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밭매는 아낙네

2018.11.26 10:49

김현준 조회 수:13

콩밭매는 아낙네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김 현 준

 

 

 

  차령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칠갑산은 충청도 청양에 있는 산이다. 구릉과 계곡이 많고 고을도 많다. 지천이 산골짜기를 휘감아 천정호로 흐른다. 10여 년 전 호수를 가르는 출렁다리를 놓아 관광명소가 되었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 팔각정이 있고, 그 옆에 ‘콩밭매는 아낙네’ 동상이 서 있다. 키는 170cm에 가깝고 체중은 70kg이 넘을 듯하다. 검정고무신은 265cm 정도인데, 여성치고는 기골이 장대한 편이다. 지금까지 칠갑산 일대에 세워진 자그맣고 아담한 모양의 아낙네 상과는 대조적이다.

  콩밭을 매느라 아픈 허리를 곧게 펴고 오른팔을 들었는데, 주먹 쥔 거친 손이 이마를 짚고 있다. 햇볕을 가리고 땀을 닦을 흰 수건 아래 또렷한 눈동자가 전방을 주시하고 있다. 무엇을 찾고 있는지, 멀리서 걸어오는 젊은 여인네가 시집간 딸이 아닌가 굽어보는 눈길 같기도 하고….

  나이는 50대 중반쯤 될까? 첫 딸을 시집보낸 친정어머니의 그리움이 묻어난다. 여인의 삶은 신산했다. 남정네의 우악스런 성정을 견뎌야만 했고, 고초당초보다 매운 시집살이를 이겨내야만 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땐 호미 한 자루 챙겨들고 산기슭 콩밭으로 내달았다. 길고 험난한 인생살이, 어찌 잡초가 꾀지 않으며 땀 흘릴 일이 없을까?

  왼손에 들고 있는 호미는 남정네들이 논에서 지심 맬 때 쓰는 호미처럼 투박하다. 동풍이 살랑 불면서 검정치마 자락이 서편으로 흐른다. 땀을 식히는 그녀는 피곤한 기색이지만 서글픈 모습은 아니다. 거친 풍파를 거뜬하게 견뎌낸 여장부의 포즈이며, 가난을 이기겠다는 어떤 결기마저 느껴진다. 부드러울 것 같은 충청도 아줌마와는 사뭇 다른 인상이다.

 

  갑순이는 홀어머니 곁을 떠나 칠갑산 산자락 아래 조그만 동네의 농부에게 시집을 갔다. 그녀는 콩밭을 매며 반평생을 살았다. 얼마 전에 맏딸이 어미처럼 시집을 갔다.

  시어머니의 시집살이가 견디기 어려우면, 갑순이는 콩밭 매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산자락에 일구어 놓은 밭으로 내달았다. 호수를 거쳐 산등성이로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이 막힌 가슴을 틔워주었다. 일밖에 모르는 무심한 남편을 향하던 원망도 구름처럼 흩어졌다.

  ‘그래, 사람의 한 평생 바람처럼, 구름처럼 흘러가는 게지….’ 아낙은 싱그럽게 자라는 콩 줄기를 바라보며 마음을 다독였다. 젖몸살로 부푼 가슴을 부여안고 귀가를 서둘렀다. 배고프다고 보채는 아이 곁엔 퉁방울처럼 커다란 눈을 치켜뜬 시어머니가 있었다.

 

  “무슨 짓을 하고 이제야 오는 게야? 아이 젖 먹이는 걸 벌써 잊었남?

  “금세 때가 지난 걸 몰랐네요. 죄송해요.

  시어머니는 아이 탓을 했지만, 사실 자신도 시장기가 들어 짜증이 나던 참이었다. 잠시 아이 젖을 물린 뒤 밥 바구니에서 식은 보리밥을 양푼에 덜어놓고 된장에 풋고추를 박아 내놓았다. 우물에서 찬물을 떠 올리니, 시어머니는 만날 이것뿐이냐며 불평을 했다. 아낙은 배가 고픈 것보다 피로가 몰려오는 걸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젖을 물린 채 스르르 잠이 들었다. 꿈길에 뒤뚱거리며 산길을 내려오는 친정어머니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어머니일까, 자신일까? 갑순이는 한참을 헷갈렸다, 콩밭 매는 아낙네는 오래 전부터 칠갑산 아래 거기 있었고, 지금도 볼 수 있다. 그 존재성이 입으로 전하여 ‘콩밭매는 아낙네’란 노래로 탄생했을 것이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는 날 칠갑산 산마루에()

 

  부여 출신 작곡가 조운파는 어느 여름날 버스를 타고 칠갑산을 지나다가 콩밭을 매는 아낙네를 보았다. 그는 문득 어렸을 적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화전민의 가난한 아낙네가 홀아비에게 어린 딸 갑순이를 민며느리로 시집보내고 밭뙈기를 받았다는 가슴 아픈 사연이었다.

  조운파가 작사 작곡한 이 노래는 대학가요제에서 주병선이 불러 금상을 탔다. 노래가 널리 회자되어 콩밭매는 아낙네는 칠갑산의 상징이자, 청양군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콩밭매는 아낙네’ 동상은 3대에 걸친 사연을 품고 있다. 화전민의 아내인 친정어머니와 밭뙈기에 팔려간 갑순이, 그리고 그녀의 딸이 합쳐졌다. 그녀는 바로 과거의 충청도 아낙이자 현재의 인물이면서 또한 미래의 여성이다.

  콩밭을 매는 시기는 여름철이다. 푹푹 찌는 삼복더위에 흐르는 땀을 연신 닦는 아낙네가 떠오른다. 삼베적삼이 흥건하게 젖었다.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고향 뒷산 산등성이의 밭을 매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남편을 여윈 여인네가 콩밭뿐 아니라 논두렁에서 얼마나 많은 땀과 한숨을 흘렸을까? 내 눈 언저리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2018.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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