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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놀라움> 성경말씀과 실용문만이 아니라
2016.12.24 06:50
삶의 놀라움; 성경말씀과 실용문만이 아니라
성경말씀과 실용문만이 아니라 예술문까지도 나날이 읽으면서 살아가는 삶이 우리네 일상이다. 어떤 장르의 글을 읽든지 지금 내가 접하고 있는 글은 그림이나 영화처럼의 입체감이 없는, 단지 외줄로 된 글줄들이다. 읽으면 읽는 것만으로 끝나고 마는 경우가 거의 전부이다. 외줄로 된 글을 읽기 때문이다. 글로 읽기 전에 그 글에 딸린 내용을 영화나 그림으로 감상해 보라. 글을 읽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넉넉한 이해가 우리를 감싸 줄 것이다. 한 송이의 꽃에 대하여 글을 읽는 경우와, 그 꽃이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를, 아무래도 진짜 꽃을 만져봄에 비하랴! 이처럼 글로나 그림으로나 영화로의 표현에는 그만한 나름나름의 한계가 있다. 아무래도 실제로 보고 느끼는 일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한 장의 지도를 펴놓고 그 지도에 나타난 지역의 특색을 어찌 다 알아낼 수 있을까. 사진 한 장으로 신랑을 택하고 사진신부를 점 찍던 초기이민자들은 한 장의 사진으로 어찌 그 배우자의 제반사항을 파악할 수 있었겠는가. 춘향전을 읽어도, 심청전을 읽어도 거기에 등장한 작중인물들의 겉모습 외에 심리나 개성을 파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렇듯,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님을 알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이 인간에게 접근하기 위하여 인간이 만들어 사용하는 문자에 담겨졌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의 문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다. 여기에 적지 않은 문제가 따르고 있다. 유한한 인간의 지식과 경험에서 나온 인간의 언어로써는 무한하신 초월자인 하나님의 실재를 확실하게 표현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제한된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의 실재와 그의 섭리를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세상’, ‘사랑’, ‘독생자’, ‘멸망’, ‘영생’ 등의 말씀을 읽었다 해도, 거기 나탄난 단어 자체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그 단어 자체는 하나님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다. ‘세상’, ‘사랑’도 없고, ‘독생자’도 계시지 않는다, 따라서 ‘멸망’, ‘영생’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문자가 갖고 있는 한계이다. 다만 독자의 가슴 속에 희미한 관념으로 잠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니, 책을 읽는 일도 그렇고, 특히 성경을 읽는 일도 이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한 줄을 읽으면 한 줄 그대로, 두 줄을 읽으면 두 줄 그대로 나의 뇌리를 스치고 자나갔을 뿐이니, 내게 남아 있는 확실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읽는 방법만으로는 하나님 만나뵙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默想하는 자”(시1:2) 일 때 비로소 그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음이다. 이야말로 진실과 진리에 이르는 확실한 영적 체험이다. 이 체험은 인간을 영화롭게 한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이 된다. 여기서의 묵상은 ‘묵묵히 마음 속으로 생각함’이나 ‘묵고默考’나 또는 ‘묵사默思’가 아니다. 온전한 기도이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흠모하며 드리는 기도이다. 이렇게 성경말씀을 읽으며 묵상에 잠기면 그 안에 성삼위의 거룩하심이 나타나 오신다.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바울 등 믿음의 여러 선조들은 묵상과 기도 중에 하나님을 만났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形體로 비둘기 같이 그 위에 강림降臨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3:21-23)- 이런 관상觀想으로 일상日常의 실천적實踐的 관심을 이탈하여 순수純粹한 이성理性과 영성 활동靈性活動에 의하여 그 예지叡智를 인식하는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태양의 강렬한 햇빛과 나의 시선이 마주침 같은 다메섹 도상의(사울이 다메섹 도상 카오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감격으로 만나는 삶의 놀라움을 경험한 자들도 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놀라움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엄청난 복이 아닐 수 없다. 이로써 복 있는 사람의 자리에 앉게 된다. 그런데도 말씀묵상을 두려워하거나 거북스러워 하는 자들이 있다. 말씀은 읽되 묵상하기를 주저하고, 주님 만나는 일을 외면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가까이 오지 않으신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默想하는 자”만이 삶의 놀라움을 확실하게 경험한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119:97)
“내가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明哲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勝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시119:9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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