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민의 산경표

2007.01.17 16:11

신영철 조회 수:50

                        위민(爲民)의 산경표 그리고 백두대간  

                                                       글. 신영철 편집위원

  곰곰 생각해 보면, 묻혀있던 산경표의 부활은 이 시대에 하나의 사건이었다. 우리 선조들이 대를 이어 산을 살피는 지혜가 온전히 담긴 산경표다. 자연에서 나고 자연으로 환원되는 철학이 담긴 독창적인 표기로 이 땅 산들의 족보가 만들어 진 것이다. 족보는 틀릴 수 없다. 다만 서구식 광맥, 혹은 지질 논리의 눈으로 보면 틀릴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지질학 혹은 지형학이지 족보가 아니다. 그것은 무수히 많은 산경표 신도들의 백두대간 종주 후 소감에서 잘 나타난다. 산경표가 소리가 나는 오디오라면, 대동여지도는 그림으로 나타나는 비디오다. 현대 문명의 이기닌 텔레비전은 두 기능이 합쳐 우리에게 정보를 전달한다.
  
  지금은 일반적 고유명사로 누구나 알고 있는 ‘백두대간’이라는 생경한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가슴 떨리던 기억이 있다. 만으로 꼭 16년 전 11월이었다.
  “형, 내가 했던 태백산맥은 없었어.”
  태백산맥 종주기 ‘하얀 능선에 서면’이라는 스테디셀러를 쓴 남난희의 말이었다. 겨울철 힘든 종주를 끝낸 그녀가 태백산맥은 없다니. 본지에 최초로 백두대간 종주 연재를 끝낸 남난희의 전화 한통에, 두 번째 검증으로 내가 뛰어 들었다.
  산정에 서면 사방으로 제멋대로 울울창창 치솟은 산들을 보며 그것들이 서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쉽게 들 수는 없다. 산정에 선 사람들은 누구든 그랬을 것이다. 가뭇하게 음영으로 중첩된 산들을 이어 간다는 게 아무래도 실감나지 않는 때였다. 그런데 그 떨어져 있는 산들이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서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놀라움. 또한 그 사실을 이미 17세기의 우리 선조들이 글과 지도로 남겨놓았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의 충격. 대학산악부나 일반산악회에서 훈련의 일환으로 활용되던 그 힘든 태백산맥 종주가 가짜였다는 확인. 그래서 태백산맥 종주가 산줄기가 끊어지고 계곡을 건넜다는 깨달음. 토막 난 종주가 독도의 미숙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건 아예 가능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산악계와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있었다.
  그 울림은 이 땅 산악인들에게 는 커다란 천둥소리였다. 그 천둥소리의 실체를 찾아, 백두대간의 실상을 좇아, 산악인들은  산경표를 경전처럼 들고 기꺼이 바쁜 다리품을 팔았다.   태백산맥 소백산맥등 여태 배워 온 지리지의 역사가 채 백년이 안 되고, 그것도 일본제국주의 시대 심각한 정치적 목적과 자원수탈을 위해 없던 것을 발명(?)해낸 개념 일뿐이라는 여러 가지 증거들. 일본의 고또분지로등 지리학자들이 조선의 산을 단 14개월간 답사한 끝에 만들어진 지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 당혹감. 백번 양보해도 순수한 학문적 업적이 결과적으로 조선의 지하자원파악의 소도구에 불과 했다는 사실에 얼마나 경악했던가.
  그러니 그들이 만들어 낸 태백산맥 등 지리도는, 산맥이 물을 만나 끊어지고 단절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당연하지 못한 것을 인식하지 못했던 산악인들은 산경표의 출연으로 그 실상을 알게 되었다.  
  이젠 16년 전과는 다르게 백두대간이라는 말이 사회전반에 걸쳐 자연스레 소통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현상을 보며 산경표에 몰입했던 사실이 기쁘기도 하거니와 한사람의 얼굴이 문득 떠오른다.  
  바로 故이우형 선생이다. 그이는 박제가 되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대동여지도를 살려냈고 묻혀있던 ‘산경표’라는 보물을 발굴해냈다. 걸걸한 목소리로 ‘도대체 눈에 보이지 않는 산맥이 뭐가 필요 있어!“하고 질타하던 그 모습이 생각난다. 현대판 고산자라는 별칭에 어울리게, 그이는 이 땅 산의 족보 산경표에 기록된 백두대간, 장백정간, 그리고 13정맥의 존재를 온 몸으로 알렸다.
  산맥이란 용어의 정의는 ’산들이 연이어 달리고 있는 현상‘이다. 이우형씨의 지적대로 현행 태백산맥은 물도 건너고 땅속으로도 이어진다. 우리가 인식하는 산맥이 아닌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질학적 분류로 되었기 때문이다. 고생대 캠브리아기에 조성된 화강암 암석이 직선으로 물속을 건너든, 땅속을 달리던, 산으로 솟던,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산맥이 아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뿐이 아니라 우리 선조들도 오랫동안 같은 생각을 했다. 선조들은 눈에 보이는 산줄기를 기록했고 그 산들의 이어짐을 지도에 그렸다.
  그래서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관심 있게 대동여지도를 본 사람은 그것을 안다.
  물론 그 역사적 사료들의 존재를 그 당시 관련 학계와 언론에서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연구결과도 미미했고 언론도 관심이 없었다. 하여 당시는 소수의 사람들만 산경표를 인식했지, 선조들이 오랫동안 집대성해 온 인문지리지 산경표의 중요성에 대하여 집중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이 땅에 산경표와 백두대간을 모르는 이가 없다. 백두대간 진정한 부활은 그렇게 이우형 선생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며, 그것에 주목한 월간 ‘사람과 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1989년 11월에 월간 사람과 산이 첫 번째 책을 내며 탄생했다.
  창간 당시부터 기획된  ‘백두대간을 간다’라는 특집은 일년동안의 자료 검토와 준비를 거쳐 1990년 11월 지리산에서 첫 발을 내딛었다. 산경표의 실체를 서지학적 측면이 아니라 발로 확인하는 사실적 발굴탐사 보도였고 발 품을 기록해 가는 대하 연재기였다. 그렇게 시작된 사람과 산의 산경표 답사 연재는 산경표가 인문적 지리지라는 재확인이었고, 보석처럼 빛나는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눈부신 유물이었다는 것의 명징한 확인이었다.
  산경표 상에 나타난 백두대간과 9정맥들을 일년에 한 줄기씩 10여년 동안 지면에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전국에서 성원을 해준 산악인들의 덕분이다. 책상에서 그려진 지도 독도와는 달리 미답의 산줄기를 따라 간다는 것은 여러모로 힘든 일이다. 산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필요했으며 무엇보다 강인한 체력이 뒤따라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긴 시간과 장비와 전문지식이 수반되는 이 탐사 보도는 다른 매체에서 엄두도 내지 못할 지난한 일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과 산은 창간부터 산악인들에 의해 태어난 잡지이므로 그것이 가능했다. 남한 땅 백두대간 언저리에 살고 있는 산악인들의 절대적 협조로 산경표 상의 백두대간 남쪽 산줄기가 차례로 연재되고 규명되었다. 그 기록들은 사진으로 지도로 제작되었으며, 미완의 북쪽 답사를 위하여 통일부에 방북 신청도 해 놓았었다.  
  연 인원 수백 명씩 동원되었던 이 작업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고 앞으로도 더 진보적 작업이 되어 갈 것은 틀림없다. 한 번 더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겠지만 그것은 온전히 산 사랑하나로 동참해 준 전국의 산악인 몫이다. 직장에서 휴직을 하고 동참 한 사람. 병원 문 닫고 뛰어든 사람 등 자발적 참여와 희생이 이 땅에 산경표를 찬란하게 부활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 작업이 쉬운 일이 아니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또 강요나 지시로도 될 일 역시 아니었다. 이 땅의 산을 사랑하는 산악인들로서 자발적 참여였고 산악인 특유의 산사랑의 표현이었다. 이렇게 백두대간이 되 살아 난 것을 보면 그들의 땀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또한 그걸 발로 확인해 가는 과정에서는 누구든 산경표 신도가 될 수밖에 없다.
  연재가 계속 될수록 사회엔 백두대간에 대하여 거대 담론이 형성되어 갔고 산경표에 대하여 학술적 관심도 모아졌다. 이우형 선생 생전에 사람과 산은 공동으로 전국 순회 강연회를 개최하며 백두대간의 개념을 일반에게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했다. 전도의 효과는 예상외로 컷고 산경표의 실상을 이해하는 순간 청중들은 열렬한 신도가 되었다.
  텔레비전 방송의 예나 지금이나 대단한 위력을 보이는데, 1992년 MBC에서는 50분짜리 ‘산경표를 찾아서’라는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고 방송 대상을 타기도 했다. 이 방송은 시청자들의 요청으로 재방송까지 되었었다. EBS도 1998년 ‘백두대간’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 방영했다.
  당시 일 년 동안 종주를 한 산악인의 말이 새삼 생각난다. 그는 말했다. ‘암. 빙벽과 히말라야에 몰입했던 때도 좋았었으나 산경표를 만나고 그것의 확인을 위하여 사계절을 살가운 이 땅 산 속에서 보낸 세월이 가장 행복했고 보람있었던 때였다‘고.
  산경표에서도 더러 오류를 발견 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그 정신이 훼절 되는 것은 아니다. 훈민정음 그대로 읽기가 쉽지 않지만 거기서 지금 우리가 쓰는 한글이 다듬어졌듯 산경표도 진화해야 한다. 그러므로 현재 재 답사 연재하는 것은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활용한 정확한 산경표를 구현해 내는 일이다. 백두대간과 정맥의 정확한 개념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 작업의 기사와 지도를 좇아 앞으로 종주에 나설 수많은 산악인들의 좌표가 될 것은 분명한 일이므로 그렇다.
  지금도 남쪽 백두대간과 9정맥을 종주 하는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고산자 김정호 선생은 대동여지도의 모태가 된 청구도 서문에서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땅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그 땅에 사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말했다.
  이 말은 전 국토의 7할이 산으로 되어 있는 이 땅의 백두대간 종주 붐이 식을 줄 모르는 이유로 설명이 될 수 있겠다. 백두대간이든, 정맥이던 하나라도 산경표 개념에 맞춰 종주한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이제 산줄기와 물줄기를 간단하게 이해하게 되었으며 어느 산이라도 그 산줄기를 파악할 수 있다’고.
  이게 과학이 아니고 무엇인가? 모두 ‘산은 물줄기를 나눈다’는 산자분수령의 위민의 산경표 덕분이다. 산사랑은 자연사랑에 다름아니다. 이렇게 쉽게 눈에 보이는 인문지리지의 생활화에 앞서 달려왔고 달려 갈 산경표 애호가들이 스스로 후한 점수를 줘도 뭐랄 사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