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고 깊고 넓은...

2016.12.06 14:42

채영선 조회 수:49

높고 깊고 넓은...  /  소담  채영선

 

1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한국의 첫눈 소식을 듣고 이제나저제나 했는데 외출을 하려니 자동차 앞 유리창에 작은 눈발이 포르르 내려앉습니다. 유롭 여행에서도 함께 찍은 사진이 몇 장 되지 않아서 서운했는데 요즘 셀카봉이라는 유용한 것을 세일한다기에 하나 사려고 나가는 길입니다. 난생처음 보는 경치가 좋아 연신 샷터를 누르는 나와는 달리 어쩌다 찍는다는 것이 아내만 찍는 남편 덕분에 늘 혼자 서 있는 사진이 대부분입니다.

 

셀카봉을 사왔지만 기계라면 잘 모르는 우리는 겨우 꺼내놓고 보기만 합니다. 이래도 저래도 일을 안 하는 셀카봉, 모레 다니러 오는 큰 딸 내외를 기다리자고 결론을 내고 말았지요. 셀카봉 사러간 길에 만난 나보다도 덩치가 커 보이는 인형이 맘에 들어 가지고 와서 내내 사슴 아저씨라고 해피에게 일러주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사슴이 아닙니다. 알록알록한 무늬와 조그만 뿔 기린이었습니다.

 

쇼파 코너에 앉혀놓으니 식구가 하나 늘었습니다. 백인 할머니들 사시는 집에는 대개 인형이 있습니다. 자식들을 타지에 보내고 혼자 계시는 분에게 위로가 되리라는 생각을 했지요. 푹신한 기린 옆에 앉아서 기대어보니 여간 느낌이 좋은 게 아닙니다. 두텁고 큰 쿠션이 있지만 쿠션에 기대는 것과는 아주 다른 감각이었지요. 양쪽에서 두 사람이 기대어도 넉넉히 감당을 하는 기린 인형을 놓고 갸우뚱하며 망설였는데 데리고 온 것이 정말 잘한 일이었습니다.

 

소도 기댈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 속담이 있지요. 잘 아는 노래에도 'lean on me'라는 가사는 언제나 달콤하고 따뜻한 마음이 들게 합니다. 누군가 보내준 글에 이런 내용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가장 소중한 일이며 당신이 만나고 있는 사람이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요.

 

기린 인형에 기대어 피곤이 풀리고 나니 눈이 많이 올 것 같은 날씨에 뒷마당 잔디를 덮고 있는 메이플 낙엽이 생각납니다. 밤새 영하의 기온에 얼다 녹은 낙엽 위에 눈이 혹시 많이 온다면 큰일이지요. 섭씨 2,3도 날씨라고 오늘도 미룬다면 열심히 돌보는 잔디에게는 못할 짓을 하는 것입니다. 벌써 여기저기 구멍이 나있습니다. 엉덩이가 큰 나뭇잎 아래에서 소리도 못 내고 사라진 구멍이 사극에서 나오는 천연두의 자국보다 더 촘촘합니다.

 

열사의 햇빛을 가려주고 남부럽지 않은 맑은 공기를 내어주는 이파리들은 다시 자기가 자라던 땅의 영양소가 되기 위하여 망설이지 않고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요. 양식이 부족한 시대에는 70세만 되어도 고려장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어느 태평양 연안의 작은 섬에서  나이 들고 병이 난 집안의 노인을 무인도에 데려다 주고 가족이 돌아오는 실제의 풍속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자연과 사람의 다른 점은 자연은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만 사람의 경우는 누군가에 의한 물리적인 힘이 상대적으로 약한 쪽을 향하여 일방적으로 밀어낸다는 것입니다. 자연에게 배우라고 자연처럼 되라고 인류의 스승들이 가르친 것은 바로 이런 것 아니었을까요. 언제나 정반합의 논리로 이어지는 권력의 세습에서 약자들은 언제나 강자의 이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약자가 많이 모여 있다고 강자가 될 수 있을까요. 혹시 강자가 되었다고 착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메시야라고 부르던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떡을 배불리 얻어먹었지만 다 돌아섰고 끝내 죄 없는 예수님을 살인자와 바꾸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해달라고 자기들을 억압하는 세력에게 소리 지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제자들 중에서 회계를 보던 가룟인 유다도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여인을 보고 삼백 데나리온이나 될 향유를 허비했다고 분히 여기며, 3년을 따르며 모시던 예수님을 은 30을 받고 내어주는 역할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조물주 하나님을 대신할만한 대상을 재물입니다. 이것으로 모든 결정은 결정되고 번복되기도 하며 배반하여 팔며,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모이기도 하며 흩어지기도 하는 것이지요.

 

성경 말씀은 어떤 선한 행위를 하든지 하나님이 주셔서 하게한 것임을 알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재물도 주시고, 시간도 주시고, 건강도 주셔서 그곳에서 그 일을 하게 된 것임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늘 기억한다면 섣불리 내 맘대로 사용하는 것이 두려울 것입니다. 선한 청지기가 되어 내게 맡겨주신 주인의 것을 잘 사용하고 지켜야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때문인 것을 고백합니다. 낙엽을 치워준 일도 기린 인형을 가져온 일도, 사용 못하는 셀카 봉을 가져온 일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광고를 보다가 서랍 깊이 넣어둔 유에스비를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자료가 들어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우연히 생각나게 해주신 하나님은 얼마나 자상하시고 섬세하신지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알 수 없는 은혜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잔디를 파랗게 지켜주시는 하나님

푹푹 빠지도록 눈으로 덮어주시는 하나님

봄이 오기까지 잔디를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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