그 찰나
내 허리를 받쳐서 물가로 올려놓는 손
꿈 속에서도 놀라워 뒤돌아보니
두 손으로 나비 날개를 만들어
내 허리를 받친 엄마 손

다음 생엔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으세요. 물어보면
깊은 산속 나무로 살겠다고 하시던
다시 태어나도 너희들의 엄마가 되고 싶다고
말씀 안 하시던 야속한 당신이
그러시더니
깊은 산속 나무도 안 되시고
내 허리에 나비 손을 만드시는 어머니
― 「어머니의 나비 손」 전문


가족이란 누구에게나 가장 깊은 기억의 뿌리이자, 지나온 시간을 거슬러오를 수 있는 경험적 실재일 것이다. 이때 시간을 거슬러오르는 기억은, 단순하게 과거를 살려내는 행위가 아니라, 지나온 시간들을 원초적 경험의 형식으로 복원하고 동시에 그것을 현재형과 연루하는 적극적 행위가 된다. 시인은 그러한 기억을 통해 자신의 존재론적 기원(origin)을 노래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혜화동에 비가 오네요./이름이 생각 날듯 말듯, 한 책방 앞에서/금방 집 한 채가 켜졌습니다. /우산 속은 오롯한 집 한 채입니다/오색 지붕들이 둥둥 떠내려가는 혜화동 길목/빨간 지붕이 옆집 지붕을 스쳤습니다. /빗방울 몇 개는 후드득 날렸습니다.”( 일기예보를 듣다가 ) 같은 선명하고도 아름다운 기억의 인화 작업이 진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시인은 꿈 속에서, 시퍼런 물이 가로놓여 건너기 어렵고 돌아가는 길도 막혀 있는 곳에 있다. 그 순간 허리를 받쳐 물가로 올려놓는 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비 날개를 만들어 허리를 받쳐주신 엄마의 손이다. 이 꿈 속에서의 해후는 오랜 기억으로 인화되어, 다시 태어나면 “깊은 산속 나무”가 되겠다고 하시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시인은 그 기억 속에서 비록 “다시 태어나도 너희들의 엄마”가 되시겠다고는 하지 않으셨지만, 지금 허리에 나비 손을 만드신 어머니를 새삼 그리움으로 만나는 것이다. 어머니가 주신 “고요의 무게”( 나비가 머문 자리 )가 바로 유봉희 시인의 삶과 언어를 가능케 해준 가장 깊은 수원(水源)이 아니었을까? 그런가 하면 좀 더 스케일을 크게 하여 더 근원적인 존재론적 기원(origin)을 상상하는 시편도 있다.

풀밭에 무르익은 과일이 툭 떨어지듯
그렇게 잠에서 눈뜬 아침
반쯤 눈 감은 채 자연이 부르는 소리 따라가면
귀를 밝게 깨우며 흐르는 물소리
오늘은 문득 그 소리 들판으로 함께 가고 싶어
크고 작은 도시의 마을을 떼어내며
그곳의 묵은 먼지들도 날려 보내며
네다섯 시간 차로 달려
데스밸리 지나며 언덕 어디쯤
시에라 산맥 바라보는 등선 어디쯤
산도 언덕도 멀지 않게 초원에 닿을 때
저녁 어스름 빛이라도 남았으면 좋겠지만
먼 듯 가까운 듯 늑대 우는 소리 들리면
믿을 만한 한 사람 다섯 걸음 앞에
뒤돌아 세울 수 없더라도
숨 한 번 깊게 쉬고, 별 총총 하늘 올려보며
태초의 흙사람 다시 되어 시냇물로 흐르면
사방에서 가만 가만 소리치겠지
반갑다고 고맙다고, 어서 오라고
별똥별도 느낌표(!)로 떨어지겠지
― 「별똥별이 느낌표(!)로 떨어지다」 전문


이 아름다운 작품은 시인이 아침에 자연 사물이 부르는 소리에 화답하면서 씌어진 것이다. 귀를 밝게 깨우며 흐르는 물소리를 따라 시인은 도시의 마을을 떼어내며 “데스밸리 지나며 언덕 어디쯤” 혹은 “시에라 산맥 바라보는 등선 어디쯤”에 가 닿는다. 그렇게 산도 언덕도 멀지 않게 초원에 닿을 때 날은 이미 어둑해져 숨 한 번 깊게 쉬고 별 총총 하늘 올려본다. 그때 시인이 상상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태초의 흙사람”이다. 태초에 흙으로 빚어진 사람의 형상을 회복하는 그 순간, 다시 시냇물도 흐르고 사방에서 반갑다고 고맙다고 어서 오라고 소리치고 궁극에는 별똥별도 느낌표(!)로 떨어지는 환한 장관이 펼쳐진다. 이처럼 시인은 ‘흙사람’이라는 시원의 형상을 상상적으로 구축함으로써, 그렇게 가장 깊은 몸의 기억을 인화함으로써, 우리가 잃어버린 근원적인 기억들을 호소한다. 아름답고 먹먹한 서정이 시편을 자욱하게 물들이고 있다. 원래 서정시는 시간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하는 양식적 특성을 지닌다. 그만큼 서정시는 근원적 기억의 양상을 다루게 되고, 우리는 서정시가 수행하는 기억의 원리를 따라 삶의 근원에 대한 상상적 경험을 치르게 된다. 그 점에서 유봉희 시편들은 그리움을 주조(主潮)로 하는 회귀와 기억의 언어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가장 근원적인 삶의 이치를 경험케 해주는 실례로 깊이 기억될 것이다. 시인은 “그리움은 존재의 시작”( 빅뱅은 그리움이다 )이라고 고백했지만, 사실 거의 모든 시인이 그리움의 운명에 처해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유봉희 시인은 그리움의 정서를 사적(私的) 경험으로부터 근원적 경험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진폭으로 형상화함으로써 개인적 기억의 틀을 넘어선다. 그럼으로써 과거 지향에 머물지 않고 “내일을 다시 포옹해도 될 것 같은 아슴푸레한 예감” ( 인스프레숀 포인트에서 )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5. 모어 탐색을 통한 언어적 자의식

‘언어’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에 주목한 카시러(E. Cassirer)는 “인간은 언어가 형성해주는 현실만 알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어떤 의식도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사물이나 관념도 언어로 구체화되지 않으면 의식 속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만큼 언어는 사물의 질서를 의식 안에 구성하는 불가피한 매개체이고, 시인은 언어를 통해 사물의 질서와 근원적 실재에 가 닿으려는 자의식을 가진 존재이다. 유봉희 시인은 자신의 존재론적 궁극을 모어를 통해 상상하는 모습을 꾸준히 보여준다. 모어에 대한 탐구와 실천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완성하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유봉희 시편들은, 시(詩)가 언어 자체에 대한 예술 양식임을 현저하게 증언한다. 다시 말하면 언어의 도구적 기능을 넘어 언어 자체에 대한 메타적 탐색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 메타성의 정점에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의 모어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명주잠자리 풀 먹인 날개 안에
반짝이는 형광 빛 푸른 별들이 담겨 있다.
하늘거리는 풀잎에서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그 별들은 날개에서 사르르 풀려나와
다시 하늘로 오르려나.
물소리에 젖어 있는 잠자리 심상치 않다.
저 고요한 더듬이가 더듬는 곳은 어디인지

지난날 바닷가나 산기슭 어디라도
모래땅에 절구통 집을 파 놓고
눈 먼 먹이가 빠지기를 무작정 기다리던 긴 날들
넓은 세상 샅샅이 누비며 사냥 한번 못하고
뒷걸음으로 빙빙 돌며 자신의 함정에 자신을 가두던
이름도 별스런 개미귀신 개미지옥

뒤돌아보지 마라.
물 위로 날개를 활짝 편다.
한낮에도 반짝이며 별무리 끌고 가는
별박이명주잠자리
― 「풀치다」 전문


어쩌면 이 시편은, 맺혔던 생각을 돌리어 너그럽게 용서한다는 뜻의 ‘풀치다’라는 아름다운 모어에 대한 헌사일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어휘의 기표에서 시인은 ‘풀’을 연상하고 “명주잠자리
풀 먹인 날개”나 그 안에서 반짝이는 “형광 빛 푸른 별”을 연상한다.
“하늘거리는 풀잎”도 그 친족 계열을 형성한다. 별들은 날개에서 풀려나와 하늘로 오르고, 물소리에 젖은 명주잠자리의 고요한 더듬이는 맺혔던 생각을 푸는 듯하다. 그렇게 물 위로 날개를 활짝 펴면서 별무리를 끌고 가는 반짝이는 명주잠자리에 대한 발견과 묘사의 순간은,
시인에게 가장 활짝 열리는 모어 회복의 순간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모어란 그녀에게 “작아서 더 보듬고 싶은 것”이고 “멀리 보내면 더 가까이 머무는 것”( 명왕성아 )이다. 그러니 “아기 배냇저고리에 보일 듯 말 듯 그려진 얼룩”( 고운 때의 풀이 )처럼 지워지지 않는 가장 근원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온 유봉희 시인
의 세 번째 시집 『잠깐 시간의 발을 보았다』는, 이렇게 다양하고도
아름다운 파문을 그리면서도 하나의 확연한 미학적 구심을 형성하고 있다. 그 다양하고도 아름다운 파문이란 자기 회귀와 은유 원리, 시간에 대한 경험과 해석, 깊은 기억의 인화, 모어 탐색을 통한 언어적
자의식 등으로 나열될 수 있을 것이고, 확연한 미학적 구심이란 기억과 회귀를 통한 근원 탐구의 시학으로 모아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신만의 세계를 아름답게 완성한 이번 시집을 두고, 우리는 그녀가 앞으로 이루어갈 자기 탐구의 세계를 오래오래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깊이 가져보게 되는 것이다. -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