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래향' '패션푸릇' '5각 선인장' 작품평

하 길 남(문학평론가,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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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이 일상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일상의 몇 단락이나 장면을 써놓고, 거기에 삶의 의미를 부여해놓으면 작품이 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일상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주제의 논리에 따라 재구성을 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글들이 이 재구성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냥 일상의 경험을 쓰고 나서 적당히 끝을 맺기 때문에, 사실상 문학적 형상화 과정을 거치지 못한 이른바 신변잡기에 머물고 마는 글들이 양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는 ‘금년을 대표하는 수필’을 선정하기 위해 작년에 수필전문지에 실린 수필 5천여 편을 읽었다. 이 중에서 80여 편을 골랐다. 말하자면 약 63분의 1이 뽑힌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수필의 현주소를 읽게 된다 하겠다. 60여 편중에 1편 꼴이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뿐, 여타의 글들은 문학적 형상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물론 각자 작품을 보는 눈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비평가가 선정한 글이라고 해서 그것을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역시 아주 좋은 작품을 놓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수필은 일상을 쓴다기보다 일상을 조립한다는 입장이 된다. 이 재조립과정을 우리는 재구성이라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글을 쓰다보면 주제의 일관성이 결여되거나 사실상 일상의 이야기로 끝나고 만다.

우리는 흔히 덧없는 세월이라는 말을 듣는다. 즉 각성되지 못한 일상,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함몰된 일상을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의미가 박제된 일상인 것이다. 한낱 로봇일 뿐, 깨어있는 삶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작품의 자료가 될 수 있겠는가. 문학적 형상화란 바로 자기의 삶의 형상화인 것이다. 그것은 일상의 재조립이며 바로 인생조립인 것이다.

박봉진님의 세 가지 꽃

1, ‘밤의 꽃 야래향’

‘야래향’과 ‘패션푸룻’ 그리고 ‘5각 선인장’을 다룬 이 수필을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그 꽃들의 특성을 조합한 인간적 자기완성의 향방을 묻는 한 편의 서사시라 하겠다. 그래서 자연, 그 밤낮의 윤회를 배치해놓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를 잠시 살펴보면, [1] 밤 즉 야래향의 진품 [2] 낮 그 패션푸룻의 분수(分數] [3] 밤낮의 5각 선인장 꽃 그 시대를 초월한 고전미 등이다.

“길쭉한 잎사귀 사이사이에 붙어있는 가느다란 연두색 미니꽃, 낮엔 작은 붓끝 모양을 오므리고 밤엔 앙증맞은 트럼펫 같은 꽃잎을 펴서 그윽한 향기를 불어낸다 ...... 누가 눈여겨 봐주지도 깊은 속을 알아주려고도 않는다. 진품은 흙속에 묻혀 외면당하기 일쑨가 보다.”

야래향은 진품이라는 이야기다. 꽃 중에서 말이다. 이 진품의 가치를 사람들은 잘 알아주지 않는 모양이라고 한다. 꽃은 외관상으로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니까. 장미는 아름답다. 말하자면 꽃의 속성은 우선 사람의 눈을 얼마나 즐겁게 해주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야래향의 특징은 향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향기도 음미할 줄 아는 사람에게 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도 그 진품인 것을 모른다면 외면당하기 마련인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진정한 진품의 가치는 겉으로 잘 드러내는 것이 아닐는지 모른다. 사람은 죽어보아야 안다는 말도 어쩌면 그 진정성이 그 사람이 가고 난 후에 알려진다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람의 진가는 살아서 요란하게 알려지는 것보다 그가 죽고 난 후에 알려져야 진짜 값진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예부터 사람은 관을 덮어봐야 안다고 했던 것이리라. 진정한 인생의 향취는 그가 떠나고 난 후에 드러나는 것이라 하겠다.

2, ‘낮의 꽃 패션푸룻’

담쟁이덩굴이 있었던 자리에 패션푸룻을 옮겨 심고 보니, ‘단감 대추 레몬 아바카도 등 이십 여종이 되는 과목들의 배경과 잘 어울려’ 옛 고향집 분위기를 자아내게 된 셈이다.

“낮에만 피고 밤에는 오므린다.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속은 희나 두툼한 연녹색 꽃받침 다섯 장에다 얇은 흰색 다섯 장을 곁들인 것은 내구력을 위한 디자인이리라 ...... 열매도 일품이다 ...... 패션푸룻처럼 분수를 알고, 빈 곳을 채우는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이만한 찬사라면 꽃으로는 최상급이라 하겠다. [1] 정교하고 [2] 연녹색 꽃받침 다섯 장, 얇은 흰색 다섯 장의 조화나 [3] 일품의 열매 [4] 분수를 알고 [5] 빈곳을 채워주고 [6] 내구력을 위한 디자인 등.

그래서 ‘패션푸룻 한 그루만 심으면 웬만한 집 담장은 삼 년이면 다 덥혀질 것이다. 그것의 효용가치를 따진다면 일석이조 아니 그 이상이다. 패션푸룻은 염치없이 땅과 공간을 많이 차지하려들지 않는다. 다른 초목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담장을 푸름으로 채운다’고 찬사가 끝이 없게 된다.

3, ‘밤낮의 꽃 5각 선인장’

‘밤낮의 꽃’이니 단연 돋보일 것이 아닌가. 이 꽃의 상징은 ‘시대를 초월한 고전미’다. ‘너 나 없이 변덕부림을 시대적응이라고 당연시하고 있는 세상이다. 케케묵은 생각이라고 등한시해도 할 수 없다. 고전미는 언제나 시대를 초월하고 앞섰으니까.’하고 화자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시대가 시대인 만큼’이라는 전제를 붙이면서, ‘제 하나 잘났으면 됐지’하고 만사를 현재적 자아에 귀결시키게 된다. 그러면서도 ‘세상에 독불장군이 어디 있어, 근본이 중요한 것이야’하고 은근히 비쳐보는 것이 아닌가. 이 근본과 고전미의 함수를 생각해보게 된다.

“봉우리 때 펜타콘처럼 정5각형이더니 꽃도 곡 무슨 무공훈장 같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한 가운데 별모양의 불가시리를 오려붙인 듯, 위장복의 얼룩점 무늬를 닮은 정교한 꽃잎 다섯 장도 5각 형태이니 말이다.”

좀처럼 보기 힘든 꽃이다. 참으로 묘한 꽃이기 때문에 ‘그처럼 희한한 꽃’이라고 했겠는가. 그래서 화자는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약간 촌스러운 데가 있다’ 했으니 참으로 묘하다 하겠다. 그런가하면 ‘수수하고 무뚝뚝하여 사내의 전형’이라고 했다. 역시 꽃 중의 꽃이라는 말로 정의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 이 세 꽃들은 “인간과 인연을 맺은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문학을 인간주의 문학과 예술지상주의 문학으로 나눈다고 한다면, 꽃이라는 소재로 글을 쓸 경우, 그 속성상 후자에 속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특히 시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화자는 말할 것도 없이 인간주의 문학 쪽에 속할 것이다.

이른바 합승적(合乘的) 구상에 속하는 이 작품은 앞에서 보아왔듯이 각각 인간의 일면들과 결부되어있다. 이 세편을 그대로 보완하는 인간형을 생각해보면 거의 완성에 이르는 인간형 즉 그 형상화된 작품성과 대비되면서 역시 여운을 풍기는 성공한 수필로 기억된다.

본문 (박봉진)

(1) 밤의 꽃 야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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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 하순, 여름은 옅어져 가고 있는데 밀려온 어둠의 밀도는 황홀했다. 바닷가 방조제에 앉아 있던 나를 밀물에 실어 둥둥 떠올렸다고나 할까. 그 경지로 이끈 근원이 궁금했다. 열린 창문으로 차 들어오고 있으니 앞뜰에 나가보면 알 일이었다. 나는 왜 거기에 있는 소철과 장미와 관상수 몇 그루만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업둥이 자식일수록 귀한 자식이어야 하는데, 말은 늘 그리했으면서도 관행이 따르지 못하다니-.

두 해전, 한 문우로부터 채 한 뼘도 안 되는 어린 묘목 두 그루를 얻었다. 꽃 향 그윽한 야래향(Night Blooming Jasmine)이라고 했다. 교우하는 우리의 마음도 늘 그렇기를 바라며 좀 정성을 드렸다. 화분에서 노지로 옮겼음은 물론이거니와 반그늘에서 햇볕 바른 곳으로 이주도 했다. 뿌리가 튼실해져 원만한 곳이면 적응해서 살아갈 것 같아보였다. 지난 정초, 한 그루를 앞뜰 창가 그러니까 드라이브웨이 너머에 옮겨 심었었다.

수세가 왕성하여 가지의 방향을 가리지 않고 마구 도장했다. 막되게 자라는 아이처럼 상록 속성수라서 그럴까. 불과 이년, 내 허리께쯤 커버린 나무는 둥치도 가지도 잎사귀도 온통 초록 일색이다. 나무나 꽃 모양새로 본다면 수형이니 화사하다느니 하는 말을 올릴 처지는 못 된다. 길쭉한 잎사귀 사이사이에 붙어있는 가느다란 연두색 미니 꽃. 낮엔 작은 붓끝 모양을 오므리고 밤엔 앙증맞은 트럼펫 같은 꽃잎을 펴서 그윽한 향을 불어낸다.

누가 불렀었나, 그 ‘예라이썅’ 노래는. ‘야래향’이 달맞이꽃 이미지와 뒤섞이면 어쩌지. 무슨 짱이거나 값비싼 자동차에다 화려한 몸치장이어야 행세하는 세상. 밤에는 나비도 벌도 없는데 야래향은 비단옷 입고 밤길 걷는 것과 너무 다르다. 누가 눈여겨봐주지도, 깊은 속을 알아주려고도 안는다. 진품은 흙 속에 묻혀 외면당하기 일쑨가 보다. 꽃을 꽃으로 불러주지 않는 사람들을 탓해 무얼 하랴. 진품을 아는 사람만이 야래향의 진향을 알 것이니까.

(2) 낮의 꽃 패션푸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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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벼락에 패션푸룻(Passion Fruit) 넝쿨을 올린 것은 잘한 일이다. 그 전에는 담쟁이 넝쿨이 있었던 자리다. 단감 대추 레몬 아바카도 등 이십 여종이 되는 과목들의 배경과 잘 어울린다. 옛 고향집 분위기로 집 주변을 가꾸려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앞뜰은 관상수 위주로, 뒤뜰은 과목위주가 된 것이다. 담쟁이 넝쿨은 낙엽을 지우기 때문에 겨울철 담장은 민둥산처럼 을씨년스러웠었다. 그러나 패션푸룻은 상록 줄기식물인 것이 더없이 고맙다.

패션푸룻의 꽃은 참 희한하다. 줄기와 잎사귀는 꼭 야생 하늘수박 같다. 그러나꽃은 낮에만 피고 밤에는 오므린다.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속은 희나 두툼한 연녹색 꽃받침 다섯 장에다 얇은 흰색 다섯 장을 곁들인 것은 꽃의 내구력을 위한 디자인이리라. 그 위엔 가느다란 국수면발을 가지런히 모아놓은 것 같은 보라색 레이스. 그리고 당그래 모양의 노란 다섯 수술에다 또 제일 위층에는 연록의 셋 암술, 사층 꽃의 조화가 정말 기막히다.

열매도 일품이다. 전에는 패션푸룻 쥬스를 자주 샀었다. 향료보다는 진액에 길들여졌는데 뭐하려 다시 사겠는가. 열매를 많이 보려면 한 겨울에 근간줄기 위를 바싹 손질해주고 그 다음 새순들은 자르지 말아야 한다. 열매는 댓살 아이 주먹만하지만 익을수록 초코렛색이 되고 스스로 꼭지를 물려 낙과를 자초한다. 낙과는 통조림 공정을 거친 거와 같기에 잘 간수했다가 반 갈라서 끓인 물에 타 씨 채로 음미해야 맛과 멋의 진수가 느껴질 것이다.

한 줄기 식물을 보고도 적재적소란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 패션푸룻 한 그루만 심으면 웬만한 집 담장은 삼년이면 다 뒤덮어질게다. 그것의 효용가치를 따진다면 일석이조 아니 그 이상이다. 패션푸룻은 염치없이 땅과 공간을 많이 차지하려 들지 않는다. 다른 초목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담장을 푸름으로 채운다. 게다가 꽃과 열매까지 얹어주니 이보다 더한 적임이 있겠는가. 패션푸릇처럼 분수를 알고, 빈곳을 채우는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3) 밤낮의 꽃 5각 선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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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태어난 고슴도치 새끼도 이럴 듯 신기하고 예쁠까. 그 선인장의 이름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늦은 봄날, 억세게 세어버린 버들강아지처럼 듬성한 가시를 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내 나름대로 붙인 그 이름은 꽃 모양에서 유래했다. 봉우리 때 펜타콘처럼 정5각형이더니 꽃도 꼭 무슨 무공훈장 같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한가운데 별 모양의 불가사리를 오려붙인 듯, 위장복의 얼룩점 무늬를 닮은 정교한 꽃잎 다섯 장도 5각 형태이니 말이다.

그 선인장의 유전인자는 어찌 되어있기에 그 생김새에 그처럼 희한한 꽃을 피워냈는지 믿기지가 않을 정도이다. 대체로 선인장은 웬만큼 오래되어야 꽃을 피운다. 꽃은 아름답기는 한데 거의 하루 이틀이면 수명을 다한다. 그러나 그 꽃은 달랐다. 수수하고 무뚝뚝해 보이는 사내의 전형이라고나 할까. 밤낮없이 엿새 동안 담담하게 피어 있다가 그야말로 ‘떠날 때는 말없이’ 바닥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현대는 튀는 패션의 시대다. 예쁘다는 말은 화려하다거나 아름답다는 표현에는 한 참 못 미치는 말이다. 그 선인장 꽃을 말하자면 유행 감각보다는 약간 촌스러운 데가 있는 고전미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마음속에는 아무렇게나 시류에 휩싸이지 않는 늠름한 바람벽이 있다. 너나없이 변덕부림을 시대적응이라고 당연시하고 있는 세상이다. 케케묵은 생각이라고 등한시해도 할 수없다. 고전미는 언제나 시대를 초월하고 앞섰으니까.

이름도 모르는 그 선인장 꽃이 눈에 밟힌다. 식물이나 사람을 보는 눈도 비슷해서 그럴 게다. 사람의 선입견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내 첫인상이 그랬고 말수가 적어 다가서기가 어렵더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별로인 터수에 주변머리도 없어 그랬을 게다. 그러나 꼭 덧붙은 말 한 마디. 알고 보니 영 딴판이더라고-. 글쎄다. 듣기 따라 어감이 이상하니 어찌 받아 드려야 할지. 나는 그것도 선인장 이름처럼 알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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