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부작 - 꿈꾸는 우리 가족 / 1부 탈출을 꿈꾸는 아이
2021.05.05 16:04
<3부작 - 꿈꾸는 우리 가족>
제 1부
탈출을 꿈꾸는 아이
나는 열두 살짜리 남자아이, 미국에서 태어났어요.
우리 집은 로스앤젤레스에 있으며, 식구는 나, 엄마, 아빠 이렇게 셋이에요. 아빠는 우락부락 무섭고 툭하면 냅다 소리를 질러요.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데 도통 말이 없어요. 나는 아주 똑똑해요. 사람들이 날 천재라고 불러요. 그런 말 들으면 창피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머리는 정말 짱인 것 같아요.
나는 세 나라 말을 할 수 있어요. 우리 집에서는 한국말만 쓰기 때문에 난 한국말을 잘해요. 학교에서는 영어를 쓰고, 스페인어도 할 줄 알아요. 말하기 읽기 쓰기도 다 잘하지요.
말만 잘하는 게 아니에요. 컴퓨터도 아주 잘해요. 컴퓨터는 참 신기해요. 그 안에 들어가면 없는 게 없이 다 있어요. 그중에서도 과학 이야기가 제일 재밌어요. 가끔 한국 프로그램에 들어가다 보니 한국말도 많이많이 느는 것 같아요. 한국 영화도 보는데, 옛날 영화가 참 신기하고 재밌어요.
학교 성적도 항상 올 A이고요. 그것도 하일리 기프티드 스쿨에서요. 실은, 제가요······ 미국 전체 IQ 테스트에서 99.9%ile이라는 높은 점수를 받아 하일리 기프티드 스쿨에 들어가게 됐어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내 머리가 그렇게 좋은 줄은 나도 몰랐거든요. 우리 학교 애들도 다들 머리는 나만큼 좋을 거예요.
우리 반에 한국 애가 나 말고 하나 더 있어요. 그 애가 제이슨이에요. 제이슨 엄마는 영어를 굉장히 잘하더라고요. 그리고 한국말도 잘하고요. 저를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고, 저보고 한국말 잘한다고 칭찬도 해줘요,
가끔은 제이슨 아빠는 어떤 사람일까 하고 궁금했는데, 한 번은 학교에 왔더라고요. 인상이 참 좋았어요. 아빠하고는 아주 달랐어요. 아들을 보자마자 덥석 안아 주었어요. 열두 살이나 먹은 애가 완전 아기 같았어요. 낯간지러우면서도 가슴에 뭐가 쏴아--- 하고 지나갔어요.
제이슨이 뭐라고 얘길 하니까 “우리 아들 최고! 최고야!” 하면서 엄지를 척 치켜들고 칭찬을 해줬어요. 그리고는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보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어요.
“네가 크리스구나. 아주 잘 생겼네.”
그의 손이 머리에 닿자 뭔가 머리끝에서 찌르르하고 아래로 내려왔어요.
참, 내 이름은 크리스 스미스예요. 철이 들면서 내 라스트 네임이 스미스라, 좀 이상했어요. 엄마, 아빠는 완전 한국 사람이거든요. 알고 보니 아빠가 미국 군인한테 입양이 되었더라고요. 열 살 때, 부모를 잃고 보육원에서 자랐대요. 그러니까 불쌍한 어린애였겠지요. 사랑도 못 받고요. 그래서 사랑을 줄 줄도 모르나 하는 생각을 가끔 했어요.
사랑이 없으니까 칭찬할 줄도 모르는 것 아니겠어요?
아빠는 나한테 칭찬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맨날 깎아내리는 소리만 해요. 아들이 똑똑하면 부모는 자랑스러워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 아빠는 참 이상해요. 자꾸 나를 꾹꾹 눌러서 기를 죽이려고 해요.
“아이가 아이다워야지! 도대체 너는 어찌 생겨먹은 놈이냐? 쬐끄만 놈이 벌써부터 어른 행세를 하니 말이야. 누굴 닮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니까? 정말 이상하다니까······.”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는 도대체 도대체를 연발하면서 못마땅해한다고요.
사실이 그래요. 모든 면에서 나는 너무 일찍 자라 버렸어요. 사람들이 날 보고 ‘애늙은이’라고 그래요.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아이치고는 너무 어른스럽다는 말이라네요.
어른! 그래요. 나는 하루라도 빨리 진짜 어른이 되고 싶어요. 빨리 어른이 되어 엄마를 데리고 아빠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요.
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참 불쌍했어요. 어떤 때는 엄마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요.
생각할수록 이상해요.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착한 우리 엄마가 어쩌다가 시커멓고 우락부락하고, 거기다가 성격도 제멋대로인 아빠랑 결혼을 했는지 도대체 모르겠어요. 어떨 때는 아빠는 무서운 왕이고, 엄마는 찍소리도 못 하는 시녀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럼 나는 뭘까요?
그러니까 우리 집은 이상한 사람들 셋이 모여 살고 있는 셈이네요.
하루해가 저물어 어둑어둑해지면 나는 늘 조마조마해요. 아빠가 회사 끝나고 집에 들어오실 시간이기 때문이지요. 오늘은 또 무슨 트집을 잡아 엄마를 야단칠까 하고 가슴이 뛰는 거죠. 물론 당하는 엄마는 나보다 훨씬 더 불안하겠죠.
아빠 회사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요. 투자 전문회사인데, 아빠가 사장이에요. 사장이고, 돈도 잘 벌고 하면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아빠는 그 반대랍니다.
아, 드디어 차 소리와 함께 아빠가 오는 소리가 났어요. 가슴이 철커덩 내려앉으며 쿵쿵 쿵쿵 소리를 내기 시작하네요. 아니나 다를까? 아빠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문턱을 넘어서기 바쁘게 냅다 소리부터 지르네요.
“아니 어쩌자고 차를 또 저렇게 세워났지?? 이리 나와 봐!”
차를 똑바로 세우지 않고 삐뚜로 세웠다고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사실, 엄마가 운전이 아주 서투르기는 해요. 차를 똑바로 파킹을 하려면 몇 번을 앞으로, 뒤로 왔다 갔다 해요.
“까딱 잘못했으면 또 벽을 들이박을 뻔했잖아! 지난번에 벽 들이박은 게 얼마나 됐다고 아직도 이 모양이야? 아예 운전을 하지 마. 하지 말라구우-----.”
한 두어 달 전에 엄마가 차고 벽을 쳤다가 아빠한테 야단맞은 것을 생각하니 지금도 가슴에서 뭔가가 불끈 치솟아요. 그렇게 야단법석을 떤다고 해서 벽이랑 차가 어디 본래대로 돌아오나요? 이왕에 벌어진 일, 엄마가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 아닌가요?
“오늘은 또 어딜 싸돌아다닌 거야? 쓸데없이 나가 다니지 말고 집에 좀 가만 붙어 있으라구우우우------.
아빠는 엄마가 나가 다니는 것을 아주 싫어해요. 괜한 트집을 잡는 거지요.
‘차가 비뚤어졌으면 바로 세우면 되지 왜 그렇게 소릴 지르고 야단이에요?’ 하고 한마디쯤 하면 좋으련만, 엄마는 항상 아무 말도 안 해요.
아빠는 가만있어도 되는 일에 괜히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엄마는 꼭 소리를 질러야 하는 일에도 침묵을 지키고······.
어쨌든 우리 집은 완전 거꾸로 된 집안이에요.
아빠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것, 그게 와이프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고 자동차인 것도 마찬가지예요. 우선순위 1위가 단연 자동차이니까요.
자동차! 그래요. 자동차!! 그만큼 아빠가 자동차에 미쳐 있는 겁니다,
네 살 때 있었던 일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아빠가 페라리라는 아주 비싼 차를 새로 샀었는데, 내가 잘못해서 그만 오렌지주스를 컵째로 뒷좌석 바닥에 엎질렀지 뭐예요.
아빠는 내 뺨을 후려쳤어요.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뺨이 얼얼하게 아파져 와요. 숨통이 멎는 것 같아 울음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는데, 아빠는 우악스러운 손으로 내 멱살을 잡고는 나를 번쩍 치켜들더니··· 뒷좌석에다 내동댕이쳤어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동댕이치다니, 그것도 네 살밖에 안 된 아이를! 나는 새파랗게 질려 몸을 새우처럼 오그리고 무서워서 벌벌 떨었어요. 아빠가 그림에서만 보던 바로 그 악마 같았어요.
엄마는 나를 얼른 보듬어 안고 집 안으로 피했지요. 나를 꼭 껴안은 엄마의 가슴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내 가슴에까지 전해 왔어요.
잠시 후에 아빠가 따라 들어왔어요. 나는 아빠 얼굴을 보는 것조차 무서워 눈을 꼭 감고 엄마의 가슴을 파고들었어요.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소름이 오싹오싹 끼쳤지요.
“미안해. 내가 잠깐 돌았었나 봐. 정말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이 말은 아주 자주 들어온 소리예요. 폭력을 휘두른 뒤 아빠가 엄마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면서 하는 말이거든요. 미안해. 내가 잠깐 돌았었나 봐. 정말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그리고 그다음 날 아빠는 엄마에게 주려고 보석 반지를 사 와요. 열두 살밖에 안 된 아이가 보석 이야기를 하는 게 참 어울리지 않지요? 그러나 나는 여러 가지 보석들의 이름도 다 알아요. 애늙은이답게···
어느 쓸쓸한 날이었어요.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지요.
엄마가 보석함을 꺼내놓고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모두가 다 반짝반짝 빛이 나고 색깔들이 정말 예뻤어요.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등등 반지에서부터 목걸이 귀걸이가 수두룩했어요. 내가 이름을 물어보니까 엄마는 이건 다이아몬드이고, 이건 사파이어, 또 이건 루비··· 하면서 말을 하다 말고 “너는 그런 거 몰라도 돼.” 하면서 얼른 보석함을 닫았어요.
그런데 엄마는 보석 반지를 끼지 않아요. 가끔 들여다보기만 해요. 보석 반지를 낄 때가 있긴 하지요. 집에 아빠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할 때랍니다. 친구라기보다는 회사에 필요한 돈 많은 사람들이에요. 아빠 성격에 아마 친구도 없을걸요. 집에서는 폭군 노릇을 하면서 손님들에게는 아주 최고로 해요. 완전 임금님 대접이라니까요.
그리고 둘이서 쫙 빼입고 파티에 갈 때는 보석 반지를 번쩍번쩍 끼지요. 아빠한테는 아마도 와이프가 견본용인지도 모르겠어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로 치장을 하고 보석 반지를 번쩍번쩍 끼고 나갈 때는 엄마도 좋아하는 게 확실해요. 행복해 보이거든요. 물론 아빠는 더 좋아서 연상 싱글벙글하지요. 아빠가 폭력을 휘둘러도 같이 나갈 때는 사이가 진짜 좋아 보여요.
‘폭력을 휘두른다’는 말은 나 같은 아이에게는 어려운 말인데, 난 그런 어려운 말들을 많이 알아요. 늘 당하니까요.
엄마가 당할 때마다 나는 폴리스를 부를까 하는 생각을 해요.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아빠가 더 나빠질 수도 있는 일이에요. 재일에 가고, 회사에서도 알게 되고 하면, 아빠가 그 성질에 완전히 미쳐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더 큰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언젠가 뉴스에서 봤어요. 우리 집하고 똑같은 집이 또 있었어요. 열 살 먹은 아들이 엄마가 맞는 것을 보고 놀라서 폴리스를 부른 거예요. 현장에서 애 아빠는 잡혀갔지만, 재일에서 나와 가지고 반성을 하고 좋은 사람이 된 게 아니고, 더 나쁜 사람이 된 거예요. 더 때렸대요. 그래서 와이프가 도망갔는데, 잡아 와서 차에 태우고 가다가 사고를 낸 거였어요. 둘 다 생명이 위독하다고 했어요.
또한 엄마가 절대로 원치 않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아니까요. 엄마는 혹시라도 옆집에서 알까 봐, 아주 쉬쉬해요. 물론 옆집에서는 모르죠. 집이 크니까 굿판을 벌여도 아무도 몰라요. 미국서 난 애가 굿판을 어찌 아느냐고요? 한국 영화에서 봤죠. 너무 신기해서 안 잊어버려요.
그래서 저는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어요. 가정 폭력을 막아주는 로봇을 만드는 일이에요. 아무도 모르게 일을 다 해결해 주는 로봇이 있으면 가정 폭력은 자연히 없어져요. 다행히 나는 전 과목 중에서 과학을 제일 좋아하니, 로봇을 발명하는 것은 분명히 가능해요.
나는 잘 알아요. 엄마는 지금 아빠가 좋은 사람이 꼭 되리라는 것을 믿고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엄마가 너무너무 착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내 생각은 달라요. 아빠는 좋은 사람이 안 돼요. 고아로 자랐으니 그 환경이 무지무지 안 좋았겠지요. 그래서 성질이 나빠지고 남을 때리기도 했겠지요. 물론 맞기도 했을걸요. 그래서 때리고 맞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어버린 거예요.
원래 성질이 좋았다면 절대로 아빠처럼 되지는 않아요. 아빠는 애초부터 욕심 많고 남 생각은 조금도 않고 자기밖에 모르는 그런 성격을 갖고 태어난 것 같아요. 불쌍한 고아였던 아빠한테 이런 소리 하는 것은 자식으로서 미안해야 하지만 나는 하나도 안 미안해요. 그리고 안 불쌍해요. 미워요.
아빠는 굉장히 부자예요. 그런데도 욕심이 어찌나 많은지요······ 소소한 것에 무지무지 쩨쩨해요. 우리 집 뒤뜰 대추나무에 대추가 너무너무 많이 열려 주체를 할 수 없어도 남 주는 것을 싫어해요. 어떨 때 마음이 내켜 회사 직원들한테 갖다줄 경우는, 작고 못생긴 놈만 골라 담아요. 그런 건 엄마한테 그냥 맡기면 편할 터인데, 남자가 돼 가지고 참 웃겨요 웃겨! 아는 집에 초대를 받아 가도, 아주 싸구려 선물을 가져가요.
근데 식구들한테는 돈을 안 아껴요. 엄마한테도 경제적으로는 참 잘해주는 것 같아요. 어디 가면 음식도 최고 비싼 거 먹어요. 냉장고에도 항상 맛있는 것들이 꽉꽉 차 있고요. 웃기는 건 엄마가 사 오는 게 아니라 아빠가 맨날 뭘 사 온다니까요. 그리고 나한테 드는 교육비도 다 내주고, 내가 원하는 것들은 아무리 비싸도 다 사 줘요.
근데 엄마는 반대예요. 나한테 꼭 필요한 것만 사 주고요, 대추도 오렌지도 크고 좋은 것만 골라서 먼저 남한테 줘요.
어떨 땐, 좀 답답해요. 엄마 자기 생각은 않고 너무 상대방만 생각하니까요.
나와 엄마한테 돈 아끼지 않고 잘해주는 것, 그건 아빠의 좋은 점이라고 생각해요. 그 좋은 점을 말과 행동으로 다 망가트려 버리는 아빠······. 왜 그럴까요?
얼마 전에 우리 학교 학부모회장 집에서 파티가 있었어요. 과학경시대회에서 우리 학교가 우승을 해서 회장님이 한턱을 쏜 거였어요. 개인전에서는 내가 중등부 최우수상을 받았어요. 회장님 아들도 아슬아슬하게 입상을 했고요.
부모님들도 초청을 받았으나, 나는 아빠가 안 간다고 그럴 줄 알았어요. 사실은 안 가기를 바랐고요. 그런데 글쎄, “아들이 최우수상을 탔는데, 아빠가 가야지.” 그러지 않겠어요? 아빠랑 같이 가야 하니 진짜 가기가 싫었어요.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파티장 그런 데 가는 거는 안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최우수상을 탔으니, 내가 안 갈 수 없잖아요.
회장님 집은 작고 허름했지만, 뒤뜰이 굉장히 넓어, 가든파티를 했어요. 파티 끝나고 집에 오는 차 안에서 아빠가 얘기를 늘어놨어요.
차를 타자마자 아빠가 한 첫 마디가 뭔 줄 아세요?
“아들이 꼴찌로 입상했는데, 뭐가 그리 좋다고··· 지가 제일 좋아하대?”
아주 빈정대는 말투였어요. 그리고는 모두 다, 안 좋은 말만 했어요. 뭐가 단단히 틀린 것 같았어요.
“내가 회장에 대해서 미리 공부를 좀 했었는데, 하버드 박사에, 대학교수라며? 그리고 재벌회사 자문위원에, 또 그 뭐더라··· 아무튼, 굉장한 사람이더구먼. 근데, 그 사람 집 꼴이 어째 그 모냥이냐? 우리 집 변소간만도 못하잖아?”
나는 깜짝 놀랐어요. 우리 집 변소간만도 못하다는 말, 아들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지만 아빠는 그런 사람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회장님에 대해 미리 공부를 했다는 말이 정말 놀라웠어요. 엄마는 워낙 아빠 말에 일체 대꾸를 안 하니까, 이번에도 침묵이에요. 나도 물론 침묵했지요.
“근데 그 너른 땅을 왜 놀리고 있지? 그 좋은 머리를 돈 버는 데 써야지··· 참 아깝다. 아까워. 어찌나 꽉 막혔는지 바늘 들어갈 구멍도 없더군!”
말 안 해도 뻔해요. 오늘 파티한 그 정원에 타운 홈을 지어라 그랬겠지요. 아니, 허름한 집채도 싹 밀어버리고 타운 홈을 지으면 돈을 수백만 달러를 벌 수 있다고 그랬겠죠. 아니면 콘도를 지으라고 했던지요. 회장님은 돈 버는 머리가 없어서 한마디로 거절을 했나 봅니다.
“회장이 글쎄, 그 집에서 태어났다는군! 참 내, 기가 막혀서. 부모님이 물려준 집이라 그대로 보존을 해야 된대나? 이거 원! 이런 돌대가리를 하버드 바보라고 하나?”
갈수록 말이 심해졌어요. 회장한테 무안을 당해 화가 난 것 같았어요. 애들 축하 파티 자리인데 이런 소리를 한 건 아빠 잘못 아닌가요? 사업 이야기를 하려면 따로 만나서 해야지요.
바른말을 하면 아빠 화를 더 돋우는 격이 되니 무조건 참아야 했어요. 더구나 아빠가 운전대를 잡고 있으니, 더 참았지요.
“그리구 말야. 음식이 그게 뭐냐? 사람 불러놓고 기껏 국수야?”
국수가 어때서요? 이탈리안 파스타였는데, 그 안에 큰 새우랑 여러 가지 씨 푸드가 들어가고 또한 크림소스가 일품이라 아주 맛있어요. 아빠도 맛있게 먹고는, 말을 그렇게 해요. 그리고 고기 파스타가 또 있었어요. 씨 푸드를 안 좋아하든가, 고기를 안 좋아하든가, 하는 사람들을 위해 두 가지를 마련했나 봐요. 나는 그 배려하는 마음이 고마웠어요. 덕분에 나는 두 가지를 다 실컷 먹었지요.
“그리구 말야. 음식이 어찌 숲하고 살라드 달랑 세 가지밖에 없냐? 사람을 초대했으면 요리사를 불러서라도 먹는 거는 푸짐하게 했어야지. 에이-- 입만 배렸다.”
꼭 가짓수가 많아야 하나요? 수프와 샐러드도 참 맛있었어요. 제 입맛이 좀 한국적인데도 아주 좋았어요. 엄마도 맛있다고 몇 번이나 그랬어요. 엄마도 아빠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지만, 아마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예요. 드디어 화살이 엄마한테로 날아갔어요.
“야, 너는 그 집 식모냐? 왜 니가 거들고 지랄이야?”
지랄? 가슴에서 뭐가 불끈 솟아올랐어요. 숨까지 막혔어요. 엄마가 고개를 돌려 뒷좌석의 나를 보는데 의미심장한 눈초리였어요. 암말 말라는 신호인 걸, 물론 잘 알지요.
“영어를 못하면 조용히 앉아나 있지, 설치고 다니는 꼴이 아주 가관이더군! 얼굴 이쁘다고 자랑이 하고 싶었어?”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소리예요. 엄마가 거든 것도 없고 설친 것도 없어요. 사모님이 음식 차릴 때, 좀 도와준 것뿐이에요. 그건 다른 엄마들도 다 같이 했어요. 또 거기에 엄마 얼굴 예쁜 얘기는 왜 나옵니까? 와이프가 예쁘면 좋은 거 아녜요? 다른 파티에 갈 때처럼 번쩍번쩍 반지도 안 끼고, 옷도 화려하게 안 입었어요. 그냥 수수했어요. 근데 트집을 잡는 거예요.
더 기분 나쁜 건 엄마 영어 못한다는 말을 아들 앞에서 대놓고 한 겁니다. 물론 엄마가 영어 부족한 건 나도 알아요. 그러나 아빠처럼 좔좔 못 해서 그렇지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어요. 근데 엄마는 주눅이 들어서 사람들 앞에서는 말을 잘 안 해요. 매사에 자신감이 없어요. 아빠는 이런 엄마 성격에 상처를 주고요.
아빠는 운전대를 잡고 앞만 보며 계속 지껄였어요. 아빠 뒤통수를 그냥, 한 대 쾅-- 쥐어박고 싶었어요. 불끈 쥔 내 주먹이 엉엉 울었어요.
드디어 차가 게이트 앞에 도착해, 아빠 말은 거기서 끊어졌어요. 육중한 게이트가 열리고 차는 안으로 굴러 들어갔어요. 불빛 찬란한 풍경과는 달리 내 맘은 어두워졌어요. 거대한 감옥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즐비하게 서 있는 어마어마한 저택들 속에 불을 환히 밝히고 우뚝 서 있는 우리 집, 이 역시 내게는 감옥입니다.
아! 거대한 감옥 안에 있는 또 다른 감옥으로 나는 오늘도 들어가야 해요.
우리 집은 대궐같이 어마어마하게 커요. 도대체 세 식구뿐인데 왜 이렇게 큰 집에 사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알 수가 없어요. 아이라서 뭘 몰라 그런다고 할지 모르나, 나는 어른이 돼도 이런 큰 집에서는 절대로 살지 않겠어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나는 이렇게 큰 집은 싫어요. 감옥 같아서 싫어요.
우리 집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 성안에 있어요. 커다랗고 높다란 쇠창살로 된 정문은 늘 굳게 닫혀 있고요. 감옥이 따로 없어요. 내가 살고 있는 성이 바로 감옥이고, 우리 집 또한 감옥이나 다르지 않아요. 그러니까 나는 큰 감옥 안에 있는 또 작은 감옥 속에 갇혀 사는 아이인 셈이지요. 내 말 아시겠어요?
나는 한 번 들은 것들은 잊어버리지 않는 기억력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엄마가 갖고 있는 보석들의 이름을 모조리 다 외우지요.
가끔씩 휘황찬란한 보석들이 가득 든 보석함이 내 머리를 언뜻언뜻 스칠 때가 있어요. 그 보석들은 굉장히 비싼 것들이니, 아빠로부터 도망을 쳐도 저 보석만 있으면 엄마랑 잘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어른이 되기 전에 좀 더 일찍 도망칠 궁리를 해보는 겁니다. 내가 돈을 많이 벌 때까지······.
하지만 포기했어요. 그건 죄가 되는 거니까요. 더구나 아빠와 맞서 싸울 수도 없고요. 나는 열두 살밖에 안 됐고, 아빠는 무서운 사람이거든요.
나는 자신 있어요. 게임 하나만 개발해도요··· 엄마랑 둘이 살기는 걱정 없어요. 물론 아빠처럼 부자로는 못 살지만요. 부자요? 사는 데에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돈이 있으면 되지, 돈이 많이 없어도 아무 상관 없어요. 어쨌든, 나는 아빠처럼 사는 건 다 싫어요.
아빠의 아들이니 나도 아빠를 닮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나를 괴롭히기도 해요. 죽으면 죽었지 나는 절대로 아빠는 닮지 않을 거예요. 닮고 싶지 않아요!
요즈음은 자꾸 보석함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네요. 그럴 때마다 나는 그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가슴이 두근두근 거려요. 그리고······.
아! 어서어서 자라서 하루빨리 진짜 어른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이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다구요. 불쌍한 엄마와 함께······.
글벗동인 제 1 소설집 <다섯 나무 숲> 2020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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