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부작 - 꿈꾸는 우리 가족 / 3부 본향을 꿈꾸는 엄마
2021.05.05 16:13
<3부작 - 꿈꾸는 우리 가족>
제 3부
본향을 꿈꾸는 엄마
“오늘은 또 어디를 싸돌아다닌 거야? 어제 닦은 차가 먼지를 잔뜩 뒤집어썼잖아?”
남편의 목소리가 또 귀를 때려요. 예전에는 가슴이 두근두근 방망이질을 했는데, 이제는 괜찮아요. 만성이 돼서 면역이 생겼나 봐요.
내가 나갔다 온 것이 못마땅해 트집을 잡는 거예요. 보통 말로 해도 되는데, 남편은 항상 인상을 쓰며 소리부터 질러요. 내가 남편을 변하게 할 수는 도저히 없어, ‘내가 변해서 남편이 변할 때를 기다리자.’ 하고. 참고 산 지가 근 10년이 넘었어요. 한데, 이제는 안 되겠어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손찌검하는 것은 어떡해서든 끝장을 내야 하겠어요. 참고 살면서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과연 남편을 위하는 길일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사실, 지금까지 견뎌온 것은 아들 힘이 커요. 아들만 보면 남편한테서 당한 속 터지는 일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거든요 ‘이런 아들을 내게 준 사람이 바로 남편인데, 그거 하나만이라도 감사하자.’ 하고 마음을 다독이며 기다린 거죠.
아들아이는 엄마가 참고 사는 것을 알아요.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파요.
언젠가 아들아이가 그러데요. 자기는 커서 과학자가 되겠다구, 훌륭한 과학자가 돼서 가정 폭력을 막아주는 로봇을 발명하겠다··· 그러더라구요.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얼마나 가슴이 짠하던지··· 내가 애한테 큰 죄를 지은 것 같기도 하고···
엄마인 나보다도 더 속이 깊은 아들이에요. 이제 겨우 열두 살이지만 엄마 마음을 다 알아요. 폴리스를 안 부르는 것도 엄마 속을 알아서 그래요. 그 부작용도 헤아릴 줄 알구요. 엄마가 희망을 걸고 참고 기다리는 것도 물론 알지요.
한데 나는 아들아이 속을 몰라 가끔 깜짝깜짝 놀라곤 해요.
지금 아들은 극히 우수한 아이들만 입학이 가능한 영재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지난번에는 전국 과학 경시대회에서 중등부 최우수상을 타는 바람에 크리스 스미스라면, 그 이름을 전교생이 다 알 정도예요. 물론 성적도 특별히 뛰어나고요. 그렇지만 저는 공부 잘하는 것보다도 아이가 아이답게 명랑하고 까불며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더 좋아요. 그런데 크리스는 친구가 거의 없어요. 말도 별로 없고, 나가 노는 법도 없고, 항상 컴퓨터만 들여다봐요. 성격이 이렇게 된 것이 다 부모 탓인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고, 참 슬퍼요.
부자 남편을 만나······ 부자 남편요? 글쎄요 그 부자가 얼마나 갈지 모르지만요.
아무튼, 부자 남편을 만나 지금은 미국 엘에이에서 호화롭게 살고 있지만, 나는 아주 가난한 집안의 소녀 가장이었어요. 아버지는 아파 드러누워 계시고 엄마가 파출부 일을 해서 사는 집안이 오죽했겠어요? 내가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수밖에 없었죠. 중학교에 다니다 말고 공장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숙식은 제공해 주어 월급은 꼬박꼬박 집으로 보냈지요.
아버지 약값, 그리고 남동생 학비 대느라 야간작업을 거의 매일 하고 주말에도 일을 했어요. 동생은 착하고 공부도 굉장히 잘했어요. 동생이 학기말 시험에서 전교 1등을 했을 때는, 피곤이 싹 가시며 기운이 팍팍 솟았어요.
녀석이 누나 걱정을 많이 했어요. 서로가 걱정하고 배려하는 저희 가정은 항상 화목했어요. 마음도 편안했고요. 가난한 것이 사는 데에 좀 불편하기는 하나, 창피한 일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우린 항상 떳떳했고 행복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동생도 없고 부모님도 안 계셔요.
신이 계신다면 세상이 이럴 수는 없습니다. 신은 견딜 수 있는 만큼만의 고통을 주신다고 했는데, 이건 아니에요. 신이 보기에는 내가 이 고통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요?
하루아침에 나는 사랑하는 가족을 다 잃었어요. 천애 고아가 된 거예요.
어떨 때, 아들을 보고 있노라면 꼭 동생이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다시 태어나서 누나 곁에 와,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것 같아요.
남편 역시 어렸을 때 가족을 잃은 것은 저와 마찬가지예요. 그 역시 천애 고아이니까요.
몇 번 만나고 나서 남편이 그러데요. "우리 외로운 사람끼리 서로 기대며 살아갑시다."
그 말에 감동해서, 그 말을 믿고 결혼했는데······
저는 그 말 지금도 믿어요, 서로 기대며 살자는 그 말··· 그래서 이렇게 참고 기다린 거죠.
사실이 그래요. 사람은 서로 기대며 더불어 사는 존재라는 말, 그 말은 진리이니까요.
또 내가 남편을 속속들이 잘 알기도 하구요.
남편이 천하에 몹쓸 인간으로 비쳐지고 있지만, 그 밑바탕은 착하고 여린 면이 있어요.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약하기 그지없거든요. 가방끈 짧은 졸부 근성에 열등감과 자만심의 불균형 등이 똘똘 뭉쳐 있다 보니, 남편은 자신을 컨트롤 못 하는 거예요. 참 불쌍한 남자이기도 해요.
어떨 땐 나도 헷갈려요. 갈팡질팡하면서도 남편을 은근과 끈기로 기다리고 있는 나 자신, 그래도 어딘가에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겠죠. 이것이 사랑일까요? 사랑?
어떤 면으로 생각하면 이렇게 둘이 만난 것도 운명 같아요. 남편의 은인인 양아버지나, 저의 은인인 강 사장님이나, 그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그런데도 남편은 나와 너무 달라요.
남편은 돈밖에 몰라요. 세상에 돈밖에 믿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요, 잘살면서 왜 그리 돈 욕심이 많은지 알 수가 없어요. 혼자서 세상을 헤쳐나가느라 너무 고생을 해서 그럴까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소녀 가장이었으니까요.
배까지 곯으며 고생을 했으면 없는 사람들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 것 아녜요? 보육원에 기부라도 좀 하면 오죽 좋겠어요? 기부는커녕 식당 팁 1, 2달러에도 벌벌 떨어요.
글쎄··· 언젠가 한 번은 밥을 먹고, 1달러짜리 몇 장을 식탁에 놓고, 막 나가려다가 두 장을 도루 주머니에 후딱 집어넣지 않겠어요?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며 가슴 한복판에 면도날이 스윽 지나가는 듯한 통증이 온몸에 퍼졌어요. 벤츠 600을 타고 다니는 남자가 그게 할 짓이에요? 아휴-- 창피해.
그렇게 자린고비 노릇을 하면서도 가족이 먹는 음식에는 돈을 정도 이상으로 많이 들여요. 전혀 아끼지 않아요. 냉장고도 항상 꽉꽉 채워놓아야 하고요. 아들 교육비도 전혀 아끼지 않지요. 또한 그 비싼 보석들을 나한테 사다 줘요. 폭력에 뒤따르는 선물이기는 하지만요. 미안해서이겠지요. 그땐 정말 진심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표현을 잘 못 해서 그렇지, 나를 좋아하는 감정도 늘 마음 깊숙이 있는 것, 잘 알고요.
그런데도 입만 열면 타박을 주고 내 속을 긁어요. 그러니 내가 입을 다무는 수밖에요.
남의 얘기를 할 때도 그래요. 좋게 말하는 법이 없어요. 그리고 또 의심이 많아서 사람을 믿지 못해요. 나는 그와 반대로 사람을 보면 상대방의 좋은 점만 보여요. 또, 큰일이 닥쳐도 그리 지지고 볶지 않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지요.
항상 좋은 쪽으로만 생각을 하다가 어떤 땐 둔기가 정수리를 내리치는 듯한 아찔함이 전신을 감싸요. 세상일이란 지독하게 최악인 나쁜 일도 내게 닥칠 수 있다는······.
가족을 졸지에 다 잃는 불상사가 생긴, 바로 그 사건이에요.
동생이 공부를 잘하다 보니 동네에 사는 같은 반 친구를 많이 도와줬어요. 그 애 엄마가 그 사실을 알고 동생을 자기 집에 자주 불렀어요. 가정교사 비슷한 역할을 한 것이지요.
그날도 숙제를 한다며 그 집에 갔는데, 비가 내리는 늦은 밤인데도 오지를 않아, 두 분이서 마중을 나가셨대요. 캄캄한 밤에, 비도 오고 해서 엄마 혼자 가시게 하는 것이 맘이 안 놓여 편찮으신 아버지가 따라나섰대요. 그런데 조금 못 가서 동생을 만나, 셋이서 우산 속에 뭉쳐서 길을 건너다가 그만 사고를 당한 거예요. 가로등도 없는 캄캄한 길이었는데 차가 미처 사람을 보지 못했고, 저의 가족도 차를 못 본 것이었어요.
세 사람을 한꺼번에 치고 차는 그대로 뺑소니를 쳐버렸어요.
그 밤에, 조금이라도 일찍 발견됐더라도 다 죽지는 않았을 거예요. 아니, 다 살았을 수도 있어요. 더구나 그날 밤에는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고 해요. 우산도 까만색이었고, 모든 상황이 다 안 좋았어요. 그렇게 밤을 지나고 새벽이 돼서야 지나가는 차량이 발견해, 겨우 병원에 실려 갔으니까요.
제가 소식을 듣고 미친 듯이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는 남동생과 아버지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고, 엄마는 아주 조금 의식이 있었어요, 엄마가 입을 달싹거리며 겨우 말씀을 하셨는데, 큰 트럭이었데요. 그리고 차가 헤드라이트를 안 켰데요.
“엄마가··· 엄마가, 미안해··· 어린 널··· 두고··· 어린 널 두고··· 아, 하느님··· 엄마가 미안 정말 미안···하···아··· 다······ 어린 너를 고생만 시키고 가는구나····· 사랑··· 해··· 에······”
엄마는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시고는 끝내 숨을 거두셨어요. 내 손을 꼭 잡고 숨을 거두셨어요. 밤새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셔서 회생불능이었죠.
나는 엄마를 붙들고 발버둥 치며 통곡을 했어요.
“엄마, 엄마, 죽으면 안 돼. 이대로 죽으면 안 돼요. 평생을 고생만 하셨는데··· 이렇게 가시면 나는 어떡하라고··· 내가 엄마 편히 모시려고 했는데···.”
그리고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지요.
오랫동안 퇴원을 못 하고 정신과 치료도 받았어요.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겪을 수 없는 큰 시련을 저는 죽음을 넘어서서 극복했어요.
공장 강 사장님의 배려가 가장 큰 힘이 되었어요.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상실한 저에게 재생의 길을 터주신 거예요. 이번 일로 인해 제 사정을 아신 사장님께서 저를 친딸처럼 돌봐주셨고, 병원비용을 다 내주시고, 몸이 너무 쇠약해진 것을 아시고는 공장 노동일에서 사무실 일로 옮겨주시기도 했어요.
사무실로 옮겨와서는 컴퓨터부터 배웠는데, 그 일이 제 적성에 맞는 것 같았고, 또 참 재미있었어요. 계속 성실하게 일해서 은혜를 갚아야 하는데, 사업차 우리 회사에 온 남편이 저를 보고 홀딱 반하는 바람에 결혼을 하고 말았어요. 물론 강 사장님께서 적극적으로 결혼을 추진해 주셨죠.
제 가족을 순식간에 앗아가 버린 그 뺑소니차는 영원한 미궁 속으로 숨어 버렸어요. 이미 2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네요. 뺑소니차의 운전사는 그동안에 어찌 살았을까요? 보나 마나 지옥 속에서 헤매고 다녔을 게 뻔해요. 지금이라도 나타나면 지옥을 벗어날 수는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나타난다 하더라도 제 가족이 살아 돌아올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억울한 사연이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 방영이 됐었어요. 강 사장님이 설립하신 주성장학회가 ‘사랑은 희망을 싣고.’ 라는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사장님이 출연을 하셨는데, 거기에서 제 이야기가 언급이 됐어요. 장학회가 설립된 동기가 바로 저였고, 또 저의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한 이야기도 자세하게 설명을 하시더군요.
주성장학회라는 명칭은 강 사장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고 해요. 강 사징님 아버지께서는 자수성가하신 분으로 일찍 아내를 잃고도 재혼을 안 하시고 아들 셋을 훌륭하게 키우셨대요. 형님의 아들 둘까지도 공부를 시켰다고 해요. 사람은 배워야 산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늘 마음에 새기고 있다가, 마침 가난하여 중학교도 못 나온 저를 곁에서 보고, 처음엔 두 명의 공장 직원에게 학비를 지원한 것이 주성장학학회로 발전을 한 것이라네요.
저는 그때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문득 그 뺑소니차의 운전사가 생각났어요. 살아 있다면, 어느 하늘 아래에선가 그도 지금 ‘사랑은 희망을 싣고.’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눈 깜짝할 사이에 생사가 판결 나는 세상사예요. 인간의 생명이 언제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러니까 주어진 날까지는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겠지요. 꼭 좋은 사람으로 살아야 해요. 하루 빨리 남편에게는 변화가 있어야 해요.
환경이 너무 열악하여 성격이 그리 형성이 된 것, 잘 알아요. 그리고 와이프한테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는 것도 왜 그런지 잘 알아요.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남편에게는 의처증이 있어요. 워낙에 남을 믿지 못하는 성격에서부터 파생이 되었겠지만, 나한테 손찌검하는 것은 완전히 의처증 때문이에요.
남한테 말은 못 하고, 의처증에 대한 글을 여기저기서 찾아 읽어봤는데, 중증 남자는 정말 무섭더라고요. 한데 남편은 중증 같지는 않아요. 내가 가족을 잃은 사고로, 전문의한테 계속 치료를 받은 것처럼, 남편도 전문가한테 상담을 받으면, 서서히 좋아질 것 같은 생각도 들어요. 그러나 남편한테는 그런 소리가 씨도 안 먹힐 게 뻔해요. 자기를 미친놈 취급한다고 진짜 미쳐버릴지도 몰라요.
언뜻 제이슨 엄마가 떠오르네요. 그녀에게 먼저 상의를 해볼까 하고요······
크리스 반에 한국 애가 딱 한 명이 더 있는데, 그 애가 제이슨이에요. 제이슨 엄마는 미국에서 학교를 나온 여자예요. 공부 많이 한 여자는 어딘가 내 친구들하고는 다른 것 같았어요. 뭐라고 딱 꼬집어서 표현하기가 어려운데요··· 그런 분을 고상하고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나요?
제이슨 위로 형이 둘이나 있는 것을 보면, 나보다도 10년 정도는 위일 것 같은데, 꼭 존댓말을 써요. “말씀 낮추세요.” 하고 말한 적도 있지만 그녀는 말을 낮추지 않아요.
언젠가 얘기 중에 나는 집이 가난해서 중학교도 못 나왔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물론 놀랐을 거예요. 남편이 투자 전문회사 사장인 사실도 알고, 크리스가 특별히 뛰어난 것도 아니까요. 그런데 지극히 편안한 표정으로, “아--, 네--.” 하고 말끝을 약간 올리더니, 얼른 말머리를 돌려, “아들은 엄마 머리 닮는다는데, 크리스 어머니 머리가 굉장히 좋으신가 봐요.” 그러지 않겠어요?
그 후부터는 더 가까이 지내게 되어, 제가 사고로 가족을 잃은 얘기며, 크리스 아빠가 미군 장교에게 입양이 되어 크리스의 라스트 네임이 스미스가 된 얘기까지도 하는 사이로 발전을 했답니다. 속에 있는 이런저런 얘기를 다 털어놓고 보니, 천애 고아인 나에게 언니가 생긴 것 같아, 정말 좋아요. 정말 언니 같아요.
그래서··· 먼저 제이슨 엄마와 상의를 해도 될 것 같은 판단이 든 거예요. 이 순간은 용기 있는 여자가 되어 있지만, 남편의 폭력을 주위에서 아는 것을 나 자신도 용납 못 하는데, 과연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요? 남편의 손찌검을 끝장내야겠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나······.
내가 나를 생각해도 너무나 답답해요. 나라는 인간은 혼자서는 아무 결정도 못 하고, 또 혼자 살아갈 수도 없는 여자 같아요. 10년이나 바보가 되어 산 것도 그렇고요. 모든 것이 내 능력 바깥이라는 사실이 참 슬픕니다. 내가 중학교도 못 나와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후딱 들기도 합니다.
사실, 공장에 다닐 때, 검정고시를 봐서, 야간 고등학교에 다녔으면 좋았을 터인데, 나는 미처 그런 생각을 못 하고 그저 미련하게 일만 했어요. 책에서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고학한 얘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 나는 그 개척정신이 너무나 놀라웠어요. 그러니까 나한테는 나 자신을 위한 꿈이 없었던 겁니다. 꿈이 뭔지도 모르고 산 시절이었지요.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아버지 어머니 편하게 살게 해드리고, 동생 대학 공부 시키는 것이 내 꿈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럴 때, 동생이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누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내 처지를 다 알고, 잘 해결해 줄 것 같아요. 하늘나라에서라도 누나에게 지혜를 주었으면 좋겠어요.
갑자기 머릿속에서 번개가 번쩍합니다.
아! 내가 제이슨 엄마를 떠올린 것이 혹시 동생이 준 지혜가 아닐까? 그렇지? 동생 대신에 언니가 생긴 거지? 맞아. 맞아. 그래. 그래!!! 제이슨 엄마한테 터놓고 고백을 하자. 남편의 폭력을······. 그리고 조언을 구하자. 갈팡질팡하지 말고 마음을 굳게 먹고 밀고 나가자.
아! 이제야 숨통이 트이며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아요.
요즘 남편 사업이 부진해 보이는데, 어떻게 하면 그에게 격려가 될지 그 문제도 의논해 보자. 물론 나한테는 일체 말 안 하지만 다른 데에서 다 표시가 나요. 남편은 지극히 단순해서 척··· 하고 절대로 포장을 못 하는 성격이거든요.
사업이 부진하면 어떻습니까? 이 큰 집 팔아서 작은 집으로 옮겨 오손도손 살면 되잖아요, 고급 차도 다 팔아버리고······ 이 기회에 남편이 돈보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도 있지 않겠어요?
아주 망해서 빚더미에 올라앉는다고 하더라도 위기가 기회가 될지 누가 압니까? 올데갈데없이 되면 나한테 보석이 있잖아요? 어디 렌트로 가서 둘 다 잡을 구하면 뭣인들 못 하겠어요? 거기에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아요?
남편이 사다 준 보석들, 내가 계획하는 바가 있으나 우선 급한 불부터 꺼야 되겠지요? 실은, 그 보석들을 주성장학회에 기부하려고 계획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남편이 정년퇴직한 후에는 미국생활을 정리한 다음, 주성장학회에 재산을 기부하고, 한국에 영주하는 것이 제 바람이에요.
크리스도 그때는 이미 대학을 졸업할 즈음이니, 졸업한 다음에는, 한국에 나가서 조국을 위해 기여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주성장학회 꿈나무들과 친구가 됐으면 좋겠어요.
본향으로 돌아간다고나 할까요? 내가 태어났고, 부모님과 동생이 잠들어 있는 곳······ 아, 본향이라는 말은 제이슨 엄마가 가르쳐 주셨어요. 고향보다 더 깊은 뜻을 가진 말이라고 하데요. 어려운 건 잘 모르지만, 나는 평화와 행복이 있으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생각해요. 어릴 적, 집이 너무 가난했지만 그땐 그때대로 나는 천국에서 살았어요.
이제는 남편과 아들, 이렇게 세 식구가 기쁨을 듬뿍 안고 평화와 행복이 깃드는 본향으로 돌아가려는 거지요. 본향에 가서, 내 능력껏 남을 돕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렇게 마음을 굳게 먹은 바로 그다음 날이었어요. 예기치 못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은 아니에요. 나 혼자 꿈을 꾸어본 적은 있으니까요.
아버지, 어머니, 동생······. 생각만 해도 눈물이 앞을 가리는 제 가족의 생명을 앗아간 뺑소니차가 나타난 거예요. 아침에 강 사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었고, 그 오후에 뺑소니차 운전사의 아들한테서 편지가 온 것입니다.
<<······.
아버지는 오직 저 하나를 위해 사신 분입니다. 죽을죄를 짓고도 인간다운 처사를 못 한 것도 다 저 때문입니다. 그때 제가 열 살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자수하면 감옥에 가야 하니, 저는 보육원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겠지요. 어머니는 제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너무나 가난해서 약도 제대로 못 썼다고 해요.
자수를 할 경우는 아들이 고아원으로 직행해야 한다는 슬픔보다는, 제가 그 짐을 평생 지고 가야 하는 걱정이 앞섰다고 합니다. 어쨌든 사람을 셋이나 죽게 했잖습니까? 살인자의 아들로 낙인이 찍혀 세상 살아가면서 받을 불이익, 그리고 제가 겪어야 하는 고민··· 환경도 열악한데 아들이 사람 대접받고 살기가 어렵겠다는 판단이 서서, 자수를 못 했다고 합니다. 사고 당시, 아버지는 세 사람인지도 몰랐는데, 신문 기사를 보고야 아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딸이 하나 있다는 것도요.
별의별 상상을 다 하셨다고 해요. 열 살짜리 아들이 거지가 되어 배가 고파 쓰레기통을 뒤지며 이리저리 떠도는 모습까지 떠올라······. 도저히 자수를 못 하신 거였어요.
“애비라는 인간이 아들 인생을 망치게 할 수는 없었다. 참으로 괴로웠다. 난 계속 지옥을 헤매고 다녔다.”
제가 생각이 나요. 가끔 아버지께서는 술을 드시며 펑펑 우시곤 하셨어요. 그땐 몰랐는데, 그게 다 사고를 낸 괴로움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간에 저 하나만을 정성을 다해 키우면서, 제가 어른이 된 다음에는 수소문해서 사모님을 꼭 찾아 사죄하리라 굳게 다짐을 하셨대요.
그런데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 ‘사랑은 희망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을 보다가 깜짝 놀라셨다고 합니다. 거기서 사모님의 현황을 알게 되셨다고 해요. 천애 고아가 되어 늘 고생하는 생각만 들어 괴로웠는데, 훌륭한 기업가와 결혼을 하여, 미국에서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기쁜 일이 있다면서 펑펑 우신 바로 그날이었나 봐요.
강 사장님이 부모처럼 도와준 사연도 알게 되어, 그때부터 그 장학회에 작은 액수이나마 매달 기부를 하셨답니다. 물론 익명으로요.
제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 달 전이었습니다. 이제는 얘기를 할 때가 되었다면서 아버지께서 평생을 괴로워하신 사연을 제게 들려주신 것입니다. 이상합니다. 신의 계시가 있었던 걸까요? 아버지께서는 그날 밤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요. 감옥에 갈 것을 각오하시고 하루빨리 사모님을 뵙고 꼭 사죄를 하고 싶으시다는 말씀까지 하셨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은 하루도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지옥에서 벗어나 천국의 문 앞에 서셨지만 아버지는 그만 운명하시고 말았습니다. 아닙니다. 아마도 지상의 천국 너머에 있는 천상의 천국으로 가셨을 것입니다.
제가 서른이 됐습니다. 다행히 아버지의 희생에 어긋나지 않고. 국비 장학생으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지금 서울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앞으로 제가 주성장학회의 후원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공장직원들의 주치의가 되어, 그들에게 자신감과 희망을 심어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 >>
그리고 마지막에는 곧 찾아뵙겠다는 말이 적혀 있었어요.
눈물이 났어요, 남편도 울고 있었어요.
그가 쑥스러운 듯 눈물을 닦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어요.
"나도··· 좀 낼까? 그 장학금 말이야···."
“뭐라고요?”
깜짝 놀라 제 귀를 의심했어요. 잘 못 들은 줄 알았거든요. 갑자기 눈앞이 밝아지면서 희망의 무지개가 떴어요. 먹구름이 걷히니까 무지개 고운 색깔이 영롱하게 보이네요,
먹구름이 걷히니까······.
글벗동인 제 1 소설집 <다섯 나무 숲> 2020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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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 단편소설 / 스러져가는 별들 | 김영강 | 2019.11.05 | 62 |
81 | 연재소설 <침묵의 메아리>를 끝내고 | 김영강 | 2017.03.27 | 97 |
80 | 중단편 소설 / 이제, 숙제는 끝났다 | 김영강 | 2017.02.13 | 67 |
79 | 단편연재 / 백한 번째 편지 (연재 캐나다 6 - 10 ) | 김영강 | 2016.08.11 | 334 |
78 | 단편연재 / 백한 번째 편지 (연재 캐나다 1 - 5 ) | 김영강 | 2016.08.11 | 417 |
77 | 수필 모음 (2) | 김영강 | 2016.01.26 | 1030 |
76 | 수필 모음 (1) [1] | 김영강 | 2016.01.26 | 1155 |
75 | 단편소설 / 나는 살고 싶다 | 김영강 | 2014.12.02 | 643 |
74 | 중편소설 / 가시꽃 향기 (하) | 김영강 | 2014.01.31 | 549 |
73 | 중편소설 / 가시꽃 향기 (상) | 김영강 | 2014.01.31 | 731 |
72 | 아버지의 결혼 7 (마지막 회) [1] | 김영강 | 2012.07.14 | 1055 |
71 | 아버지의 결혼 수정 연재 6 [1] | 김영강 | 2012.07.12 | 96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