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은행 알로 은유 되돌기
2015.12.25 01:52
은행 알로 은유 되돌기 박 봉진 benpk@hanmail.net
문하 Y님의 소포를 받았다. 해마다 가을 끝 무렵 즈음 보내오는 은행 알 선물이다. 미국 동북부 Wisconsin주 거기는 5대호 찬바람에 지금쯤 날씨가 추워졌겠다. 은행나무 열매로 은행 알이 되기까진 여러 수작업 단계를 거쳐야 되는데. 농익은 은행열매를 따다 과육을 벗겨 발라낸 씨, 그 은행 알은 쏟으면 쇳소리가 날 때까지 잘 씻어 말려야 한다. 단계, 단계 정성을 들인 공력이 눈에 밟힌다. 은행 알 한 움큼을 쥐어본다. 참 묘하다. 손 악력에 힘을 주면 사보타지 말썽꾼들처럼 와르르 빠져나가고 느슨히 쥐면 꾀부리는 아이들 마냥 스르르 빠져나간다. 인력관리자의 어려움이 그렇겠다.
어느새 추수감사절이 임박했다. 친지들 모임 때 나눌 실과를 모아본다. 뒤뜰 수확물 단감, 석류, 아바카도 등에다 견과류(堅果類)는 은행 알과 호두 알을 청했다. 그 뒤쪽엔 세월을 지켜낼 듯이 모래시계가 수문장처럼 섰다. 지형이라면 파나마운하요, 풍물이면 장구형상이다. 모래시계를 물구나무 기압 주듯 뒤집었다. 중간이 잘록한 핀 구멍으로 모래가 누수처럼 샌다. 눈에 뵈진 않았는데 허송세월이 아래 공간에 싸였다.
유선형체 은행 알들을 V자로 놓고 위 중간에 한 알을 더했더니 사랑의 메시지 Heart 형상이다. 거둬들인 손아귀서 은행 알을 흘려본다. 쉼 없이 흐르는 세월 감촉이 살갑다. 손안을 간질이는 이 질감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으랴. 은행 알은 앞뒤가 뾰족해 저항을 덜 받게 날렵하다. 찹찹한 느낌의 순간으로 우주공간을 날겠다. 인연 졌던 사람들과 내 삶의 경과도 속절없이 스쳐지나가겠지. 그 Replay 동영상이면 보고 싶다.
은행나무는 아산 맹씨행단과 중국 당태종이 심은 1400년 현존목이 있다 해서 놀랬다. 그랬다. 은행나무는 내 삶의 터전과 세월 따라 인연도 달랐으니 어떤 은유로 풀이될까? 초등학교 상금 생 때 주입식 교육에서 분단별 토론식 실습이란 수업을 했다. 그때 건너 분단 수자는 내 말이 나오기만 하면 매번 받아쳤다. 그러면서도 스칠 때 마다 수자 볼은 왜 그리 발갰었는지. 그 집 앞엔 작은 은행나무가 있어 오가며 잎을 따 책갈피에 끼웠다. 무슨 보물인 듯 들여다보곤 했던 그 은행잎과의 교감을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래도 은행나무와의 순연은 틈새 기미도 안보였다. 악동시절 여름방학을 유야무야로 넘길 순 없었다. 고모님이 사셨던 곳, 옛 관아 둘레엔 큰 은행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또래 찬구들과 어울려 은행나무에 올라갔다. 자두만한 은행열매를 따서 주머니대로 채웠다. 그리곤 은행 알을 발라냈다. 그 재미는 곧장 끝장났다. 전신이 가려워 긁었다. 퉁퉁 붓고 돌기도 생겼다. 은행나무 수액 땜에 옻이 올랐다고 했다. 얼마나 고생했든지. 팽이놀이 때 채찍을 세게 칠수록 잘 돌았던 것은 알았지만 어찌 그 역설 은유를 알랴.
미국 이민 후, 두 번째 집은 새 집을 샀다. 앞뒤 뜰을 꾸며야 했기로 묘목 상에 갔다. 거기서 긴꼬(ginkgo)란 일본말 그냥의 영명 은행나무를 만날 줄이야. 은행나무원산지는 중국이고 우리나라도 이조 때 옛 서원에 많이 심었었기로 일본까지의 경로가 뻔해도 어쩌랴. 그네들은 2차 전쟁에선 졌어도 동서 부 미국 땅을 Japanese Garden 문화로 석권한지 오래니. 앞뜰에 작은 향단(香壇)을 꾸몄다. 회귀 본능에다 미련 여망도 한몫을 했으리라. 심지도 가꾸지도 않고 그 잎과 열매를 탐했던 철부지의 뉘우침도 들었다. 허나 사막성 토양이라 단풍들기 전에 잎이 마르고 열매도 맺지 않음을 뒤늦게 알았다.
그랬었는데, 어느 가을, 사계절이 뚜렷한 미국 동북부를 여행하다 은행나무 군락을 보고 놀랐다. 뉴욕 인근 ‘West point’ 미 육군사관학교 가로수 길과 근처 숲들에도 샛노란 은행잎이 마구 휘날렸다. 처치곤란 열매는 무더기로 한편에 밀쳐져있었다. 친지 공원묘지에선 더했다. 조심조심 발걸음이었는데 터진 열매 위 은행잎이 미끄러워 오금이 저렸다. 지천인 열매를 비닐 백에 담아 차에 실었다. 손에 묻힌 과육의 역겨운 구린내까지. 기왕 무친 손, 냇가에서 열매를 꾹꾹 눌리고 터뜨려 은행 알을 발라냈다. 손끝이 아리고 이빨이 떨릴 때 마주봤던 아내와의 무언 화소(話素), 오늘은 무슨 말을 나눌까?
은행 알은 호두알처럼 씨 외피가 덜 단단해 망치로 깨지 않고 벤치로 옆구리를 죄면 잘 까졌다. 상아색 표피와 진초록 알갱이는 환상 조화에다 무언 메시지의 핵심이다. 은행 알을 보낸 애제자의 마음을 알만하다. 그의 수작 작품들이 그랬듯 노 스승에겐들 심중이 울릴 은유 한마디를 등한했겠는가. 삶의 행로에서 물러터지지도, 고집스럽지 말란 뜻도 있을 게고. 품위 있는 조화로움도 청한 듯하다. 은행 알은 땅위로 잘 구를 체형이 아니다. 우주시대를 살아갈 패턴을 암시한다. 은행 알처럼 주춤거리진 않으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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