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벌에서 만난 선열들의 발자취

최근에 헌정회가 주최하는 역사탐방기행에 참여하고 돌아왔다. 여순, 단동, 하얼빈 등 중국의 동북 삼성의 도시들은 일제강점기에 우리가 만주라고 불렀던 곳이다. 이곳은 우리 민족의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다. 고구려의 활달한 기상과 영광이 있었는가 하면 곳곳에 망국의 한이 서려있는, 선대 애국자들의 피어린 자욱이 남아있는 고장이다.
여정(旅程)을 사전에 알고 떠났으면서도 내 나이와 체력에는 무리한 여행이 되겠다고 깨달은 것은 대련에서 단동으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였다. 둘러보니 31명의 동행 중 내가 최연장자에다 최노약자였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내 무모함을 자책했다. 허나, 어쩌랴, 이제 돌이킬 수도 없게 된 것을. 끝까지 잘 버틸 수 있기를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무사귀환을 하나님께 기원했다.
인천에서 한 시간 남짓 날아서 대련(大連)에 도착했다. 가까운 거리여서 그런지 이국적인 정취가 느껴지지 않는다. 대련공항에서 한시간 쯤 달려서 여순(旅順)에 도착했다. 이곳이 바로 우리 민족의 지도자 안중근 의사 (安重根 義士)가 모진 옥중생활 끝에 순국한 곳이다. 제법 규모가 커 보이는 감옥은 우중충한 벽돌 건물이 동과 서, 그리고 중앙으로 방사선 모양으로 뻗어있었다. 러일 전쟁 때는 러시아군의 야전병원과 병영으로 쓰였고 러일전쟁 후에는 일본 군대가 건물을 확장하여 감방으로 썼다 한다.
우리는 안중근의사가 이등박문 (伊藤博文)을 저격하고 체포되어 5개월 동안 옥살이를 한 바로 그 간방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묵념을 올렸다. 안 의사가 입었던 황토색 무명수의가 걸려있는 방을 지나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방도 들어 가 보았다. 거기에는 교살할 때에 쓰였던 밧줄이 벽에 걸려있어 가슴을 섬뜩하게 했다.
안타깝게도 죽은 시체는 의사의 검증이 끝나자마자 통나무 틀 안에 구겨 넣어 영내의 묘지에 묻어버렸다고 한다. 우리는 다만 옛 무덤자리와 몇 개의 통나무 잔해만 볼 수 있었다. 안중근의사의 시체가 묻힌 곳으로 알려진 묘지는 영내의 동쪽 비탈에 자리 잡고 있는데 시체를 담은 나무통이 빡빡하게 묻혀 있는 것을 해방 후 발굴했다는 이야기이다. 유감스럽게도 안 의사의 유해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옆방에는 신채호, 이회령, 최흥식등 당시의 애국지사들의 사진과 기록이 전시되어 있었다.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바로 이 여순감옥에서 산화하신 분들이다. 벽에는 ‘안중근이 중국과 조선 두 나라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시작했다‘ 라고 쓴 족자가 걸려있었다.
안중근은 한말에 국력의 쇠퇴로 국정이 극도로 혼란하여 국운을 겨우 부지하고 있던 시기인 1879년에 탄생하여 굴욕적인 한일합방이 이뤄진 1910년까지 31년이란 짧은 생애를 살았다. 기록에 의하면 30세의 안중근은 열혈의 청년, 건전한 사상과 애국열, 수려한 미목에 늠름한 생김새, 강철 같은 체구, 그 어느 하나도 주목을 끌지 않는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전시실에는 안 의사가 단지 (斷指)로 쓴 글도 걸려있었다. 1909년 3월 안중근의 집에 12명의 동지가 모여 비장한 구국의 방략을 세웠다. ‘동양의 평화가 유지될 때까지는 천신만고를 다하여 국사에 진쇄하여야 하오.’ ‘우리는 이 자리에서 하늘에 맹세합시다’ 등의 말을 하고 난 후 안중근은 단도를 끄내 왼손 무명지를 자르고 흐르는 피로 [대한독립만세]라고 썼다고 한다.
같은 영내에 있는 일본군 관동총독부 지방법원과 고등법원 법정도 돌아보았다. 해설자로부터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를 주장하며 당당하게 재판에 임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머리가 수그려졌다.
대련에서 여순으로, 단동, 심양 (瀋陽)으로, 또 하르빈으로 버스로 달리고 또 달리며 바라본 만주벌판은 너무도 광활하고 광대했다. 그중에 단동과 심양은 각기 인구 7,8백만이 되는 대도시로 번창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수십 배는 되는 넓은 땅은 아직도 미개척지로 남아있는 토지가 많아 보였다. 지하자원도 많고 관광자원도 많고, 게다가 인구도 세계에서 제일 많은 나라 중국. 작은 한반도(韓半島), 그것도 반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에서 온 한국인으로서 부럽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중국의 13억 인구가 오늘의 한국인 수준으로 생활수준이 높아지는 날에는 세계자원이 고갈될 것이라는 말도 있고 보면 중국의 무한 발전을 마냥 좋아 할 수만은 없는 일 같다.
단동에서는 유람선을 타고 전쟁으로 단절된 압록강 철교 밑을 지났고 만리장성의 시발점이라는 호산(虎山) 산성도 둘러보았다. 이 산성 아래에 있는 북한과의 국경선인 일보과(一步跨)는 한 걸음에 뛰어 넘을 수 있는 개천으로 되어있고 물의 깊이는 몸이 잠길 정도라고 한다. 우리 일행의 관심은 역시 북한과의 접경지대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손에 잡힐 듯 가까운 산천을 지척에서 바라보기만 할 뿐 접근할 수 없는 현실이 새삼 안타깝게 느껴졌다.
우리는 심양의 북정거장에서 기차를 타고 4시간 반이나 달려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제1 프레트홈의 한 지점에 이르니 그 자리가 바로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자리라 했다. 우리는 또 한 번 묵념으로 그의 애국 혼을 기리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마지막 코스로 중국이 자랑하는 호림원에서 백여마리의 호랑이를 구경하고 태양도도 관람하였다.
지나고 보니 이번 역사 탐방기행은 주로 안중근의사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기행이 되었다. 너무도 훌륭한 선열들을 가졌다는 자부심과 함께 나라생각은 별로 안하고 너무나 안일한 마음으로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자괴심을 동시에 안고 만주벌 유적지를 떠났다. (2012/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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