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다리 밑 질두

2007.05.12 09:06

배희경 조회 수:49 추천:1

        나무다리 밑 질투                “미주문학” 2002년

   물살이 찰랑거리는 선창 밑 나무다리를 바라보며 나는 그녀의 대답에 할 말을 놓쳤다. 몹시 질투가 났기 때문이다. 남편이 서점을 한다고. 책이 귀했던 어린 시절 내가 그리도 동경했던 그런 “서점”을 하고 있단 말이지.  그녀의 말은 내 마음속 아픔의 건반을 건드렸다. 엉킨 불협화음이 소란했다.  아! 그 사람이 이곳에서 그런 서점 만 했더라도 이 세상을 그렇게 빨리 뜨지 않았을 것을.  미국에서 살아가는 한국남자들의 비애와,  빼빼 마른 아꼈던 사람에 대한 연민으로  내 가슴은 찢겼다.  
   아무 대책도 없이 자기 패기 하나로 태평양을 건너온 황망한 사람들이긴 했지만, 이 나라엔 그런 사람들깨 겉 맞는 일이라곤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어 본 가닥의 희망마저 사라졌을 때, 그들은 불나비처럼 몸을 사르는 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이십 년도 후에 나타난 이들이 책방이라는 멋진 일들을 하며 밥을 먹는다.   질투 뒤에 오는 부러움은 차츰 나를 자학에 빠져들게 했다.  파도가 하듯 자꾸 또 자꾸  나무다리에 지난날을 부딛쳐 가며 속으로 울고 있었다.

   서점!  서점하면 내게 아련하게 떠오르는 어릴 적 추억이 있다. 햇살이 따듯한 어느 늦은 봄날, 나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아버지 친구 분께서 하시는 서점에 가게 되었다. 서점은 종로 일가에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곧 그 앞으로 다가갔다.  白楊社라 적힌 유리창 전면은 보석 알 같이 닦여 있어서, 그 안의 책들이 환히 들여다보였다. 조심스레 서점 문을 열었다. 시끄럽고 번잡한 종로 거리와는 전연 다른 세상이 거기에 있었다. 어릴 때 어머니와 다녔던 소아과 병원 같이 조용했고, 어디서 시계소리도 크게 들려 올 것 같았다. 내 가슴은 그 때부터 의사를 기다릴 때와 똑 같은 긴장으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전갈 쪽지를 들고 두리번거리니 구석 책상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눈이 크고  얼굴이 유난히도 흰 인자한 웃음을 띈 신사였다. 내가 한두 번 뵈온 아버지 친구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얼른 절을 꾸벅하고 쪽지를 내 밀었다. 그 분이 “고맙다”했고, 또 뭐라고 더 전하는 말소리가 들렀으나, 나는 그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절을 또 꾸벅하고 그 곳을 빠져 나오고 말았다. 벅찬 분위기에 질식할 것 같아서였다. 내가 그렇게 부러워했던 반질반질한 책갈피의 책들이 방 하나 가득하다는 것은 엄청난 감동이고 충격이었다. 책들이 안고 있는 깊은 명상의 침묵과, 은빛이 부신 환상의 분위기에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바깥은 검은 손을 내 밀며 구걸하는 거지와 큰소리치며 사람을 밀치고 지나가는 군중들로 우리의 일상은 여전했다.

  내게는 이렇게 서점에 대한 어릴 적 향수가 있다. 나는 여기 미국 서점에서도 가끔 그 때의 그 그리움을 찾으려 한다. 특별히 찾는 책도 없으면서 쓰윽 서점에 들려 한 바퀴 돈 후, 또 쓰윽 다시 빠져 나오곤 한다.  글이 차 있는 분위기를 마시기 위해서다.
  
   나무다리 밑의 물살을 보며 슬픔에 젖었던 일도 오래되었다. 그런 어느 날, 나를 자학에 빠트렸던 그 친구 남편의 서점에 가 볼 기회를 가졌다. 항상 상상만 해 오던 그 서점이다. 호기심이 갑자기 부풀어 올랐다.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 일찍 갔다. 그들 말에 그의 서점은 샤핑몰 안에 있다고 했다. 나는 구석부터 뒤졌다. 비데오 샵이 있었다. 서점이라 했는데 이런 것도 하나 하고 안을 기웃거렸다. 책은 없다. 틀림없이 이건 아니다. 반대쪽으로 다시 돈다.  있다. 어떤 어떤 교육 책이라고 적은 간판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아닐 상 싶었다. 서점이라면 좀 더 고상하고, 따뜻함이 감돌고, 불빛이 밝아 화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차를 몰고 간다. 식당 외엔 없다. 그러면 지금 보고 온 바로 그 것이었는가.
   나는 차에서 내려 그 곳으로 가까이 갔다. 내가 아는 서점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가가서 따닥 따닥 유리창에 붙은 광고문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별아 별 것이 다 보인다. 놀라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구 시대에 산 나 같은 사람은, 그것이 뭣에 쓰이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두뇌를 겨눈 잡화상이다. 이렇게도 많은 것들이 다 필요하다는 것은 상상을 넘어선 놀람이었다.
   책방이라 했으니 책도 안에 있을 상 싶었다. 인제 나는 그 책방에 들어가서 그때 그렇게 멋지게 들렸던 친구의 남편을 보고 와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약간은 주저되었으나 성큼 들어서고 말았다. 정녕 그 곳은 종로 일가 서점에서 은가루가 흩날렸던 환상 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인자한 미소의 주인도 아니고 낭만에 찬 상상도 없었다. 그러나 거기엔 생활 의욕이 넘치고, 확신에 가득 찼고, 미국에서 고난을 극복한 굳건한 한국남성상의 사나이가 있었다. 이 나라의 활기를 양손에 꽉 쥐고 있는 마음 든든한 상이었다.

   나의 “서점”에 대한 아름다운 꿈의 환상은 깨어졌으나, 더 한 꿈을 안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어서 기뻤다. 그러나 아직도 내 “서점”에 대한 질투가 가시지 않는 것은 웬 일 일까. 사람의 마음은 의지만으로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질투는 영원히 계속될 것인가. 나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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