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주지 못한 봉투

2004.12.29 05:55

정찬열 조회 수:113 추천:2

      
  철썩, 신문 떨어지는 소리에 잠을 깼다. 준비해둔 봉투를 챙겨 부랴부랴 문을 박차고 나갔지만 어느새 배달차는 저만큼 달려가고 있었다. '여보세요-' 소리치며 쫓아갔지만 자동차는 금세 길모퉁이를 돌아 사라져버렸다.
  차 한 잔을 끓여 들고 뒤뜰로 나갔다. 새벽바람이 차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뒷마당에 앙상한 나무들이 겨울을 견디며 서 있다. 멀리 산봉우리에 눈이 하얗다.
  춥다. 30년도 넘은 그 옛날, 어머니가 자루에 담아준 쌀 다섯 되를 둘러메고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러 광주에 가던 날도 이렇게 추웠었다.
  스무 살 나이에 K상고 야간부에 입학하여 학생이 되었지만 추위는 풀리지 않았다. 봄이 되어 실가지 끝에 잎이 움트고 흐드러지게 꽃이 피어나도 나는 오슬오슬 추웠다. 각오는 단단히 했지만 학비를 벌어 학교에 다닐 걱정으로 마음이 꽁꽁 얼어있었다.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신 새벽, 찬바람을 맞으며 신문을 배달하면서 세상을 배워나갔다. 잉크냄새 물신 풍기는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어둑어둑한 시내를 달리면서 나보다 먼저 깨어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연탄을 지고 힘겹게 언덕을 오르던 연탄장수아저씨, 새벽 손님을 맞으러 불을 지피는 시장통 아주머니, 딸랑 딸랑 종을 치며 두부를 팔던 두부장수 등.
  아침 배달만으로는 학비가 부족해 주일에 한 번씩 주간신문도 돌렸다. 그런데 배달료를 지급하기로 한 날 사장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돈을 주지 않았다. 그 일은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명절이면 돈 봉투를 건네주는 구독자가 한 분 있었다.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깨끗한 종이에 쓴 격려의 글까지 함께 넣어 어둑한 새벽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말 없이 내 손에 꼬옥 쥐어주시는 것이었다. 봉투를 받을 때마다 코끝이 시큰했다. 나도 당신처럼 베푸는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스스로 다짐 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그 시절, 계림동 오거리부근에서 자취를 했었다. 날마다 새벽에 삐끄덕 소리를 내면서 대문을 열고 나가는 것도 미안했지만, 학교를 마치고 밤늦게 돌아와 대문을 열어달라기는 더욱 죄송했다. 그런데 주인댁 아주머니는 싫은 내색 없이,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는 친구들까지도 귀찮은 표정 하나 짓지 않고 문을 따주었다. 뿐만 아니라 넉넉잖은 살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자취생 부엌도 돌아봐 주시곤 했다. 내가 먹은 반찬의 반 이상은 그분이 주신 것이었다.  
  얼었던 마음이 천천히 풀려갔다. 인생은 혼자서 걸어가는 게 아니라 더불어 살아간다는 사리를 깨닫게 되었다. 어려운 환경에도 꿋꿋하고 당차게 살아가는 비슷한 처지에 있던 친구들을 만나면서, 그리고 사려 깊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믿음이 깊어갔다. 내 인생의 굽이굽이에서 등불을 밝혀주신 문도채 선생님. 내가 어려울 때 함께 계셨던 소광섭 선생님. 두 분은 약속이나 한 듯 지난해 추석 무렵에 돌아가셨다. 제대로 인사한번 드리지 못했는데 소식을 듣고 안타깝다. 사람은 이렇게 늘 한 발자국씩 늦게 후회를 하게되는가.  
  아침에 일어나 마당에 떨어져 있는 신문뭉치를 주워들 때면 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사랑 속에 푸른 꿈을 안고 거리를 뛰어가던 학창시절이 생각나곤 한다. 어려움이 있을 때면 그 시절의 기억을 되새기기도 한다.
  크리스마스 아침. 차 한잔을 마시며 생각에 잠기는 동안 날이 환히 밝았다. 무성하던 나뭇잎을 발아래 다 떨구고 말 없이 서 있는 겨울나무가 어느 명절 무렵 어둠 속에서 나를 기다리시던 어른의 모습을 닮았다. 당시에도 연세가 많던 그분은 지금쯤 돌아가셨을 지도 모르겠다. 감사의 말 한마디 전하지 못하고 이렇게 세월이 흘렀다. 내일 새벽엔 배달원이 오기 전에 밖에 나가 기다렸다가 작은 액수지만 오늘 전하지 못한 봉투를 전해주어야겠다.(2004년 12월 29일자 광주매일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