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점

2007.07.03 06:38

배희경 조회 수:44 추천:1


                   85점                      “글마루” 1998

    우리는 학교에서 돌아와 아버지의 기척을 살폈다. 물론 안방에 계시다. 이 날만은 아무데도 안 나가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두 오빠는 아직 중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초등학교에 다녔던 동생과 나는 서로의 성적표를 들어다 보며 그날의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은 전 갑(甲), all A 다. 그러나 나는 오늘 을(乙) B가 두 개 섞여있다. 지난 학기에는 하나였는데 이번엔 하나가 더 늘었다. 큰일 났다. 두 오빠도 돌아왔다. 큰 오빠는 얼굴 가득 희색인데 작은 오빠는 완전히 죽을상이다. 못해도 단단히 못한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아버지 방문 앞에 일렬로 섰다. 그 때는 어머니도 동참하신다. 아래 동생이 창호지 문을 밀고 성적표를 갖고 들어간다. 기뻐하고 계실 아버지 모습이 벌써 보인다. “참 잘 했구나. 너는 틀림이 없지. 나가라. 희경이 차례다. 어서.”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동생은 성적표를 받아 나오고, 나는 들어가서 아버지 앞에 꿇어앉았다. “너는 어찌 된 일이냐. 자꾸 성적이 떨어지니. 오늘부터 밖에서 못 논다. 알았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아버지는 내 날개 죽지를 잡고 언제 놓아 주시려나. 친구들이 놀자고 불으면 또 어떡하구...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작은 오빠의 차례가 되었다. 이 오빠 차례만 되면 집안은 인민내판과 같은 분위기다. 이번에는 아버지도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인지 소리도 지르지 않으시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가서 매채를 꺾어 와” 하신다. 작은 오빠는 아버지 방에서 나와 소압(솔가지)이 쌓여 있는 헛간으로 간다. 두려움에 질려 눈에 보이는 아무거나 꺾고 있다. 옆에서 어머니가 가는 가지로 꺾어 손에 쥐어준다. 그 후의 인민재판의 판결은 누군가의 용서해 달라는 애걸로 끝났다. 그 때부터 을을 받는다는 것은 내게 대단한 두려움이며 수치였다.

   결혼 할 나이가 되었다. 맞선을 보았다. 선을 본 남자가 나에게 85점을 주었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아버지 상을 떠올리며 아, 을을 받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사람은 내게 85점 밖에 주지 않았으면서 나와 결혼을 했다. 그가 하루 물었다. “어째서 당신은 나를 택했소?”  나는 “당신께 100점을 주었으니까요.” 그러나 왜 85점만 준 나와 결혼했는가는 묻지 않았다. 내 자존심에 관한 일이였기 때문이다.
   그 때의 내 생각은, 결혼하는 사람인데 을을 줄 사람과 어떻게 결혼할까. 을이면 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빗대는 말에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나는 그 안경을 썼고 그 사람은 그 안경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불공평 한 것 같아서 만점을 얻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면서 살았다.

   삼 십 년 후, 그가 마지막 가는 길에서 그의 가슴 위에 뜨거운 물을 쏟으며 나는 처음으로 물었다.  85점을 준 나와 결혼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는가고.  그는 쓸쓸히 나를 쳐다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85점이 내게는 만점이었오.” 그 한 마디 말이 그의 전 유언이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219 메이플 애비뉴의 비둘기들 정해정 2007.03.18 51
3218 강과 바다 속을 유영하는 詩魚들 박영호 2007.03.18 46
3217 3월은 김사빈 2007.03.18 44
3216 3월에 대하여 김사빈 2007.03.18 52
3215 무제 오영근 2007.03.20 45
3214 하이얀 눈물 김영교 2007.03.17 50
3213 아! 가을냄새 정해정 2007.04.09 39
3212 주름살 정해정 2007.04.09 44
» 85점 배희경 2007.07.03 44
3210 낙엽 이야기 성백군 2007.03.15 44
3209 초승달 성백군 2007.03.15 49
3208 연등 박정순 2009.05.07 39
3207 천진암 박정순 2009.05.07 51
3206 봄날 임성규 2009.05.07 45
3205 우리가 사는 여기 김사빈 2007.03.15 45
3204 개꿈 오영근 2007.03.15 41
3203 시詩 비늘 조만연.조옥동 2007.03.14 46
3202 엄마들의 북클럽 고현혜(타냐) 2007.03.14 48
3201 멀미 오연희 2007.03.14 49
3200 신기루 오연희 2007.03.14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