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05 03:23
▲사진: 봄을 맞이한 이화여대 교정 / 소니 a7M4 카메라-시그마 24-70mm 광각 렌즈(2025년 4월 1일 오후 3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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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천 년(千年)고도(古都) 경주(慶州)에 위치한 광문서원(廣問書院)에 대대적인 마루교체 작업이 실시됐다.
국가유산인 광문서원 내 쪽마루 상당수가 부식(腐蝕)으로 썩기 시작, 교체가 불가피 해졌다는 것이다.
경주 문화재 관리국은 쪽마루가 썩는 과정에서 불개미들까지 달라붙어 나무 판(版)을 갉아먹는 등 붕괴위험이 가속화돼 위험한 지경에 다다랐다고 이유를 밝혔다.
부식된 마루에는 고서(古書)로 가득 채운 서고(書庫)가 빼곡히 들어선 자리여서 교체작업이 시급한 것으로 진단됐다.
이에따라 문화재 관리 주무부서인 경주시 문화재관리국은 지방세비(歲費)를 긴급편성해 줄 것을 시의회에 요청, 문화재 수리 전문가를 선정한 뒤 쪽마루 교체작업에 착수했다.
한편, 경주시 문화재관리국으로 부터 쪽마루교체작업을 맡은 무형문화재 출신 고가(古家)수리 전문가는 현장인 광문서원에서 면밀한 현장검증을 실시한 뒤 곧바로 마루교체에 뛰어들었다.
전문가는 약 1백여 평 크기의 쪽마루를 교체하기 위해서는 대략 보름정도의 시공(施工)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진단하고 전통가옥 마루전문 기술자들을 동원했다.
그러고는 이틀에 걸쳐 서원내 북 밖이 서고 책꽂이를 모두 들어내 임시 보관장소인 컨테이너로 옮긴 후 쪽마루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현장에 투입된 기술자는 모두 12명이었다.
이들 메카닉 들은 적게는 10여 년에서 많기는 35년의 노하우를 축적한 베테랑 들이었다.
서원에 깔린 쪽마루는 참나무를 직사각형으로 반듯하게 켠 뒤 아주까리 기름을 먹인 것이었다.
길이는 1미터30센티, 너비는 30센티, 두께는 약 7센티였다.
쪽마루는 오랜 기간 습기와 먼지 그리고 차광(遮光)과 고루지 않은 계절풍(風)에 절어 뒤틀리고 금이 간 것들이 상당수였다.
현장 작업은 첫날부터 녹녹치 않았다.
깔려 있는 쪽마루 나무 가운데 재생(再生)이 용이한 것들을 고르느라 신중을 기했기 때문이다.
수십년에 걸쳐 리 페어(재생)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기술자들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난관(難關)이었다.
쪽나무를 고정시키기 위해 박은 못이 녹이 슬어 부러지거나 또는 나무가 여러 조각으로 파편화(破片化) 되는 등 번번히 애를 먹였다.
이렇듯 서고 전체에 깔린 쪽마루 절반 이상이 작업의 걸림돌이 됐다.
때문에,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한 기술자라도 혀를 내두르기 일쑤였다.
물론 문화재 또는 고가(古家)와 관련된 수리(修理)는 늘 골치거리를 동반(同伴)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난코스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들은 때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결국 사흘만에 쪽마루를 모두 걷어냈다.
쪽마루를 모두 걷어내자 거대한 바닥이 드러났다.
상판(上板)을 걷어 낸 아래 바닥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시야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로데스크 한 호로 영화에서나 볼 수있는 그런 을씨년스런 분위기 였다.
너무 어두운 탓에 대장인(大匠人)이라 불린 60대 사내가 곁에선 젊은이를 가리키며 창고에서 할로겐 램프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3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안경 쓴 젊은이가 곧바로 창고로 가 램프를 가져왔다.
램프는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흔히 사용하는 5000왓트 밝기의 할로겐 램프였다.
모두 4개였다.
할로겐 램프를 건네 받은 대장인이 재빠른 손놀림으로 플러그에 연결하자 눈이 부실정도로 밝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대장인은 할로겐 램프 두개를 집어 들고 바닥을 향해 비췄다.
시커먼 어둠을 몰아낸 바닥은 온통 검은 재로 뒤덮여 있었다.
바닥의 사장을 확인한 기술자들은 나머지 할로겐 램프를 비추며 바닥으로 내려섰다.
휑한 바닥에는 습한 기운과 을씨년스러운 차가운 바람이 이리저리 휘몰아 쳤다.
기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진 채 바닥의 상태를 살피고 쪽마루 상판 기둥을 받치고 있던 수십개의 주춧돌을 하나하나 점검해 나갔다.
사방으로 널려 있는 주춧돌에 새 지지대(원통나무)를 설치하기 위해서 였다.
두께 50센티, 가로세로 20센티 크기의 화강암(花崗巖)을 정사각형으로 다듬어 만든 주춧돌은 가로세로로 3미터에 하나씩 놓여 있었다.
기술자들은 기존에 설치해 있던 원통 지지대 참나무를 모두 제거하고 길이 2미터 둘레 20센티 크기의 새것을 주춧돌 위에 고정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주춧돌에 고정된 원통나무에는 너비 20센티, 길이 10미터 크기의 직사각형 나무를 사방에 고정시킨 뒤 그 위에 쪽마루를 시공하는 것이었다.
기술자들은 쪽마루를 뜯어낼 때와는 달리 재빠른 손놀림을 구사하며 일사천리로 공정(工程)을 이어갔다.
그렇게 주춧돌에 원통 지지대 참나무를 고정시키는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을 즈음이었다.
바닥 가장자리에 놓인 주춧돌에서 일에 몰입하고 있던 안경 쓴 젊은 기술자가 갑자기 격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아래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광경이었다.
찢어질 듯한 비명에 화들짝 놀란 주변의 동료 기술자들이 모두 입을 쩍 벌린 채 황당한 표정으로 젊은이가 사라진 곳으로 재빨리 다가갔다.
화들짝 놀란 표정인 대장인이 젊은이가 있던 자리 주변을 두리 번 거리자 발 앞에 시커먼 구덩이가 아가리를 떡 벌리고 있었다.
마치 싱크 홀 같은 구덩이였다.
크기는 성인 한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대장인이 허리를 굽혀 할로겐 램프를 구덩이 안에 비추며 소리쳤다.
“이봐, 미스터 정, 괜찮나?”
그제서야 구덩이에서 힘겨운 답이 들려왔다.
“네,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대장(大匠)님, 제 발 밑에 무슨 궤짝 같은 물건이 있네요.”
“뭐 야, 궤짝이라고?”
대장인이 묻자 상대가 말했다.
“그래요. 궤짝인 것 같은데 자세이는 모르겠네요.”
“이봐, 미스터 정.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게. 내가 밧줄을 가져올 테니 잠깐만 기다려.”
3분 후.
젊은이는 밧줄을 이용해 자신이 발견했다는 궤짝을 위로 올리고 곧이어 밖으로 나왔다.
젊은 기술자는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허나 놀란 기색은 역력했다.
젊은이가 구덩이에서 발견한 궤짝은 나무로 제작된 것이었다.
궤짝은 단단하기로 정평이 난 도토리과 상수리 나무로 정교하게 만들었다.
형태는 가로 1.5미터 세로 1미터 높이 60센티 크기였다.
궤짝 뚜껑에는 금으로 세공(細工)한 십자가와 예측불허의 긴 머리를 지닌 인간 형상이 좌우로 나열 돼있었다.
궤짝은 놀랍게도 부식이 거의 안된 상태로 습기와 먼지로 덥혀 있을 뿐이었다.
낯선 문양(文樣)의 장식도 두터운 때가 끼었을 뿐 금 특유의 황금 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젊은 기술자로부터 ‘대장 ’이라 불린 대장인은 궤짝을 요모조모로 살핀 후 예사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미스테리 한 궤짝에 호기심이 일자 그는 ‘모두 다 하던 일을 멈추라 ’고 지시한 후 궤짝을 서고가 위치한 자리로 옮겼다.
궤짝을 옮긴 대장인은 즉시 삼성 갤럭시 폰을 꺼내 비밀번호를 해제한 뒤 어디론 가 전화를 연결했다.
상대가 3초도 안 돼 반응했다.
“국장님. 광문서원 현장입니다.”
“어이쿠, 반장님 고생이 많지요, 헌데 무슨 일로....”
대장인이 스피커 폰으로 고정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다름아니라, 마루를 모두 뜯어낸 뒤 아래 바닥 주춧돌에서 작업을 하다가 전혀 뜻하지 않은 궤짝을 발견했습니다.”
궤짝 운운에 상대가 바짝 반응했다.
“궤짝이라... 무슨 말씀이신 지?”
대장인이 스마트 폰을 입가에 바짝 갖다 대고 소리쳤다.
“젊은 기술자 친구가 일을 하다가 구덩이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구덩이에서 커다란 궤짝을 발견했고요. 밖으로 끌어 올린 궤짝에는 순금으로 만든 십자가 문양의 세공품과 흐릿하지만 긴 머리의 사람 얼굴을 한 형상의 장식이 달려있습니다.”
대장인이 순금으로 세공(細工)한 십자가 장식과 사람 얼굴을 형상화한 문양장식 운운하자 상대가 바짝 달아올랐다.
“여보세요, 반장님. 혹시 궤짝은 열어 보셨습니까?”
“아뇨. 우리가 어찌 함부로 열어볼 수 있겠습니까? 혹시나 해서 제가 궤짝을 그늘만 있는 서가 한 켠에 모셔(?) 놓았습니다.”
“그럼 말입니다. 거기서 꼼짝 말고 그대로 계세요. 무엇 하나 손을 대시면 절대 안 됩니다. 제가 화급히 문화재 관리위원들을 모시게 갈 테니 그리 아세요. 알았죠?”
대장인은 상대가 허둥대는 모습을 상상하며 앞에 있기나 한 듯 허리를 연신 굽혔다.
정확히 45분 후.
광문서원 현장에서 간단한 약식 절차를 밟은 고위 관계자는 문제의 궤짝을 경주 문화재관리국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다수(多數)의 문화재 관련 전문 요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궤짝 뚜껑을 열기 시작했다.
헌데, 궤짝 뚜껑은 생각보다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아교를 칠한 듯 접착제로 여겨지는 이물질이 단단히 달라붙어 이를 제거하는데 애를 태웠다.
이처럼 어려움을 겪자 과거에 비슷한 현상을 경험한 요원이 선뜻 나섰다.
그는 잠시 어디론 가 모습을 감췄다가 다시 나타나 화학약품을 이용해 뚜껑가장자리를 천천히 녹여 나갔다.
이 후 30분 여가 지나자 이물질이 부풀어 올랐고 비로소 뚜껑이 열렸다.
스텐리스 작업대에 올려진 궤짝 주변에는 문화재 관련 전문가를 비롯한 부서팀장과 사진작가 등 모두 20명이 호기심을 증폭(增幅)시켰다.
열린 뚜껑 안에는 붉은색 비단천이 덮여 있었고 피륙 위에는 길이 30센티 너비 10센티 크기의 금패(金牌)가 놓여 있었다.
금패에는 선명한 음각 체(陰刻體)로 “儒理呢師今元年37 曺鉀材(유리 이사금 원년24 조갑재)”라고 새겼다.
금패 왼쪽 한 켠에는 ‘왕명출납인(王命出納人)이라 덧붙였다.
금패를 읽어 내린 모두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더욱이 궤짝이 2천 년 전 신라시대때 유물이라는 것에 놀라움은 더욱 컸다.
헌데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방금 만든 것처럼 보존 상태가 호조(好調)를 보인 것은 어쩌면 축복이었다.
모두가 경이로운 시선으로 금패를 읽어 내린 뒤 이번에는 전문가 한 위원이 라텍스 고무장갑을 낀 채로 비단 피륙을 조심스레 걷어내기 시작했다.
정성을 다해 자주색 비단을 걷어내자 이번에는 닥 지 표지(表紙)에 기름을 먹인 책 13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마 끈으로 가장자리를 촘촘하게 묶은 책은 권당 1백페이지 분량이었다.
책의 크기는 오늘 날의 A4 용지만 큼 했고 글은 모두 흰색 비단에 붓글씨로 써 내렸다.
특이한 것은 책 1권부터 3권까지는 한자(漢字)로 기록했고, 4권부터 6권까지는 인도의 벵골어로 썼다. 그러고는 7권부터 마지막 13권까지 모두 이스라엘 아람어와 히브리어로 썼다.
궤짝속의 내용물을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문화재 전문위원들은 마냥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비단에 활자처럼 반듯하게 쓰인 한자(漢字)는 그런대로 해석이 가능한데, 난생처음 대하는 벵골어와 아람어, 히브리어는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그림 같기도 한 글씨체는 해석이 불가능해 이 방면의 전문가를 신속히 수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다행히 경주와 가까운 부산 외대에서 인도어를 가르치는 교수와 과거 이스라엘 유학을 통해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마스터한 교회 목사를 초청했다.
문제의 궤짝이 엄청난 보물임을 인지한 문화재 국장은 서울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현재 상황을 피력(披瀝)하고 종교와 이스라엘 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박사들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궤짝에서 들어낸 13권의 책과 도무지 알 수 없는 부장물품들을 안전금고에 보관한 위원들은 다음날을 기약하며 흩어졌다.
급히 수배한 언어학자와 목사 그리고 원로 종교학 박사 및 인도와 이스라엘 역사 전문가를 경주로 집합해야 비밀의 자물쇠를 열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 하면, 광문서원 현장에서 궤짝을 발견한 기술자들도 ‘그 속에 엄청난 보물이 담겨있다는 전언(傳言)을 듣고 서로가 자신들의 일처럼 기뻐했다.
특히 구덩이에 빠졌던 안경 쓴 젊은 기술자는 기쁨을 더욱 배가(倍加)시켰다.
마치 팔레스타인에 위치한 와디 쿰란 동굴에서 양치기 소년이 파피루스 문서(사해문서(死海文書: 구약사본)발견한 것처럼. (계속)
서기(AD)24년(年)여름
신라(新羅)의 3대왕인 유리 이사금(儒理呢師今)이 선정(善政)을 펼치고 있을 때였다.
신라의 수도(首都)인 경주에서 천재 한학자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조갑재(曺鉀材:16세)가 낮잠에서 벌떡 깨어 일어났다.
꿈 때문이었다.
지난해 혹독한 가뭄으로 폐사(斃死)했던 앞마당의 복숭아 나무에서 13개의 복숭아 열매가 탐스럽게 열린 것이었다.
복숭아의 크기는 갓난 아기 머리만큼 했다.
마당으로 나간 조갑재는 경의(敬意)스러운 시선으로 복숭아나무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그는 13개의 복숭아 가운데 유독 붉은 빛을 감싸고 있는 것을 따서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맛은 그 어느 것 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하고 향긋했다.
그는 형용(形容)할 수 없는 맛에 취해 다시 입안 가득 베어 물었다.
그러고는 복숭아를 우물거리며 씹고 있을 때였다.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옷을 입은 사내가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와 다가서며 말했다.
말소리는 웅얼거리는 그 무엇이었으나 즉시 이해할 수 있었다.
내용은 이랬다.
“나는 하나님의 메신저인 가브리엘 천사(天使)다. 너는 들으라. 이제 때가 되었다. 고향을 떠나 여정(旅程)을 살펴 이스라엘로 가라. 갈릴리에서 너를 기다리는 분이 계신다.그분께서 너의 조국인 동방(東邦)을 지극히 사랑하신다.”
이렇게 말한 천사는 나무에 달려있던 나머지 12개의 복숭아를 모두 따 품속에 지니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참으로 기괴(奇怪)한 현상이었다.
비록 꿈속이었지만 너무나 또렷하고 생생한 광경이었다. 실제로 방금 일어난 일처럼 여겨졌다.
꿈에서 깨어난 조갑재는 이불속을 빠져나온 뒤 옷을 수습하고 대청(大廳)으로 나왔다.
대청마루에 서서 크게 숨을 들이 킨 후 잘려 나간 복숭아 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무에는 꿈에서 본 것처럼 탐스럽고 향긋한 복숭아 열매는 없었다.
단지 여린 가지에 파란 잎새들이 촘촘히 솟아나 끈질기게 생명을 피어 내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13개의 복숭아는 무엇이며, 더군다나 자신을 ‘하나님의 메신저라 했던 천사 장 가브리엘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한동안 꼼짝 도 하지 않고 복숭아 나무에 시선을 고정시킨 준 그는 결코 예사일이 아니라는 자문자답(自問自答)을 했다.
이 날 저녁.
조갑재는 저녁상 앞에서 유리 이사금 왕을 곁에서 보좌하는 아버지와 명문가 출신인 어머니에게 간밤의 꿈을 들려주었다.
이 자리에는 맏형과 두 누이도 함께 있었다.
아들의 꿈이야기를 귀담은 아버지는 무덤덤한 표정이었고, 어머니는 매우 놀란 모습이었다.
겸상(兼床)을 하는 누이들은 뺨에 보조개를 피우며 ‘오라버니 꿈은 개꿈이라고 폄하(貶下)했다.
하지만 심각한 표정인 어머니는 달랐다.
죽은 나무에서 13개의 탐스러운 복숭아가 열렸다는 대목과 특히 어감(語感)도 이상한 가브리엘이라는 천사가 나타나 자신을 하나님의 전령사(傳令使)라고 한 것 등은 결코 예사 꿈이 아님을 직시(直視)했다.
어머니가 아들을 반듯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여보시게 그래서 학자님은 그 꿈을 어찌 해몽(解夢)하시는가? 특히 이제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스라엘 운운은 무슨 뜻인지...?”
아들이 말했다.
“글쎄요. 저 역시 생소한 소리라서 당황스러웠고 머리속도 복잡했습니다. 비록 꿈이었지만 천사는 똑 부러지게, 여정에 나서라고 하더군요. 천사장이 나무에 달린 12개의 복숭아를 하나도 남기지 따 간 이유도 수수께끼고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곰곰이 살펴보니 좀 더 큰 세상으로 나가라는 계시(啓示)같다는 생각입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중국으로 유학을 계획했던 바, 내친김에 유학길에 오르려 합니다.”
무엇인지 모를 힘에 이끌린 조갑재는 마치 이전부터 이스라엘 행(行)을 계획한 사람처럼 말했다.
아들의 뜬금없는 꿈이야기를 비롯한 중국유학 결행을 귀담은 아버지는 손에 쥔 수저를 밥상에 내려놓고 부인의 눈치를 살폈다.
조갑재의 폭탄선언과 같은 뜻밖에 말에 맏형과 두 오누이도 놀란 표정이었다.
밥상에서 가족들의 침묵이 이어지자 말수가 적은 아버지가 정적(靜寂)을 깼다.
“그래서, 꿈 때문에 유학을 가겠다는 거냐? 신중한데다, 높은 학식과 고견(高見)을 갖춘 네가 그리 단호하게 표명(表明)하니 어수선하구나. 그러나 한편으론 네가 그 꿈으로 인해 단호히 유학을 결심하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인 것 같다. 정녕 너의 결심이 그러하다면 내일부터 채비를 꾸리거라.”
아들 못지 않게 영명(英明)한 아버지는 곁에 앉은 부인을 흘끔 곁눈질하며 무언의 의사를 표했다.
어머니도 당대(當代)의 사대부(士大夫)가 뿐만 아니라 기층민(基層民)에게까지 지혜와 덕(德)이 출중(出衆)한 현모양처로 명성이 자자한 터였다.
그러한 어머니였기에 함부로 말하거나 예단(豫斷)하는 경고망동은 절대 없었다.
매사가 신중하고 절도(節度)있게 행동했다.
어머니가 저고리 옷 매무새를 고치며 말했다.
“나 역시 아버님의 말씀과 동일하다. 지금에 와서 비로소 말하지만 이곳 경주는 네 그릇을 품기에는 작다고 늘 생각해 왔다. 따라서 중국으로 유학을 가는 것도 시기적으로 적절하다. 그곳에서 더 많은 학문과 지혜를 배우고 오너라.”
이처럼 가족의 중국 유학 동의(同意)을 얻은 조갑재는 다음 날부터 행랑을 꾸리기 시작했다.
1주일 후.
왕명 출납을 담당했던 조갑재가 중국 유학길에 오른다고 하자 유리 이사금 신라왕은 그를 어전(御殿)으로 불러들였다.
왕을 알현(謁見)한 조갑재는 자신의 급작스러운 중국유학 배경을 소상히 밝히고 윤허(允許)해 줄 것을 청했다.
평소 조갑재의 인품을 높이 평가한 왕은 처음에는 좀더 자신을 보좌해 줄 것을 권유했으나 신하가 완곡해하자 결국 ‘무탈한 여행이 되라 ’는 덕담과 함께 후하게 차비(금(金)를 하사(下賜)했다.
중국 청두(成都)
때는 한여름이었다.
말(馬)과 도보로 한달 보름만에 중국에 도착한 조갑재는 그 길로 중국 서부지역에 위치한 청두로 향했다.
청두는 중국 서부지역에서 가장 큰 쓰촨 분지의 수도(首都)였다.
당시 도시에 거주하는 인구는 약 6백여 만명이었고, 대부분이 농업과 상업 경공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특히 이지역은 경공업이 발달했는데, 그 배경에는 일찍부터 유럽과 중동과의 활발한 교역 때문이었다.
기원전(BC)4800년 전 부터 청동기 문화가 발전한 청두는 학문(學文)에 있어서도 중국 제일의 하나로 손꼽혔다.
또 한 청두는 삼국지의 주인공 유비가 촉한(蜀漢)의 황제가 되기 전부터 수도로 쓰인 곳이기도 했다.
조갑재는 청두에서 여장을 풀고 천하제일의 학문대학(學文大學)인 문시원(文示院)에서 한학(漢學)을 비롯한 천문학과 주역(周易)그리고 인도경전을 섭렵해 나갔다.
태어날 부터 신동(神童)이었던 그는 자신의 스승인 곽인을 훨씬 능가하는 실력을 드러내 문시원의 동료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지난 1년 6개월 여 동안 동방에서 건너온 유학생 조갑재를 유심히 지켜본 눈 스승은 그가 학문적으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진단한 후 인도로 떠 날 것을 종용(慫慂)했다.
“나는 더 이상 자네의 그릇에 담아줄 학문이 없네. 그러니 보다 넓은 세상으로 가시게. 내가 인도의 유명한 석학(碩學)을 소개해 주겠네. 나도 지난 날 인도에서 그에게 여러 학문을 수학했네. 인도는 이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네. 그곳에는 자네의 그릇을 채워줄 다양한 고등학문(高等學問)이 있네. 하여, 내가 추천서를 써줄 것이니 그곳으로 가시게.”
스승은 그러고는 인도 뭄바이지역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힌두시이자 대학자인 라비상카에게 추천서를 올렸다.
조갑재는 스승인 곽인의 느닷없는 인도 행 권유를 극구 만류했으나 ‘자신은 더 이상 역부족 ’이라며 떠날 것을 종용했다.
한동안 밀고 당기는 스승과 제자의 회자정리(會者定離)가 있은 후 결국 조갑재는 행장을 다시 꾸려 인도 마하라슈트라의 주도(州都)인 뭄바이로 향했다.
때는 서력(西曆)29년이었다.
인도 마하라슈트라 주(州)내 주도(州道) 몸바이(AC29년 늦가을)
스승 곽인의 추천서를 품에 간직한 조갑재는 뭄바이에 도착해 문제의 인물을 찾아 나섰다.
입소문을 통해 도착한 곳은 사나타나 다르마(Sanatana Dharma)출신 힌두시들이 모여 사는 압둘 칸이라는 지명(地名)이었다.
이곳에서 추천인물인 라비샹카를 수소문한 결과 그는 힌두쉬 종교지도자이자 희랍 철학과 유대사(史), 그리고 수학, 천문학, 의학에 능통한 인물로 알려졌다.
그는 몸바이 시내에 위치한 힌두교 사원 부설 학교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강의를 펴고 있었다.
이곳에서 배출한 학생들 다수는 인도 전역에서 유명인 석학(碩學)으로 명성을 떨치는 중이었다.
조갑재는 여독(旅毒)이 풀릴 틈도 없이 곧장 부설대학으로 걸음을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학자인 라비샹카를 만나 곽인의 추천서를 건넸다.
추천서는 인도 벵골어(語)로 쓰여 있었다.
추천서를 꼼꼼히 읽어 내린 라비샹카가 곁눈질로 조갑재의 전신을 훑었다.
동방인(東邦)의 키는 인도인보다 컸다.
다소 지쳐 보이는 안색이었으나 외모는 깔끔하고 빈틈이 없었다.
체구(體軀)도 단단해 보였다.
라비샹카는 시선을 얼굴로 가져갔다.
이목구비(耳目口鼻)도 나무랄 데 없었다.
마치 붓다(부처)의 형상처럼 또렷하고 해맑았다.
피부 역시 매끈했다.
동양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꽃미남 청년이었다.
그 밖에도 머리술은 풍성했고 비록 하얀 치아는 아니었지만, 치열이 잘 정돈이 돼 있었다.
눈은 짙은 흑색이었으며, 눈썹은 송충이처럼 꿈틀거리는 모양새였다.
굳게 다문 입술은 가득한 예지(叡智)를 반영했다.
짧은 시간에 상대를 스캔한 대학자는 흡족한 표정으로 다가서며 성큼 품에 안았다.
격식을 배제한 환영의 인사였다.
이방인을 맞은 라비샹카는 우선 의사소통에 직면했다.
임기응변으로 자신이 터득한 한문으로 필담(筆談)을 하려고 했다.
이를 눈치 챈 조갑재는 이미 중국의 영적(靈的) 스승인 곽인을 통해 수준급의 벵골어를 습득한 터라 먼저 치고 나갔다.
조갑재가 격조 높은 벵골어로 말하자 깜짝 놀란 상대도 흡족한 표정으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먼 길을 여행했으니 오늘은 나의 집에서 편히 쉬시게.”
인도의 카스트 제도 중 최 고위층에 해당하는 브라만 계급인 라비샹카는 몸바이에서 대저택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가족으로는 부인과 후처(後妻)3명, 그리고 이들을 통해 출산한 남녀 가족 20명 등이 함께 동거하고 있었다.
저택에는 수많은 하인들이 상주하며 집안일을 거들었다.
이들 중에는 카스트 계급에 포함되지 못하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즉 달리트 족 출신들이 집안 내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동방에서 건너온 귀한 손님을 위해 마련한 특별 만찬이 저녁 식탁에 펼쳐졌다.
떡갈나무로 제작한 길다란 직사각형 식탁에 일렬로 나란히 앉은 대가족은 중앙에 당당하게 앉은 사내를 신기한 듯 쉴 새 없이 훔쳐보며 저마다 수군거렸다.
특히 십대 후반의 여자들은 호기심을 잔뜩 부추기며 시선을 거둘 줄 몰랐다.
태어나서 처음 본 남자가 엄청난 미남인 데다 아버지의 귀띔대로 머리도 총명한 천재라는 것에 대한 동경심(憧憬心)의 발로(發露)였던 것이다.
때문인지 식사 도중 가족들의 끊이지 않는 질문이 쏟아졌다.
그럴 때마다 조갑재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명확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가 비록 유창한 벵골어는 아니었으나 막힘이 없이 해내자 가족들 모두가 놀라는 눈치였다.
눈 속에 호기심을 증폭시킨 라비샹카의 막내 딸이 고개를 돌려 조갑재에게 물었다.
“당신의 나라는 어디에 있죠? 그리고 우리나라 말을 유창하게 잘 하는데, 어디서 배웠나요?”
조갑재의 인도에서의 첫 여정은 멋진 만찬으로 서막을 올렸다.
몸바이 대학에서 수학(修學)
몸바이 힌두교 재단에서 운용하는 종합대학에 입학한 조갑재는 이 곳에서도 발군(拔群)의 실력을 드러냈다.
벵골어를 완벽하게 마스터를 하는데 불과 6개월이 걸렸고, 라비샹카의 특별한 관심하에 천문학과 의학 수학을 섭렵하는데 약 1년이 채 안 됐다.
이처럼 동방에서 건너온 청년이 천재성을 유감없이 드러내자 몸바이에서 서서히 조갑재라는 이름 석자가 기득권 계층에서 회자(膾炙)되기 시작했다.
한편 조갑재가 라비샹카의 문하(門下)의 제자로 입교한 뒤 1년이 지나서 낯선 이방인이 입교(入校)했다.
자신을 스알 야숩이라고 소개한 사내는 중동(中東)지역인 팔레스타인에서 건너온 이스라엘 유대인이었다.
나이는 28세.
장가를 가지 않은 미혼이었고 기호학자(記號學者)였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유대사회의 기득권 계층인 사두개(Sadducees)인 출신이며 유대사회의 주요 중추 기관(中樞機關)인 산 헤드린 의회에서 서기(書記)로 근무했다고 밝혔다.
인도로 유학을 온 배경에는 보다 큰 틀에서 외국의 학문을 배워야겠다는 열망 때문이었다며 몸바이 대학에서 학문을 수료하면 희랍(그리스)으로 건너갈 계획이라고 포부를 드러냈다.
유대인 스알 야숩도 하늘이 내린 천재였다.
조갑재 못지 않은 습득력(習得力)과 독해(讀解)는 라비샹카를 놀라게 했다.
물론 인도 출신의 학생들도 연신 감탄사를 표한 것은 물론이다.
이처럼 두 천재는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며 다양한 인도학문을 체화(體化)해 나갔다.
두 이방인은 학업후에는 친우(親友)처럼 교류하며 끊임없는 대화를 이어갔다.
동방의 청년은 신라국의 모든 것을, 유대인은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서로 교환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알 야숩으로 부터 뜻밖의 전언(傳言)을 들었다.
“이봐, 친구 혹시 너의 나라 신라국에도 마술을 하는 사람이 있나?”
유대인이 느닷없이 엉뚱한 질문을 하자 조갑재가 생뚱맞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 모르기는 해도 신라국 어딘가 에는 있을지 몰라. 하지만 직접 본 것은 없네. 헌데 갑자기 마술은....”
스알 야숩이 정색한 어투로 말했다.
“나의 고향인 팔레스타인에선 젊은 청년이 잔치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이 있었네.”
조갑재가 정색하며 물었다.
“방금 뭐라했나, 젊은 청년이 잔치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다고…?”
“물론 일세. 실제 사건이야. 소문이 아니고.”
“마술 치고는 대단한 마술이구먼! 물을 포도주로 만들다니.”
“뿐만 아니네.”
스알 야숩이 다시 정색한 투로 말했다.
“내가 인도에 오기 직전 그 청년이 실로암이라는 연못가에서 30년이 넘도록 장님으로 살아온 맹인의 눈을 단지 손 하나로 눈을 뜨게 했다 네.”
“뭐라고, 지금 자네의 그 말이 설마 농담은 아니겠지? 그 청년이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다는 대목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데, 한걸음 더 나라가 눈먼 소경을 단지 손으로 세상을 보게 했 다니… 그렇다면, 그것은 마술은 아닐걸세. 그 이상의 무엇이겠지.”
조갑재는 유대인의 전언에 대해 처음에는 농담으로 여겼으나 두번째 대목을 듣고 신중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과거 꿈속에서 대면한 천사장의 이름을 오버랩 시키며 말했다.
“이봐, 친구. 한가지 묻겠는데, 혹시 천사 장 가브리엘을 들어본 기억이 있나?”
순간, 스알 야숩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갑재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가 어찌 가브리엘을 아는가? 그 천사장은 우리 유대민족이 믿는 야훼의 전령사(傳令使)즉, 우리 하나님의 심부름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메신저일세.”
유대인이 가브리엘의 백그라운드를 상세히 말하자 조갑재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다시 말했다.
“이봐, 야숩. 방금 가브리엘 천사장이 자네가 믿는 종교의 하나님 전령사라 했겠지?”
“물론이네!”
조갑재는 이 즈음에서 중국유학을 떠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꿈 때문이었다며 당시의 상황을 조목조목 풀어 놓았다.
조갑재의 꿈 이야기를 주의 깊게 귀담은 스알 야숩도 결코 예사일이 아니라고 속내를 드러내고 ‘자네가 만약 이스라엘에 가려는 생각이 있다면 언제든지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약속했다.
호기심이 증폭된 조갑재는 스알 야숩을 통해 이스라엘과 관련된 정치 사회, 문화, 풍습, 미신, 마술 등 전반에 걸쳐 질문을 퍼부었다.
친우(親友)의 남다른 호기심에 유대인 친구도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상식을 체계적으로 남김없이 전수(傳受)해 주었다.
스알 야숩으로부터 유대의 다양한 정보를 습득한 조갑재는 빠른 시일에 팔레스타인 땅으로 가보겠다는 결심을 세우고 아람어와 히브리어를 체계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동방인과 유대인 두 사람은 타고난 천재였으므로 언어(아람어와 히브리어)도 단기간에 가르치고 또 한 섭렵했다.
조갑재는 여러모로 운이 좋은 사내였다.
가는 곳마다 뜻하지 않은 인연으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럴날 때마다 생각했다.
‘나의 다음 여정은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하는.
인도에서도 단기간내에 고등학문(高等學文)을 마스터한 조갑재는 한 해가 지나자 스승인 라비샹카와 친우 스알 야숩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미지의 땅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
때는 가을이었다.
그의 행장(行裝)에는 스알 야숩이 써준 추천서를 비롯한 갈릴리 지방의 지형과 마술을 행하는 예수라는 청년이 활동하는 지역, 그리고 아리마태 출신 요셉이라는 산 헤드린 공회원을 만나 도움을 청하라는 권유도 머리속에 깊이 새겼다.
사료 깊은 스알 야숩은 요셉에게 청탁한 추천서에 조갑재의 인품과 학식 등 모든 것을 자세히 기록하고, 동방인을 각별히 맞아달라는 부탁도 곁들었다.
한편, 다양한 학문을 전수해 준 대 스승 라비샹카와 인도에서 맺은 특별한 인연 스알 야숩을 뒤로하고 미지의 세계인 팔레스타인을 향해 길을 떠 난 조갑재는 겨울철이 다 되어서야 예루살렘 성에 들어섰다. (계속)
이산해 / 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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