쑤욱 빠져서/김병종화가

2014.04.13 07:37

김영교 조회 수:495 추천:8

시간도둑

컴퓨터 스마트폰에 빠진 우리… 제 삶의 콘텐츠 채우기보다 남의 삶 간섭으로 세월 낭비
일주일에 단 하루만이라도 디지털 휴무일 두면 어떨까
자신의 시간을 도둑질하는 어리석음 줄여야 하지 않겠나

집 근처 산에 있는 약수터에 갔다가 한 노인을 만났다. 내일모레 구십이라 하는데 연세에 비해 정정했다.

어떻게 그렇게 건강하시냐고 했더니 그렇지도 않단다. 안 아픈 데가 없고 그래서 일삼아 약수터도 오는 거라며

세월이 참으로 빠르게 흘러갔다고 했다. 교사로 정년 퇴임한 지가 엊그젠데 어느새 30년 가까운 세월이 가버렸단다.

그러면서 뜬금없이, 시간도둑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당신의 시간을 훔쳐가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뭘 꺼내는데 스마트 폰이었다. “이놈도 그 중의 하나야”라면서.

자식들이 선물이라며 바꿔주는 바람에 그걸 틈틈이 들여다보고 있는 데다 노인학교에서 배운 컴퓨터 앞에 앉아서 보내는 시간도 많고

텔레비전 시청 시간도 만만치 않아 세금이라도 내듯 기계에 바치는 시간이 여간 아니라는 것이다.

들여다보는 것이 많다 보니 불필요한 것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사는 일이 산만하고 잡다해졌다고 푸념이었다.

말하자면 그 기기들이 시간도둑이라는 말이다. 요즘엔 책 읽는 시간이나 손주들 만나는 시간까지도 줄어들어 버렸단다.

그러면서 내가 이럴 정도니 젊은 사람들은 오죽하겠느냐는 것이다.

하긴 얼마 전 통계를 보니 한국인이 컴퓨터나 스마트폰, 그리고 텔레비전 시청으로 보내는 시간이 내 예상치를 훨씬 웃돌았다.

설마 이 정도까지, 싶을 만큼 어른아이 할 것 없이 깨어 있는 동안은

거의 이 세 가지 중의 하나에 붙들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푸석하게 살다 보면 10년 세월이 옛날 1년에 맞먹는 것”이라는 노인의 말은 그저 흘려 들어 버릴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삶이 날로 바빠지는 것은 송년회 일정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게,

언제부턴가 한 해를 마감하는 모임이나 행사들이 11월로 앞당겨지고 있다.

12월은 피차에 너무 바빠 일정 잡기가 힘들어 아예 앞당긴다는 것인데 이러다 보니 덩달아 쫓기는 심정이 되고 만다.

이래저래 12월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의미 있는 시간으로 대접을 못 받은 채 엉거주춤 딸려 있는 부록처럼 되어 버렸다.

얼마 전까지는 2년에 세 번 만나면 꽤 가까운 사이였는데

그게 요새는 3년에 두 번으로 바뀌었다니 정말 광속 사회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 간격이 언제 또 5년에 두 번쯤으로 바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일상은 인간관계도 재편해 버린다. 혈연공동체는 느슨해지거나 무너져버리는 데 반해

소위 소셜네트워크 속의 관계 맺기는 더 광범위하고 급속히 확산되어 간다.

어디선가 들은, 대학등록금을 마련해준 외할아버지는 못 찾아 뵀는데

비운에 간 전직 대통령의 묘소는 여러 번 참배했다는 한 청년의 이야기도

바로 이런 변화된 관계의 지도를 드러내는 것일 터이다.

예컨대 손바닥에 놓고 들여다보는 가상의 네트워크 속 가치가,

가족이나 친지 같은 현실의 공동체보다 훨씬 가깝고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밥상머리교육이 사라진 대신 이 네트워크 속의 빅브러더들이

수천 수만 명을 몰고 다니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니 입맛이 개운치가 않다.

특히 스스로 고민하고 회의하며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야 하는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이런 방식의 관계 맺기는 인격의 성숙이나 지적 성장에 도움이 되기 어렵다.

안타까운 것은 내 삶의 콘텐츠를 채우기보다는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며 갑론을박하다가 세월이 훌쩍 지나간다는 것이다.

예컨대 ‘뒷담화’와 ‘카더라’류의 말의 홍수 속을 떠다니게 되는 것이다.

입시 정책을 선도하는 서울대 입시에서 논술이 제외된다는데,

자신의 지성과 사고를 통해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을 훈련 받지 못한 청년세대들에게

주관 없는 쏠림현상은 더욱 심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대안은 없는 것일까.

허다한 책들과 조언자들이 이 광속으로 달리는 문명의 열차에서 잠시 내려

인간적인 속도의 완행기차로 갈아타 보라고 권유한다.

자연의 시간표를 좇아보라는 것이다. 그게 쉽지 않다면

하다못해 일주일에 하루라도 디지털 휴무일을 두어 볼 일이다.

어느새 다시 세밑이다. 독한 자기 절제로 시간의 문고리를 단속해서

제 스스로 자기 시간을 도둑질하는 일만은 없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김병종 (화가·서울대 교수) “동아광장”

<동아일보>

201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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