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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놀라움> 하늘나라는 크고 넓은 공간
2016.12.24 05:59
삶의 놀라움: 하늘나라는 크고 넓은 공간
하늘나라는 크고 넓은 공간이며 거룩한 영과 사랑이 가득하고 바람소리 같은 언어로 꽉 찬 궁창의 궁전일 것이다. 그곳에 가득한 언어는 진리(眞理)를 나타내는 언어임에 틀림이 없다. 세상에는 ‘진리’라는 말도 여럿이고 그 의미도 한 뜻으로 통일 되지 않아서 진리라는 말일지라도 인간세상에 불고 있는 바람 같이 요동하는 것임에랴! 진리(眞理)라는 뜻의 헬라어 “알레세이아 aletheia”는 “망각하다 toforget” 라는 의미의 동사의 부정형이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망각하기를 중단한다 stop forgetting” 라는 의미이다. 단어의 역사가 그 단어의 현재 의미를 결정하지는 않지만 이 경우에는 분명히 그런 부분을 암시해 준다. 진리에 관한 기독교의 견해는 망각에 근거하지 않고 기억에 근거한다. 진리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는 것이다.
변치 않는 이치가 진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과 말씀은 물론, 언어로 나타나는 것뿐만 아니라 하늘도 진리이고, 해와 달과 별도 진리이고 나날이 불어대는 바람도 진리이다. 바다도 산도 들도 진리이다. 이것들은 거짓 없는 속성 그대로 존재하기에 언제나 진리 편에 서 있다.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들이 제 본성을 지키지 못하고 나날이 변화를 거듭한다면 그 속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진리는 “살아 있음”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속성이 있다.
세상에는 나날이 바람이 불고 있다. 바람은 불지라도 그 속성은 그대로 있다. 나는 지금 이 땅에 살고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같이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감사한다. 이 땅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내가 하나님의 소유에 속해 있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매우 감격적인 놀라움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야말로 하나님 계시는 전정(殿庭)이 아닌가(시135:2). 또한 모든 사람들과 같은 땅에서 같은 세대를 살고 있음은 여간 행복한 삶의 놀라움이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따라 여기에 다시 새 하늘 새 땅이 펼쳐질 때, 내가 어디쯤에 속해 있게 될지를 나는 아직은 모른다. 현재의 땅과 새 땅은 똑같은 곳이 아닐 것이기에,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언어로는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가 없다(계21-23장). 지금의 땅과 새 땅 그리고 구속된 땅과 변화된 땅은 과연 어떻게 다른 곳인가. 그때의 진리를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되는가.
C. S. Louis는 밀턴의 <실락원>을 읽으면 매 순간 매 초를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또 주장하시는 우주에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해 준다”고 했다. 나는 지금 이 땅 위에 살아 있다. 내가 살아 있는 이 땅은 하나님의 세계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신비로운 지역이다. 지금 여기 부는 바람도 하나님의 바람이다. 이런 곳에 지금 내가 서 있다.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진리 안에 내가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이야말로 믿는 자들이 점유(占有)된 영적(靈的) 현실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는 것이다. 죽어서, 죽은 후에 가는 곳만 하늘나라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늘나라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계시기 때문이다.
죄인인 내가 이런 곳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지극하신 은총이다. 여기에 내가 존재하므로 나의 개성도 작용하고 있다. 개성은 죄와 저주보다 선재한다지만 나의 경우는 개성보다 죄와 저주가 앞 선 것이 아닌가. 이런 심정은 나의 부족함에서 오는 것이다. 자신이 안 선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나에게 죄와 저주가 나의 개성보다 먼저 나타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개성을 창조하셨듯이, 하나님의 창조물만 가지고 있을 수만 있다면 죄와는 무관한 삶으로 계속될 수도 있으련만… 하늘과 해와 달과 별과 바다처럼 하나님 편에 선 순수함으로 진리의 삶을 경험하는 놀라움을 만날 수는 없을까.
여기에 지혜(智慧)를 덧붙인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아닐까. 지혜는 윤리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진 경우가 많다. 진리의 특수한 의미를 항상 기억해야 할 일이지만, 구약의 대부분의 경우 지혜(Wisdom)는 단순히 기교(Skill)나 총명(Sagacity)에서조차도 어리석음과 허영이 뒤섞인 단순한 인간의 지식을 의미하고 있다(전2:12-15). 다만 욥28장과 시편 일부(37:30;51:6;91:12;111:10)에서만 지혜의 윤리적 개념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유명한 솔로몬의 지혜도 이와 같은 의미의 지혜는 아니다. 솔로몬은 자연과학에 통달한 자(왕상4:33), 명판사(왕상3:16-28) 그리고 높은 식견을 가진 자로 이름을 떨쳤다(왕상10:1-9). 그런 그였지만 그는 유달리 사치하기를 좋아했고(전2:1-11), 이방신을 믿는 자와 결혼했고(왕상11:1-3), 우상숭배를 했고(왕상11:4-8),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화 하는(왕상12:1-4) 등의 잘못을 범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일생은 인생을 지혜롭게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매우 큰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진리 안에 묻혀 살 지라도 진리를 따르지 못하는 한계에 매어 있다. 지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솔로몬의 지혜와 솔로몬의 실책은 각각 그 한계에 갇혀진 것으로 우리들 삶의 놀라움의 교훈으로 나타나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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