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이야기
2008.09.05 18:30
미국에 오래 산 이력을 알려면 먼저 상대의 첫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가를 본다. 모르는 사람에게도 기분 좋게 웃으며 굿모닝!, 혹은 하이! 하고 인사를 나눌 줄 알면 그는 분명 미국생활에 익숙하다고 봐야한다.
또 한 가지는 식후에 달콤한 디저트를 찾는다면 그것도 적잖은 미국생활의 이력을 말해주는 일이 될 것이다. 건강에 좋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케이크나나 파이를 디저트로 먹는 것에 나도 언젠가부터 습관이 되었다. 거기에 진한 블랙커피를 한잔 곁들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양질의 음식에 비하면 그다지 값도 비싸지 않고, 향이 좋은 커피와 디저트까지 즐길 수 있는 곳이 바로 미국적 분위기의 ‘미미스 카페(Mimi's Cafe)’이다. 중산층의 미국인들이 주로 찾는 그곳은 체인방식으로 캘리포니아의 각 시티마다 똑 같은 모양의 건물과 인테리어로 운영된다.
어느 인종의 분포가 많으냐에 따라 카페를 이용하는 손님은 다르지만 보통은 백인들이 주 손님을 이룬다. 백인보수 동네에 살던 이민초기, 집근처 번화한 쇼핑몰에 막 짓기 시작하던 단층의 아름다운 건물은 ‘미미’란 이름에서부터 나를 유혹했다. 동화 속의 환상적인 집처럼 길게 뻗어 내린 지붕선과 붉은 기와, 클래식한 작은 창문, 건물 주변에 심어진 색색까지 꽃들과 함께 그 입구에선 늘 흘러간 팝송이 경쾌하게 울려온다.
5.60년대의 미국을 연상시키는 카페 안 분위기는 한국이 고향이 내게도 왜 그런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조금은 마음이 외로워지고 배도 몹시 고픈 날이면 가족이나 친구가 없이도 혼자 그 카페를 찾아간다. 커피와 뜨거운 파스타를 시켜놓고 정작 주로 먹는 것은 음식에 딸려 나온 바구니 안의 빵이다. 호두와 건포도를 곁들인 달콤하고 부드러운 당근 빵과 쫄깃거리는 후렌치 빵을 뜯다보면 메인디시인 파스타는 거의 손도 못 댄 채 그냥 배달용 박스 안으로 들어가 집에서 또 한 끼를 때우게 된다.
얼마간의 음식 값을 지불한다 해도 결코 손해 볼 일이 없는 곳, 젊은 연인들 보다는 주로 가족끼리 많이 오는 식당이다. 실내장식은 복고풍이면서도 오밀조밀 귀엽다. 여닫이 식 창문의 커튼과 테이블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색 같지만 그조차 특별한 인테리어라는 걸 금방 알아채게 된다. 천정이 높은 한쪽 벽엔 좁은 발코니 같은 것이 있어, 운치 있는 골동품 오르간이나 트럼펫, 주전자 등이 아무렇게나 놓인 듯 진열되어 있다. 그러나 자꾸 바라보면 그것이 마구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뭔가 짝이 맞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구색을 이룬 그곳은,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누구나 편안하게 찾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인근의 여자들과 수다가 필요한, 뭔가 마음이 허전한 날이면 우리는 그 카페를 찾아간다. 미국인 손님들 속에 동양인 여자들이 좀 오래도록 앉아 있어도, 미소년 같은 웨이터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자꾸만 커피를 리필 해 준다. 계산을 할 때 평소보다 1,2불 정도의 팁을 더 얹어주면 환한 웃음을 짓는 그의 표정이 고맙다. 단 1불로 누군가의 미소와 친절을 더할 수 있다면 그보다 돈이 적게 드는 행복이 어디 있겠는가.
영어권의 카페에서 한국말로 실컷 수다를 떨어도 거리낄 것이 없지만, 이민 1세대에겐 동족끼리 공감하는 한인타운의 생활권을 무시할 수가 없다.
샌디에이고의 작은 한인타운은 콘보이(convoy) 거리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한국인 상점들이 집중되어 있는 엘에이의 대형 한인타운에 비한다면 이곳은 타 인종 상점 사이에 한국인 가게가 섞여 있는 것이 보통이다.
콘보이 거리의 작은 쇼핑몰, 일본 라면집 옆엔 베트남 인이 운영하는 생선요리집이 있고, 그 옆에 한국식당이 있다. 그리고 길가에 면한 맨 끝자리엔 얼마 전부터 예쁜 카페가 들어섰다. 가끔은 식도락을 즐기는 가족을 따라 그 옆 베트남 생선요리 집에서, 톡 쏘는 매운 소스에 버무려 비닐봉지 채 쪄낸 새끼가재를 먹고 나면 입안이 불에 덴 듯 달아오른다. 큰 새우만한 가재의 두꺼운 껍질을 손가락으로 벗겨 입에 넣고, 머리 부분을 쭉쭉 빠는 그 모양새는 사실 좀 점잖지 못하다. 그래서 더욱 좀 고상하고 달콤한 디저트가 생각나던 차에 그 옆에 새로 문을 연 ‘벤티 카페(Venti Cafe)’는 안성맞춤이다. 여름이면 고국에서 즐겨먹던 팥빙수 메뉴가 있어 더 반가운 곳, 5,60대로 보이는 주인부부가 늘 친절하게 맞아준다.

어느 날 저녁 장례식에 갔다가 여자 셋이서 그곳에 들어섰다. 차 한 잔 마시자며 나를 그곳으로 이끈 후배는 생각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카페의 주인부부가 30년 만에 다시 맺어진 첫사랑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다 두 사람이 70년대 각기 다른 보컬의 멤버였다니 흥미가 안 당길 수 없다. 어스름한 페리오의 야외 테이블에서 우리끼리의 즐거운 수다보다 그 얘기는 더 재미있다.
요즘 주변의 4.50대 여성들과 대화를 나누며 나이 먹은 여자들에게도 사랑의 기운이 번뜩임을 새삼스레 알게 된 나는, 그날 밤 카페의 여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날따라 외국손님까지 가득 들어찬 바쁜 카페에서 사랑의 해후를 빌미삼아 잡아당긴 내 손길에 여주인은 우리 테이블을 떠나지 못한다. 길가를 지나는 자동차 불빛만이 가끔 비쳐올 뿐인 어두운 페리오에서 사랑의 여주인공은 얼굴을 빛낸다.
그녀는 지난날 ‘늘 여섯’이란 여성보컬의 멤버인 이영주씨. 남편 박명길씨는 록 그룹 ‘드레곤스’의 리드 싱어였다. 유난히 여성 팬이 많던 매력적인 보이스의 박명길씨를 이영주는 오빠처럼 따르며 사랑했단다. 그러나 인기 많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결국 박명길씨는 다른 여성과 결혼하기에 이른다. 첫사랑을 가슴에 품고 미국으로 건너온 이영주씨는 자신의 노래를 사랑하던 팬과 결혼하여 미국에 정착하고, 그들은 서로 소식을 모른 채 30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남편과 사별한 아픔을 삭히고 있던 어느 날 이영주씨는 친구로부터 우연히 첫사랑의 소식을 듣게 된다. 미국에 건너와 샌디에이고에 정착해 있던 박명길씨도 오래전 이혼 후 혼자가 되어 있었다. 재회는 자연스레 결혼으로 이어졌고 젊은 날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던 그들 부부가 내 눈에 남다른 분위기로 보여졌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수더분하고 친절해 보이던 이영주씨는 사랑 이야기를 시작하자 남다른 카리스마를 보인다. 젊은 날 섰던 무대매너의 영향일까. 아니면 사랑을 쟁취한 여인 특유의 자신감이랄까. 어둠 속에서도 잠잠히 빛나던 그녀의 표정이 슬그머니 부러워진 우리 여자 셋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어 본다.
젊은 날 이루지 못한 사랑을 떠올리는 걸까. 아니면 아직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도 않았다는 사랑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동안 저토록 애닮은 사랑을 한번은 해보기나 하겠냐면서.

샌디에이고 한인타운에서 거의 유일한 한국인 카페인 그곳에 가면 특별히 약속을 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5,60년대 문인들이 드나들던 명동찻집이 그러했다는 것처럼 한국마켓에 장을 보러갔다가 커피가 생각나 혼자 들러도 누군가를 만나 한참 대화를 나누게 되는 곳이다.
길을 가다 카페에 들려본 오후, 영락없이 아는 사람을 만났다. 그녀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이민 왔던 여인, 엘에이 북쪽의 한 시티에서 아이들을 같은 학교에 보내며 알게 되었던 그녀를 오랜 세월이 흐는 뒤 샌디에이고에서 다시 만나다니······. 넓은 미국 땅이어도 한국 사람들의 행보는 거의 정해지다시피 좁은 반경이라지만, 그녀와 내가 또다시 같은 도시로 주거환경을 옮겨온 것은 정말 우연이 아닐 수 없다.
서로 지난 이야기를 하며 앉았다보니 우리가 처음 알았을 당시 초등학생이던 아이들이 어느새 대학을 졸업한 어른이 되었다는 걸 인식한다. 더불어 30대에서 50대로 접어든 서로의 나이를 생각하며 조금은 허전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유복한 생활에 고생 없이 살아온 그녀의 얼굴에도 잔주름이 내려앉아 있는 것을 바라본다. 내 얼굴에도 세월의 흔적이 보이리라며 좀 쓸쓸해지는 순간, 그녀가 주문한 ‘와플요’가 테이블 위에 올려 진다. 이제는 낯이 익은 여주인 이영주씨가 내게 반가운 미소를 짓는다.

팥빙수와 함께 이 벤티 카페의 명물인 ‘와플요’는 호두를 넣어 직접 구운 와플 위에 시원한 후로즌 요거트를 높게 얹고, 딸기, 키위, 망고, 블루베리 등 각종 과일을 곁들인 아름다운 디저트다.
아직 그 카페에서 팥빙수와 커피밖에 맛보지 못한 나는 우연히 만난 옛 이웃이 사준 ‘와플요’의 시원하고 달콤한 맛에 그만 녹아들고 만다.
아무리 분위가 좋고 음식이 맛있어도 미국인들이 주손님인 미미스 카페보다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벤티 카페가 정겹긴 하다. 미국사람들이 좋아하는 달콤한 디저트를 즐기고, 영어를 사용하고, 법적으로 미국시민이 되어도 변하지 않는 우리들의 정체성! 타국임에도 한국말로 대화를 나눌 사람들을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더구나 사랑의 재회로 더 특별한 사연을 안게 된 벤티 카페는 ‘사랑’이라는 명제에 아직도 목말라하는 여인들의 마음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람이 어찌 음식만으로 살 수 있으랴. 카페를 찾는 것은 음식보다 대화가 그리워서 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영어를 잘 한다 해도 미국인과의 관계엔 정서적으로 한계가 있다. 더러 그들을 이웃으로 두고 서로 저녁식사에 초대도 하고 친분을 맺은 적도 있지만 그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반면 동족끼리의 친분에도 서로 너무 가까워 발생되는 문제로 인해 때론 멀어지기도 했다.
사람의 관계는 어느 땅에 살건 늘 필요와 불필요의 조건 사이를 방황하게 된다. 고국을 떠나 이민을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조금은 정신적 공황상태를 경험하고, 그로 인해 너무 깊게 바라보다 어긋나버린 인간관계를 몇 번인가 체험해온 나는 새삼 ‘카페적 인간관계’라는 말을 만들어 낸다. 우연히 만나 부담 없이 말을 나누고 별다른 약속 없이 헤어지는······.
미국 넓은 땅에서 좁은 테두리를 형성한 한인타운엔 무섭게 발전하는 고국에 비하면 고전적인 문화가 형성 중이다. 언제든 찾아가면 말 나눌 사람을 만나게 되는, 손님들을 훤히 기억하는 주인부부와 정겨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60년대식 카페가 이곳에서 무르익고 있다.
우리는 때로 그곳에서 옛사랑의 이야기를 듣고 향수를 달래고 새로운 힘도 얻게 될 것이다. 이 넓은 타국에서도 고국의 고전적 문화를 살며 삶의 여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 이 얼마나 낭만적인 일인가. 더구나 지척엔 바다가 있어 맘에 맞는 이웃들과 언제고 달려가 일광욕이나 바비큐 파티를 즐길 수도 있으니 고국을 떠나 사는 것이 좀 외로워도 이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한인타운의 대형마켓엔 부족함 없는 한국식품이 늘 우리를 기다리고, 타국과 고국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이 땅은 햇빛만 피하면 공기조차 늘 서늘한 여름이다.
그래도 공연히 쓸쓸해지는 날, 그 카페에 가면 누군가 한 잔 커피에 말을 나눌 사람이 있어 든든한 곳, 나는 카페식 인간관계를 부담 없이 꿈꾸어 본다.
(월간 예술세계 2008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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