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나에게 축복인가
2008.10.05 16:01
“미국, 나에게 축복인가”
미국이라고는 하지만 엘에이에 살다보면 미국이라는 생각보다는 한국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더 많음이 사실이다. 만나는 사람이 대부분이 한국 사람들이고 부딪히는 말들이 한국말들이니. 한인 타운을 나가면 보이는 것이 한국간판이고, 한국 이름들이다. 처음 한국에서 다니러 온 남편이 “한국에도 영어간판이 이보다는 더 많다”라고 할 만큼 영어간판보다는 한국어로 된 간판이 더 많은 한인 타운. 전화설치를 문의 할 때나 전기, 가스를 비롯하여 어떠한 부분도 한국말이면 웬만큼 다 되는 것이니 어려울 것도 없고 고생할 것도 없이 미국생활을 이어간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나의 앞길을 닦은 이민초기의 많은 분들이 있었음을 감사한다. 그들의 수고와 고생이 있었기에 오늘, 이렇게 아무런 준비 없이 미국에 와서도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덕에 가끔은 내가 미국에 있는지 한국에 있는지 분간이 안 될 때도 있고 한국을 그리워할 때라 해야, 남들은 미국이 ‘자연이 아름다운 나라’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내 가슴속에 있는 한국의 산과 바다가 그리울 때, 혹은 친구가 그리울 때, 가족들이 보고 싶을 때 외에는 불편함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의 향수가 나를 둘러쌀 때는 마음이 많이 허전하다. 고향 바다의 파도소리가 귀에 울려올 때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리며 하늘 나는 비행기를 멈추어서 올라타고 싶은 마음이다. 가을에 갑자기 노오란 은행잎이 그리울 때나, 온 산을 붉게 물들인 단풍나무가 눈앞에 어른거릴 때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분출되어 올라오며 나는 겉잡을수 없는 외로움과 향수에 몸을 떤다.
이민살이의 서러움과 아픔으로 속에서 끓어오르는 울분과 외로움을 마땅히 나눌 사람 없어 혼자서 삭혀야 할 때도 입에서 곰팡이 냄새가 나도록 앙다물고 살아온 세월들이다. 그 모든 시간들을 조금이라도 변상하려 몇날 며칠이라도 입 열어 그동안 염해 두어 악취 나는 모든 이야기들 서리서리 풀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당장이라도 돌아가야겠다.' 외치며 나를 얽고 있는 오만가지 모두 마다하고 이민 가방 열어놓고 씩씩대며 보따리 꾸리다가 그 가방 체 다 차기도 전에 제풀에 꺾여 털썩 주저앉아 엉엉 소리 내어 한바탕 울고는 모든 것 다시 꺼내 제자리 한다.
왠지 미국은 나를 모두 버려야 할 것 같고 존재의 포기를 요구하는 곳인 것 같은 생각에 더 싫다. 내가 아는 사람들을 봐도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대학에서 공부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별 볼일 없는 초라한 일을 하면서 그 속에서 행복을 만들어 가고, 한국에서는 꽤나 알려진 부분의 높은 직위에 있었던 사람도 미국이란 대국(?)에서 하루하루의 삶을 위하여 모두를 다 내어던지고 가족들의 입을 위하여 초라함도 마다 않고 살아가는 모습들이 가끔은 가슴 아리게 한다.
처음 미국에 와서, 한국 사람들은 ‘엘에이를 쓸고 다니고, 주름잡고 다닌다.’는 말을 듣고 역시 어디에 가서든지 빛을 발하는 한국인들인가 보다고 자부심을 느꼈었는데, 그게 아니라 한인들은 청소 업에 종하는 사람들이 많고, 봉제공장에서 치마에 주름을 잡는 일을 많이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웃었다. 교사생활을 하던 사람이 재봉틀의 발판을 열심히 밟으며 먼지를 한껏 마시고도 한날한날 쌓이는 달러에 기대를 걸기도 하고, 육군 장교로 어깨에 힘을 잔뜩 넣고 거리를 활보하던 그 시절은 빛바랜 사진첩 사이에 끼워 장롱 깊은 곳에 묻어둔 체 남의 집 더러운 부분을 걸레로 닦고, 비로 쓸면서 가족들의 건강과 자녀에게 거는 희망 때문에 기쁨의 땀을 말없이 닦으며 살아도 간다.
그래서 나는 이민자들에게 서러움만 주는 이 바보 같은 미국을 한 바탕 휘저어놓고 도망이라도 치듯 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그러한 마음에, 눈 꼬리 잔뜩 치켜세우고 앙칼진 표정으로 주위를 휙, 돌아 볼 때도 있다. 그러나 내가 가진 힘이란 무엇인가. 지나가는 어린 아이가 건네 오는 영어 한 마디에도 주눅 들어 버벅 거리며 열심히 떠들다 이게 아닌데 싶어 얼굴 돌리고 눈 내리 깔며 입술 달싹할 힘도 잃어버리는 것을.
오늘. 낮에 볼일이 좀 있어서 윌셔거리에 나갔다. 평소에 걸어 다닌 적이 거의 없이 항상 차만 타고 다니는데 오늘은 두세 가지 볼일이 가까운 곳에 있어서 짧은 거리에 주차를 바꾸어가며 하는 것이 번거로워서 한 곳에 주차를 하고 조금의 거리를 걸었다. 윌셔라는 번화한 거리를 걸으며 주위를 열심히 둘러보며 '아, 이곳이 미국이로군.'하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넋을 잃었다. 이제껏 보아오던 그 미국이 아니라, 새삼스레 내 마음에 다가오는 미국의 거리가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왠지 어깨에 힘이 팍 들어가고 가슴이 활짝 펴지면서 목이 뻣뻣해지기 시작했다. 어디에선가 사분의사박자의 행진곡이 내 귀에 들려왔다. 그러자 턱을 꼿꼿이 세우고 그 행진곡에 맞춘 내 걸음은 개선장군의 그 모습으로 위풍당당하게 힘이 생겼다. '음... 내가 미국에 있군.'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동경하는 곳인가, 이곳이. 기회의 땅, 열심히 일하여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여유. 우리의 분신인 자녀들에게 세계를 향하여 뻗어 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넉넉히 주어지는 이곳.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곳의 삶을 알든 모르든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미국이라는 곳을 동경하며 '천국 바로 밑이 미국'이라고 말을 하지 않는가. 이러한 곳에 내가 와서 산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감사해야 할 것이다. 돈이 있기를 하나, 빽이 있기를 하나, 아는 친척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기를 하나. 아무것도 없는 내가 이 미국에 와서 이렇게나 번화한 윌셔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축복임이 틀림이 없다. 그 동안 내가 왜 툭 하면 향수에 젖고 한국을 그리워하며 우울한 나날들을 만들어 갔지? 이 강대국 미국에서 이렇게 활보할 수 있는 축복을 누리면서 말이다.
오늘은 한국의 친구에게 전화하여 무게 잡은 목소리로 미국이 얼마나 좋은가 말하며 친구들의 부러워하는 말을 들어볼까? 한국을 그리워하며 타국에서의 서러움만 늘어놓고 슬퍼하던 모습을 지우고 당당하고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통쾌하게 웃으며 번화한 윌셔거리와 이국냄새가 물씬 풍기는 팜츄리 이야기나 할까?
200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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