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無所有) / 법정(法頂, 1932- )

2009.10.18 05:49

김영교 조회 수:582 추천:54

  
"나는 가난한 탁발승(托鉢僧)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腰布)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評判) 이것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圓卓會議)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 어록(語錄)>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地上)의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된 것이다. 물론 일상에 소요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主客)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이름 있는 난초(蘭草) 두 분(盆)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茶來軒)으로 옮겨 왔을 때 아는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 애들 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 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이라는 비료를 바다 건너 가는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구해 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나는 떨면서도 실내 온도를 높이지 않았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 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청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을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개인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 노사(耘虛老師)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 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구었다.

아차! 이때에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 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執着)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착해버린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僧家의 遊行期]에도 나그네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 못 하고 말았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분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을 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 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초를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소유욕(所有慾)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을 뿐이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고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不辭)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利害)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맹방(盟邦)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사절을 교환하는 사례(事例)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 관계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無所有史)로 그 틀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까.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그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많은 물량(物量)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 볼 교훈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

작자소개

법정(法頂). 본명은 박재철. 1953년 전남대 상과대학에 입학, 1956년 3학년을 수료하고 선학원에 입산, 수도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지리산 쌍계사,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선원에서 수선 안거했으며, 불교신문 편집국장, 역경국장, 보조사상 연구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많은 주옥같은 수필들을 써냈다.

해설 1

법정은 승려라기보다 이미 한 산문가로서의 명성이 뚜렷하다. 그의 글에 감동해서 그가 묵는 암자를 찾아가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이 글은 그 자신의 체험이다. 난을 기르면서 느끼는 애착이 얼마나 자신에게 굴레가 되는지를 깨달아간다는 내용은 독자를 잔잔한 공감의 세계로 이끈다.

무소유라는 주제가 형이상학적이고 일반인이 실천하기는 어려운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쉽게 그의 깨달음에 동조하는 것은 이 글이 매우 진솔하다는 데 있을 것이다. 불승인 법정은 난을 기르면서부터 외출도 자유롭지 못하고 햇빛을 쬐고 물을 주느라 점점 거기 얽매이지 않을 수 없다. 수도승의 방에 난향이 어린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건만 이 무욕해 보이는 난 기르기조차 집착이고 욕망인 것을 그는 마침내 깨닫는다. 그리고 미련 없이 난분을 남에게 건네주면서 무소유의 <날아갈 듯한 해방감>을 맛본다.

그러면서 소유에 집착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은근히 나무랜다. <인간역사란 어떻게 보면 소유사처럼 여겨진다>는 말도 아무 생각 없이 목표물을 향해 달리는 사람들의 발목을 움켜  잡는다. 그리고 소유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크게 버리는 자만이 크게 얻는다>란 진리는 세속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이지만 작은 집착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깊이 있는 글이다.

해설 2

수필은 삶에 대한 진지한 탐색과 사색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단순히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사소한 것에서도 삶에 대한 다양한 의미를 발견해 낸다. "무소유(無所有)"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는 <간디 어록>을 읽고 생각한 간디의 생활상. 또 하나는 지은이의 난(蘭)에 얽힌 체험의 이야기이다. 인간의 소유욕이 빚어내는 역사의 비극과 인간성의 상실을 경계하며, 이러한 욕심에서 해방될 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라는 이 수필의 결구는 우리가 깊게 생각해야 할 인생의 진리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으며, 또한 지은이 자신의 인생관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은 작자의 직접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괴로움과 번뇌는 어떤 것에 집착하고, 더 많이 가지려는 소유욕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말하고 있는 수필이다. 인간의 소유욕은 무한하여 자신에게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을 가지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욕심에 의해 괴로움과 번뇌가 생겨나고, 소유함으로써 그것에 얽매이고 만다. 인간의 역사는 자기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소유사(所有史)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작자는 소유욕을 버림으로써 그것보다 더 큰 마음의 평정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담담하게 서술함으로써 독자 스스로 사색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준다. 평범한 마음 자세 가운데 삶의 깊은 진리를 스스로 터득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는 글이다.

그리고, 이 글은 그 주제와 작자의 종교가 갖는 상관성 때문에, 주제가 매우 형이상학적이고 일반인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되는 이치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게 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사실 평범한 인간에게는 자기가 가진 것을 버린다는 것은 그것의 필요성의 정도에 관계없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작자의 표현대로 인간의 역사는 소유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가지고 싶어하는 인간의 성정, 이런 상황에서 인간에게 소유욕을 버리라는 권유가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 이 글이다.

작자는 그러한 의문을 소유욕에서 비롯되는 폐해를 직시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풀어 보고자 한다. 불도에 정진하는 승려인 필자조차도 무엇인가를 가짐으로써 저절로 그것에 지나치게 집착을 하게 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얻은 결론은 무엇일까? 작자가 얻은 결론은 무엇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곧 그것에 의해 자신이 얽매임을 당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불승(佛僧)으로서의 작자의 깨달음의 한 과정으로서 무소유 사상을 얻게 된 이치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 이 글은 작자 자신이 가고 있는 구도의 길이 주는 경건함과 구체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힘을 지니고 있다.

[출처: 현대수필 http://www.hongkgb.x-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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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3

가슴을 적시는 수필 한 편에 부쳐 / 최원현

법정 스님의 에세이는 대부분 짤막하고 일상(日常) 내지 세속잡사(世俗雜事)에 대한 이야기들이지만 이 편린들을 통해 참여하고 괴로워하며 비판하고 사랑하는 한 인간의 모습과 세계를 경이롭게 바라보고 자기 삶의 확대로 새로운 세계를 체득하려는 적극적인 삶의 모습을 본다.
버릴수록 얻는다고 했다. 무엇인가를 가지려 할 때 거기 얽매이는 탓이다. 설레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소유한 것이 고통스런 집착으로 바뀌는 것임이다.
수필 <무소유>는 1954년 효봉선사 문하에 입산 출가한 법정 스님이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라는 마하티마 간디의 말을 인용하면서 쓴 글이다.
법정(66)은 《무소유》에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것”임! 을 깨닫고,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버리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버린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과 달리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갖지 않게 되는 순간이 바로 온 세상을 갖는 순간인 것이다.

1976년 범우사에서 출간된 《무소유》는 3판 30쇄(통쇄 104쇄)를 찍었으며 1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법정은 <무소유>에서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무소유>만은 꼭 읽기를 권한다. 현대 종교는 마치 신도들의 부(富)와 안위(安逸)만을 추구하는 도구로 전락한 감이 없지 않다. 무엇이든 '내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현대인에게 <무소유>는 무엇이 소유하는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법정 스님의 수필을 읽으면 그래서 마음이 편해진다. 가벼워진다. 너무나 많이 읽혀지고 외우기도 할 이 한 편의 수필을 이렇게 띄워 보내는 것은 한 여름 우리의 마음이 조금은 가난해져 보면 어떨까 싶어서이다.
무엇이 그렇게도 갖고 싶은가. '내 것' 보다는 '우리 것'으로 남겨 두거나, '그것은 네 것이다'고 인정해 주면 안 될까. 결국 내가 다 가질 수는 없는 것이고, 종내는 무엇 하나도 내 것일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임을 왜 모를까.
비가 내리지 않아 난리가 났었는데, 엊그제는 갑자기 너무 많은 비가 내려 사람들이 죽고 차들이 둥둥 떠내려가고,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고 있지 않은가. 새삼 바람처럼 사는 스님이 부럽기만 하다.
법정 스님의 영혼을 맑게 해주는 수필집에는「물소리 바람소리」「서있는 사람들」「산방 한담」「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버리고 떠나기」「텅 빈 충만」「산에는 꽃이 피네」등이 있다.
우리 '수필을 사랑하는 가족' 모두에게도 이 여름에는 꼭 그런 마음의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 것 보다 남의 것을 인정하는 마음은 바로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나를 사랑할 수 있을 때 남도 사랑할 수 있음이리라.

김수환 추기경이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고 말했고, 윤구병 변산 공동체 대표도 "무소유는 공동소유의 다른 이름이다. 나무 한 그루 베어 내어도 아깝지 않은 책"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은 <무소유>에서 소유하고싶은 욕망만큼 커다란 울림 하나가 가슴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출처: 한국수필창작문예원/에세이코리아 http://essaykor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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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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