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살이 겨울나기

2013.03.22 04:37

이주희 조회 수:2165 추천:150


하루살이 겨울나기 / 이주희

*질경이가 뽀그르, 씨를 올리며 번져있는 배나무 아래를 지나자 풀냄새 가득한 아침 공기가 가슴속으로 밀려왔다. 집을 에워싼 회색빛 담장은 군데군데 밤이슬로 얼룩졌고, 실금이 나 있던 장독대 근처의 담벼락은 한 뼘이나 벌어져서 그 틈새로 이웃의 난초 잎이 끝 날을 세우고 들어왔다. 아무래도 사람을 불러 담을 새로 쌓아야 할까 보다. 대문으로 내려가는 둔덕에 밤나무는 알은 작아도 빛깔이 노랗고 단맛과 향이 강한 재래종이다. 봄철 내내 꽃을 피우더니만 이제는 이파리만 무성한 나뭇가지를 담 너머로 늘어트려 놓았다.
그녀는 한 무리의 새떼들이 재재거리며 날아가고 있는 야산을 바라보며 늘어진 운동복 바지 주머니 안에서 덜렁거리는 열쇠뭉치를 꺼내 윗옷 주머니에 넣었다. 남편은 대문 열쇠를 뽑아 현관 앞에 있는 화분이나 신발 흙을 터는 깔게 밑에 두라지만 그 방법은 연속극에도 나오는 것이기에 귀찮아도 가지고 다닌다.
이곳에 이사를 오고부터 시작한 산행이 어느덧 8년째다. 집안의 애경사(哀慶事)가 있는 날을 빼고는 별로 거르지 않았다. 숨이 차오를만한 비탈에 다다르면 가을에는 밤이나 도토리를 줍고, 겨울에는 작은 산 짐승들이 눈 위에 발자국이름을 찍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개발 때문에 통일로 주변지역은 여기저기 땅이 파헤쳐지고 있지만, 아직까진 푸릇한 곳이 더 많아 인적이 드문 곳에는 집 잃은 아이 같은 불안감이 적막하게 숨겨져 있다.
서쪽 방향 오솔길로 10 여분 가다 보면 보름 전부터 눈에 들어오는 오는 것이 있다.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식탁 의자다. 누군가 앉았었을 의자, 네 개가 한 조였을 것인데 굳이 저것 하나만을 여기까지 끌고 올라온 사연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등판은 용의 머리가 새겨져 있고, 바닥은 네모진 고동색가죽으로 감싸졌으며, 다리는 사자의 발처럼 조각되어 있다. 겨우 살아남은 다리 하나를 세우고 산행하는 이들을 향해 삿대질하듯 웅덩이에 처박혀 있다. 의자 둘레로 산 쑥이 뿌리를 쑥쑥 뻗치며 자라나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낸다. 그 옆 작은 구덩이에서 어른거리던 하루살이들이 오늘은 보이질 않는다.
솔 향이 흐르는 곳을 향해 가노라면, 불끈 쥔 힘줄처럼 뿌리를 땅 밖으로 솟구친 큰 소나무가 있다. 흙이 깎여나가 털 뽑힌 닭 모양새가 되어가는 무덤도 나온다. 성묘객을 대신하듯, 개미들만 소리 없이 분주히 오고 간다. 산은 통일로가 보이는 곳에서 끝이 난다.
여러 개의 비닐하우스가 산자락 밑까지 들어차 있는 그 앞 도로변에는 ‘도태전문식당’이 있다. 원래의 식당이름은 ‘동태전문 식당’이었으나 지난 겨울바람에 '동; 자의 'ㅇ' 받침이 뜯겨나가서 ‘도태'가 된 것이다. 여러 날이 지났건만 주인은 고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녹색 지붕을 한 식당 뒷마당에는 얼기설기 만들어진 닭장과 얼룩진 술병,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긁혀진 밥상들이 먼지를 쓰고 포개져 있다. 한쪽 끝을 땅바닥에 대고 긁어줘야 열리는 뒷문 밖에는 폐타이어들이 솜씨 없는 아낙네 바느질처럼 삐뚤빼뚤, 밭과 뒷마당을 구분 지어 묻혀있다.
버드나무는 그 중간에 있다. 삐딱하게 서서 넓은 그늘을 드리우며 한 아름 되는 밑동에 고물 오토바이와 개 묶어 놓은 줄을 두어 번 휘감고 있다. 저 나무에 붙들려 앉아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며 지나는 차를 바라보는 개의 이름은 ‘깜씨’다.
첫눈 내리던 재작년, 내 집 근처로 와있던 것을 식당주인이 깜씨라고 부르며 끌고 간 적이 있다. 온몸의 털이 먹처럼 검고, 하얗게 둥근 달이 가슴 중앙에 새겨진 멋진 개다. 식당영업이 되지 않고부터 주인의 관심도 멀어졌는지 털이 잔뜩 뭉쳐지고 꾀죄죄해 졌다.
발길을 동쪽 비탈로 돌리면 쌀가마니만 한 크기의 물개 바위가 나온다. 그 위에 걸터앉아 잠시 숨을 고르고 가던 곳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지나쳐버린다. 실지렁이 같은 혀를 날름거리며 바위 밑으로 기어드는 꽃뱀을 보고 나서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내뺀 후론 발걸음이 빨라지는 곳이다.
길섶에는 팔 벌려 길을 가로막는 잔 목들이 있다. 자기들만이 살아가는 세상이니 들어오지 말라며 거미줄도 쳐놓는다. 밀치며 가지만, 다음 날은 회초리 바람까지 내세우며 더 길게 끝을 갈아 달려든다.
시야가 트이며 시작되는 오르막길, 저벅거리는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난다. 바라보니 한 사내가 마주 걸어오고 있다. 그런데 언뜻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붉은 고무 칠이 돼 있는 목장갑에 들려있는 낫이다. 섬뜩하다. 빛바랜 푸른 색 와이셔츠에 카키색 면바지, 입을 가린 마스크에 구질구질한 등산모를 눌러썼다. 신체 부위 중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것은 금빛 안경테 안에서 빛나고 있는 눈동자뿐이다. 낫으로 산행에 거치적거리는 넝쿨이나 나뭇가지를 쳐내며 내려오는 것도 아닌 듯, 앞만 보고 성큼성큼 내려온다. 외길에서 도망가자니 좀 우습고, 지나치자니 소름이 돋는다. 비껴가는 사람의 눈길을 피하려고 시선을 아래로 두고 태연하게 발걸음을 내딛지만, 스치게 되는 상황에 이르러선 자신의 심장 소리가 천둥을 치는 것처럼 크게 들린다. 드디어, 엷은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는 사람, 체격이 왜소하게 느껴진다. 키도 그리 큰 것 같지 않다. 마스크로 가려진 입가에 뜻 모를 웃음을 지었을 것만 같고, 갑자기 등을 돌려 달려올 것 같아 오금이 저려 온다. 그저 상대와 멀어지는 간격을 발걸음소리로 가늠해 본다. 행여 저 사람을 마스크 벗은 얼굴로 공공장소에서 마주친다면? 아마도 그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왜소한 키에 눈빛뿐 일 것이다. 숨이 가쁘다. 평소보다 비탈이 높아 보인다. 그녀는 상 정상에서, 올랐던 길로 내려가는 것이 두려워 한참을 돌아내려 갔다. 그리곤 집으로 돌아와 시간표를 다시 짰다. 새벽 산행은 피하고, 개를 꼭 데리고 다니기로 작정했다.
 
*남들에게만 있을 줄 알았던 암 수술을 받고 퇴원해서 불광동 집에서 지냈던 겨울은 끔찍한 나날이었다. 내가 암이라니! 낮에는 잡다한 생활 반복으로 그냥저냥 지내다가도 밤만 되면 암이라는 말 자체도 용서되질 않아 괴로웠다. 정신적 고통이 육체적 고통보다 컸다. 불면 속으로 피를 말리는 시간은 면도날을 들고 들어와 잠과 체중을 베어 갔다.
건강에 자신하던 오만이 수그러들면서 신경은 예민해졌다. 전에는 지나치던 소소한 것들이 들리고 보였다. 바로 위층에서 아래로 물 내리는 소리도 그중 하나다. 물 내림 한층 가깝게 들리는 베란다 벽에는 손 맵시 좋은 남편이 엮어놓은 무청 시래기가 흐트러짐 없이 말라갔다.
타일바닥에는 세 식구 겨울나기 위한 김장 항아리 몇 개, 시어머니 생전에 예뻐 사셨다는 소금 항아리 위엔 양은쟁반이 얹혀있다. 국화꽃 그림이 닳아 이제는 얼룩이 남은 쟁반에는 무딘 칼에 손가락을 베며 길쭉길쭉 썰어놓은 무말랭이와 붉은 고추 몇 개가 벌레처럼 널려 있고, 에어컨에서 쫓겨나온 선풍기 상자는 접힌 빨래걸이 뒤에서 여름을 보냈다. 바람은 끊임없이 휘파람을 불며 창가에 매달리고, 메마른 낙엽은 가로수나 벤치 곁에서 온몸을 키질하며 뒹굴었다. 시계의 분침도 어느 사이 멈추어 있었으며 출근 전에 남편이 켜놓은 TV는 온종일 저 혼자 떠들었다.
스포츠용품 가게를 하는 남편은 몇 년 전만 해도 연예계에서 제법 이름이 나 있던 사람이었다. 대학 동문과 산악자전거를 타다 입은 부상 때문에 그 세계로 복귀하질 못했다. 미련이 많이 남아있어서인지 어쩌다 연예계 친구들을 만나고 오는 날이면 거울 앞에 서서 표정 연기를 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녀가 통원치료를 받고 집에 돌아오니 그 시간이면 직장에 있어야 할 아들이 퇴근하여 집에 있었다.
“강우야, 무슨 일 있니?” 라고 물었더니 시무룩한 얼굴로 경호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경호는 아들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앞줄에 앉았던 코 흘리기 친구다. 수줍음을 잘 타고 말도 별로 없던. 서로 다른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소식이 끊겼다가 근래에 다시 두어 번 본 것이 전부였다. 며칠 전, 전화를 걸어와 만나자고 하던 것을, 별로 바쁜 일도 없이 미뤘다고 했다. 그것에 대한 자책감에 괴로워했다.
아버지와 단둘이 지내던 경호는 어려서는 별 탈 없이 자라다가 중학생이 되고부터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주로 굴러가는 것에 집착해서 처음에는 아이들이 차고 노는 공을 집어 들고 달아나던 것을, 세워둔 자전거를 타고 달아나고, 그러다가 키가 꽂혀있는 오토바이만 보면 잡아타고 돌아다니다가 기름이 떨어지면 아무 데나 버리고 집에 돌아오곤 했다는 것이다. 사고가 날 때마다 친구 아버지가 찾아가 사과를 드리고, 자식에게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지만, 며칠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 그래서 결국 학교마저 다닐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일 저 일로 식구에게 다가온 겨울은 바뀌지 않는 지문처럼 버텼지만, 그 길고 불편한 허물을 봄의 문턱에 가까스로 벗어냈다. 그녀는 곰삭아버린 배추김치 한 폭을 꺼내 냄비에 옮겨 담고 들추어낸 우거지를 제자리에 집어넣고 꼭꼭 눌렀다. 불현듯, 외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담근 김장을 올겨울에 먹을 수 있으려나? 김장이 익기 전에 하나님이 부르시면 떠나야 할 텐데.”라고. 하시던 할머니는 그 후로도 여러 번 김장하셨고, 김장할 때마다 똑같은 말씀을 하시다가 92세 되시던 가을에 세상 끈을 놓으셨다.
“그래! 우리의 내일은 아무도 몰라, 나도 살게 되면 살고, 죽게 되면 죽으리라! 이 집을 떠나 마음먹고 새로운 인생을 한번 살아보자.”
마음을 그리 먹으니 당장 이 집을 떠나야만 하는 것처럼 마음이 바빠졌다. 무엇보다 남편이 반가워했으며 아들도 식탁으로 나와 밥에 물을 말아 묵은지를 먹었다. 순풍에 돛단배처럼, 아파트도 순조롭게 팔렸으며 모든 것이 석 달여 만에 처리되어 지금의 집으로 옮겨오게 된 것이다.
그녀는 지나간 겨울을 생각하며 안방으로 들어왔다. 친정오빠의 가구공장에서 가져온 단풍나무옷장의 문을 열었다. 예전 것보다 훨씬 여닫는 소리가 부드럽고 가볍다. 자신이 서랍 정리를 자주 하게 된 계기는 대수술 할 날짜를 받아 놓은 후부터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훗날을 기약할 수 없는 막연한 두려움이 살아온 흔적을 남기거나 지워버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남편이 쓰는 좌측 칸엔 속옷이 차곡차곡 접혀있다. 둘째 칸을 열어보니 줄지어 놓았던 밤색 양말 한 켤레가 구겨져 나와 옆줄 흰 양말 줄에 걸쳐져 있다. 아마도 오늘 낮에 장례식에 가느라 서둘러 옷을 갈아입는 남편에게 검은색 양말을 꺼내주며 헝큰 모양이다. 줄을 맞춰 집어넣고 맨 아래 칸을 열었다. 지난번 서랍 정리 때는 눈에 띄지 않던, 옅은 밤색바탕에 이름 모를 꽃이 듬성듬성 피어있는 원피스가 눈에 들어온다. 설레는 가슴으로 캐나다에서 고국 방문 온 언니가 입었던 옷이다. 자신에게 덜미를 잡혀 병시중 들어줄 때도, 수술을 무사히 끝내고 나서 펑펑 울어줄 적에도 입었었다. 콧날이 시큰해지더니 꽃무늬 위로 툭,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입고 있던 운동복을 벗고 그 옷으로 갈아입은 뒤, 주방으로 갔다. 녹차 한잔을 만들어 식탁 위에 올려놓고 한 모금씩 마시며 편지를 썼다. 시력이 나빠진 친정어머니께는 읽기 편하도록 큼직하게 글자를 써서 안부를 여쭙고, 어머니와 함께 사는 언니에겐 자신의 건강상태와 오빠의 소식과 그리고 남편과 아들 강우의 안부도 써넣었다. 항공우편 봉투에 주소를 적고 있는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초상집에 가 있는 남편에게서 온 것이려니 했는데 광고전화였다. 늦은 시간에 오는 전화는 항시 가슴에 바람을 우~하고 일으킨다.

그녀가 남편과 마당에 있는 평상에서 일요일 점심을 즐기고 있는데 친구를 만나러 필리핀 참전비에 나갔던 아들이 돌아왔다.
"강우야. 어째, 일찍 들어와? 만나기로 한 친구가 안 나왔어?"
 "차가 말썽이 나서 수리를 맡겼기 때문에 다음으로 미뤘어요, 에이~참! 그런데 집으로 걸어오면서 좀 다퉜어요."
"아니, 무슨 일로?" "어떤 사람이 대낮에 위험한 물건을 휘젓고 걸어가서 제가 그 사람에게 그랬죠. 날을 감싸서 다니라고요. 그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낫이에요. 낫!"
그녀는 먹던 음식이 목에 걸려 사레가 들려 잠시 머뭇거렸다. 별안간 모든 머리카락이 위로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무엇하러 위험하게 그런 사람에게 말을 걸어?"
"머리가 어떻게 됐는지 이 더운 날 마스크를 했어요. 몰라서 그럴지도 모르니 말을 해줘야지 겁난다고 가만히 있으면 되나요? 그런데 아무런 말도 없이 내 얼굴을 빤히 올려보는 거예요. 에이, 기분 나빠!"
이번엔 남편이 한마디 거들었다.
"네가 말 안 해줘도 될 일을 위험하게 왜 네가 하니?"
"언제 한번 버스 안에서 차창 밖으로 지나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이 동네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사람 같아요. 이다음에도 그러고 다니면 다짐을 받아내야지."
구두 코끝을 나란히 맞춰 현관 옆 신발장 안에 집어넣고, 이 층 방으로 올라가는 아들의 뒷모습에서 보이지 않는 공격과 방어의 익숙함이 느껴졌다.
현재 지구 위의 인간생명체는 백 년 후엔 모두 소멸할 것이다. 그 뒤엔 어떤 세상이 펼쳐질 것인가? 불과 100여 년 사이, 세상은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급격히 바뀌었다. 하지만 사람의 심성만은 바뀌질 않고 이어간다. 도쿄[桃梟]의 삶을 사는 자로, 위선의 옷을 입는 자로, 지켜만 보는 방관자로 시대 흐름의 공기를 마시고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인 몫을 자신이 사는 것처럼, 낫을 들고 사는 자의 몫도 있을 것이다. 대화를 나눌 사람들이 주변에서 떠나가 버린 것일까? 한 손에 공격을 쥐고, 다른 한 손엔 방패를 쥐고 사는 이들이 지혜로워 보여서일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막이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이 느껴졌다면? 그도 걸어가며 보이지 않는 공격을 하는 셈이 아니던가? 언제고 아들과 그가 마주쳐 서로에게 공격을 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르자, 깊은 밑바닥으로 가라앉혔던 두려움이 슬렁슬렁 번지면서 만만의 소름이 살갗을 뚫고 사방으로 기어 나왔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녀는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낫을 든 이를 다시 보게 되었다. 놀라 허둥지둥 버스에 올라 멀어져가는 버스정류장을 내다보니 그 사람은 여전히 자신의 표정을 마스크 안에 감추고 있다. 길 떠날 의사가 없이 버스를 지나쳐 보내며 우두커니 앉아있다. 버스가 외국어고등학교가 있는 내유동에서 정차하는 동안, 식품점 문 앞에 내걸린 대발에 풀린 실을 무심히 보고 있노라니 혼자 앉아 가는 좌석이 비었다. 자리를 옮겨 앉자 앞좌석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자신보다 앞서 버스를 탄 이들로, 아까부터 얘기를 두런두런 나누고 있었다.
"아니, 외국어 고등학교 앞 말고, 아니 그전 버스 정류장 삼거리 말이야."
"아~아! 거기" "그래. 그 양반 말이여. 마스크 쓰고 정류장에 서 있던 사람 말이야."
"그 양반! 재작년 처가동네로 이사와 산다는! 그 사람 부인이 당신하고 여학교 친구라며?"
"맞아요. 그 일을 겪고 나서부터 입을 가리고 산다니까요. 쯧쯧!"
"얼마 전 아들을 잃고 그런다며?" "예전에 부인이 식당에 허드렛일을 하러 다녔잖아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어떤 미친놈이 오토바이를 타고 핸드백을 낚아채고 달아났대요. 그런데 가방 안에 더러워진 앞치마만 들어있으니까 되돌아와서는‘돈도 없이 나돌아다녀?’ 라고 하더니 외진 길에서 겁탈했다 하잖아요."
“그래? 그럼, 그 사람 부인이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었구먼."
"아들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니까 그때는 친정에서 키워주고 있을 때였는데, 아이 엄마가 봉변을 당하고 돌아와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지내다가 친정집에 내려왔더래요. 아들을 보러 온 줄만 알았는데 돌아갈 때 농약을 몰래 들고 가서 그 아까운 목숨을 끊었으니. 휴! 그 후, 애 아버지가 아들을 처가에서 데리고 나와 연신내에서 살아왔는데 다 키운 아들까지 그리돼버렸으니 쯧쯧."
차창밖에는 은행나무 가로수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버스가 필리핀 참전비 탑을 지나자, 시립 장제장이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의정부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하므로 여기서 내려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발이 못 내리는 것이 아니라, 두 귀가 내리지 못하게 붙잡는다. 가슴이 다듬잇돌 위에서 두 방망이질을 해대는 것 같다.
"옛날에 죽은 부인을 저기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해서 저기 흐르고 있는 개울물에 뼛가루를 뿌렸대요. 지금은 저곳에 뿌리지 못하게 돼 있어서 아들의 재는 아까 서 있던 처가 근처 동산에 가서 뿌렸대요. 그런데 그게 참 이상해? 아들이 군대도 잘 다녀오고, 골프연습장에 취직해서 일도 잘 다녔는데 어느 날엔가, 경찰서에 찾아가 어머니 죽인 놈을 찾아냈으니 잡아달라고 했대요. 그렇지만 오래전 일에 수사관들이 관심을 두기나 해요?"
지구레코드사 앞에서 세 사람을 내려놓은 버스는 신월동을 지나쳐 달려간다.
"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죽었는데 그걸 어찌 알고?”
"그거야 저도 모르죠. 골프연습장에 가끔 오던 손님이라던데? 노고산 예비군 훈련장 근처에 개고기를 먹으러 간 사람들을 아~ 글쎄, 그곳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뒤따라가서 개울로 내려가는 한 남자를 그냥 들이박았다데요. 정통으로 박힌 남자와 함께 개울가 돌 위에 떨어져 그 자리에서 죽었대요. 어, 어? 영미 할아버지, 여기 오금동이네! 다음이 삼송초등학교니까 어서 내릴 준비 하세요." 

*기상청의 말로는 끝난 장마라 했다. 그러나 장대 같은 비는 삼일을 쉬지 않고 내렸다. 상사병에 올무 걸린 가슴처럼 통일로 변을 따라 깨작대며 흐르던 개울물은 벌겋게 속을 뒤집으며 논과 밭 그리고 도로의 경계를 올 풀린 치마 주름처럼 흩쳐버렸다. 세상의 모든 것이 비에 젖었다. 천둥이 울고, 번개는 수십 번 나무꼭대기에 다녀갔다. 온갖 날벌레들도 자취를 감췄다. 바람은 창문을 걸어 닫게 하였고, 비는 열어 달라고 두드렸다.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 거짓말처럼 날이 개었다. 삼 일간 금지되었던 정곡 검문소에서부터 시립 장제장까지 버스 구간이 열렸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을 배웅하고 돌아서자마자 비설거지를 하였다. 아들의 방에서 빨랫감을 챙겨 들고 나와 발밑에 내려놓고, 뻑뻑해진 이 층 창문을 열어젖혔다. 나뭇잎이 윤기로 반질거리는, 배나무엔 이름 모를 새가 산다. 마당에서 올려다보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이 층 창가에서는 그들의 보금자리를 은밀하게 엿볼 수 있다. 둥지는 사나운 비바람을 잘 견디어낸 것 같다. 고운 깃털을 붙인 채 비어있다. 굶주린 새들이 배를 채우러 나간 모양이다.세탁기에 빨래를 집어넣고 마당으로 내려와 젖은 우산 세 개를 활짝 펼친다. 빗물에 밥알이 퉁퉁 불어있는 개 밥그릇은 깨끗이 씻어 햇볕을 향해 세워 놓는다. 물 호스를 끌어와 화분에 기어오른 흙을 씻어내는데 자신을 부르는 것이 있다. 돌아보니 벌어진 담벼락 사이로 보랏빛 난초 꽃이 그것도 하나, 둘, 셋이나 피어있다. 난초 꽃이 많이 피면 자손이 번성한다고 했으니 아마도 가까운 이웃에서 갓난아기 셋이 태어났을 거라고 믿어졌다.
집수리해주는 곳을 찾아 대문을 나섰다. 땅이 마르면 담을 새로 쌓아야 해서다. 건너편에 사는 세무사 부인이 마을 초입에 있는 곰보 아저씨가 집을 손봐주는 데는 최고라 해서 생활용품도 사올 겸 천천히 마을 길을 걸어 내려갔다. 지나치는 집마다 비에 젖은 물건을 햇볕으로 끌어내 놓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불을 내다 걸고, 빨래를 내다 걸고, 기어오른 흙을 물로 씻어내는 소리. 씻지 않아도 되는 것은 먼지를 쓰고 있던 버스정류장 지붕과 가게 간판들이다.
버스정류장이 모처럼 북적이고 사람들을 태운 버스는 활기차게 목적지를 향해 달려간다. 망쳐진 마늘농사가 질펀하게 펼쳐있는 정류장 뒤로 도로까지 넘쳤다던 개천물이 바닥으로 내려가 있다. 물은 방죽에 띠를 그리며 빠져나가 많은 잡동사니를 밀린 때처럼 들러 붙여놓았다.오백여 미터 쯤 나아간 곳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버스를 기다리던 남녀가 그곳을 바라보고 있더니 남자가 멈춰선 버스를 손사래 치며 떠나보냈다. "사람이 죽었다는데? 어서 우리도 가보자."
"에이 싫어! 언제 시내 나갔다 돌아와?"
싫다던 여자를 끌고 사내가 앞서 가는 길을, 궁금해 있던 그녀도 엉겁결에 뒤따라갔다. 도로변에 세워둔 경찰차와 병원차에 다다르자 때마침 밑에 있던 사람들이 흩어지더니 웅성거리며 들것을 따라 둑 위로 올라왔다. 뛰다시피 걷던 사내가 구경거리가 사라지는 것이 아쉬운지 여자에게 말을 건넸다.
"에~이, 벌써 떠날라 그런다. 진작 와서 보자니까."
앞뒤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이 낑낑거리고 들고 있는 들것을 보니 물에 젖은 운동화 코끝이 몇 날 며칠 우려낸 사골 뼈처럼 허옇게 나와 있다. 병원차 문이 열리고 들것을 안으로 밀어 넣는 순간, 팔 하나가 거적 밖으로 내려졌다. 검사관으로 보이는 이가 옆에 섰다가 거적 안으로 집어넣어 주는데 보니 붉은 고무 칠이 되어 있는 목장갑을 꼈다.
"아이고! 어쩌나 가여워서, 경호 아범 그렇게 가나? 그렇게 가?"
양파처럼 겹을 이루고 서 있는 사람들을 해치고, 부축을 받은 할머니 한 분이 비척비척 다가와 실려지는 시신의 운동화를 붙잡고 울었다. 경찰은 노인이 유가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부축하여 차에 태웠다. 그때 어디선가 하루살이 떼가 몰려오더니 무리에서 몇 마리가 빠져나와 구급차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녀는 하루살이가 죽을 때엔 입이 없어진다는 말이 떠올랐다. 순간, 시신에 덮여 있는 흰 천을 들춰보고 싶은 충동이 강렬하게 일어났다. 그가 지금도 입을 마스크로 가리고 있는지? 죽어있는 사람의 얼굴이 너무나 궁금해서 하마터면 닫히는 병원차 문을 잡아 젖힐 뻔하였다.
덜커덩! 문이 닫힌 구급차는 경찰차와 함께 바쁘지도 않은 길을, 웽 소리를 버럭 같이 내며 기세 좋게 떠나갔다. 가슴에 쓸쓸한 물이 고이면서 맑은 하늘이 부옇게 다가왔다. 그녀는 휘청대며 헛디딘 걸음을 가까스로 바로잡았다.
연장 가방으로 보이는 것을 든 두 남자가 옥신각신하며 옆으로 지나친다.
"틀림없이 좋은 물건이 물에 떠내려가니까 뭘 하나 건지려다 물에 휩쓸려 죽은 것이라니까 그려. 아까 그 할머니도 왜 그렇게 가느냐고 하잖여."
"아~ 글쎄, 내가 봤다는데 그려. 뭘 건지려던 것이 아니고 버리더라니께 그려. 천둥이 치고,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저어 위, 희망 양로원 쪽에서 엉엉 울면서 식탁 의자 몇 개를 내던지고 있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봤다는데도 그려"
사람들은 아스팔트 위에 흙 뭍은 신발을 탈탈 털며 제각기 갈 길로 흩어졌다.
 
-끝- 2007.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1 ○ 마켓 가던 날 [2] update 이주희 2015.06.03 1631
100 ○ 종소리 이주희 2014.12.10 8707
99 ○ 종이배 이주희 2014.12.10 2206
98 ○ 그림자 이주희 2013.10.23 1906
97 ○ 산안개 이주희 2013.11.18 2389
96 ○ 가을 편지 이주희 2013.08.09 1327
» ♣ 하루살이 겨울나기 이주희 2013.03.22 2165
94 ○ 파도 이주희 2013.05.23 1241
93 ★ 환월(幻月) [1] 이주희 2013.04.24 1814
92 ○ 우리 할머니 이주희 2013.04.12 1446
91 ○ 아버지 이주희 2013.04.12 1528
90 ○ 텃밭 달팽이 이주희 2013.04.11 1400
89 ○ 소나무 이주희 2013.07.19 1170
88 ★ 야월(夜月) [1] 이주희 2013.06.04 1589
87 ○ 굼벵이 이주희 2013.06.03 1278
86 ○ 식탐 이주희 2013.05.25 6966
85 ○ 불꽃놀이 이주희 2013.03.16 1275
84 ○ 쥐눈이 콩나물 이주희 2013.08.14 18285
83 ○ 우리들의 봄 이주희 2013.03.18 2137
82 ★ 지구를 사랑하는 달 이주희 2013.02.17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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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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