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부작 - 꿈꾸는 우리 가족 / 2부 왕을 꿈꾸는 아빠
2021.05.05 16:10
<3부작 - 꿈꾸는 우리 가족>
제 2부
왕을 꿈꾸는 아빠
돈! 돈! 세상에서 돈이 최고지요! 누가 뭐래도 돈이 왕이라구요!
난 돈을 억수로 잘 법니다. 왕이 될 만큼 잘 벌어요! 일찌감치 부동산과 주식에 눈을 떠, 엘에이 바닥에서 알아주는 사장이 됐으니 말이요! 주식이나 부동산에 나보다 잘 아는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러슈.
되돌아보면, 참말로 악착스레 달려온 인생길이요, 내 인생이··· 너무나 배를 곯다 보니, 나중에는 뵈는 게 없더라고요, 무서운 것도 없고요. 그거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몰라!
그렇게 구르다 보니 돈이 세상에서 제일 최고라는 걸 애저녁에 깨달았지요. 돈만 있으면 어딜 가도 최고가 될 수 있으니까요. 왕 노릇도 할 수 있다구요,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내 집구석이요? 마누라와 아들 하나 두고 있는데, 내 나이 어느새 오십 줄에 들어 셌네요. 세월 빠르네요, 참 빨라! 최신형 페라리 스포츠카보다도 더 빠른 것 같네요, 젠장!
난 지금 대학물 먹은 것들을 거느리고, 그것들 위에 군림하고 있지요, 전에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었던 것들을··· 그런데도 늘 답답합니다, 답답해···. 뭐랄까, 가슴 한복판에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턱 얹혀 있는 기분이랄까.
사무실 분위기 역시 무거워요. 이건 원 내가 부하 놈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건지, 직원들이 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건지······. 젠장, 그 망할 놈의 스트레스란 놈이 사무실을 꽉 채우고 있나 봐요. 아무튼, 직원들이 한 놈도 맘에 드는 놈이 없어요.
그리고 나는 참 이상하게도 평소엔 마누라와 그렁저렁 별 탈 없이 지내다가도 어느 순간 마누라 얼굴만 보면 부아가 치밀어요. 참을 수가 없어요. 그러다가 결국은 주먹을 휘두르고 맙니다. 나도 모르게 주먹이 먼저 나가는 거예요.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런 내가 정말 지긋지긋합니다. 정말이에요.
주먹 휘두르고 나면, 엄청 후회가 되지요. 그런 날은 밤잠도 한숨 못 자요. 정신이 들면 깜짝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 겁니다. 바로 무릎을 꿇고 사과하지요.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싹싹 빕니다. 그리고 다음 날은 보석을 사 주기도 하지요. 미안해서요. 이건 정말 진짜 진심이에요.
서울 출장 중에 투자자인 강 사장 회사를 방문했다가 그녀를 처음 보게 되었어요. 여자 하나가 사장실에 들어서는데, 그 순간, 그만 숨이 멎을 뻔했지 뭡니까? 어찌나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서른 중반도 넘은 나이에 그런 감정이 살아 있다는 것이 내가 생각해도 정말 신기했어요. 아니, 머리털 나고 그런 야릇한 감정은 처음이었어요. 하늘색 하늘하늘한 긴 소매 원피스를 입었는데, 금세 훨훨 날아서 하늘로 올라가 버릴 것만 같더라구요. 내가 가방끈이 짧아서 표현을 잘 못하겠는데··· 뭐랄까··· 그래, 맞아, 선녀! 바로 선녀였어요.
그 당시 그녀는 겨우 스물한 살 풋내기였어요. 그때 난, 그녀가 그렇게 어린 줄 몰랐어요.
강 사장 말이, 자기 회사 공장에서 오래 일을 했는데, 한 2년 전에, 큰 사고를 당해 가족을 모두 잃었다고 해요. 그 후 한참을 쉬었다가 사무실 일을 보게 되었다고 합디다. 책임감이 강하고 일을 똑 부러지게 잘해 어디에다 내놔도 손색이 없는 여자라고 칭찬을 하더구만요. 가만 보니, 머리가 되게 좋대나요? 정상적으로 공부를 했다면 서울대학 정도는 너끈히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지요
강 사장은 내가 형님처럼 믿는 분이지요. 세상에 믿을 만한 놈이 한 놈도 없지만, 강 사장만은 믿어요.
이건 나중 얘기지만, 강 사장이 공장에 장학회를 세워서 어려운 직원들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끔 뒤를 밀어주었는데, 그게 다 그녀가 본보기가 되어 이뤄진 일이라는 구만요.
그 장학회가 얼마 전에 ‘사랑은 희망을 싣고’라는 프로에 선정이 되어 강 사장이 텔레비전에 나왔어요. ‘주성장헉회’라는 이름하에 장학생들이 설립 때보다는 무지 많아졌더라구요. 그리고 장학회가 설립된 동기가 내 마누라 때문이라고 우리 집에까지 연락이 왔지 뭡니까? 이곳 엘에이 지사 직원이 동영상을 찍어야 한다고요. 내가 절대 반대를 했지요. 텔레비전에 나가다니요? 영화감독이 잡아가면 우짤라꼬요?
텔레비전에 마누라 이야기가 나오긴 나옵디다. 사고로 가족을 잃고 천애 고아가 된 마누라를 강 사장이 많이 도와주었다구요. 그리고 사고 경위에 대해서도 강 사장이 자세히 설명을 하더군요.
사실은 나도 고압니다. 그녀가 졸지에 부모를 잃고 천하 외톨이가 된 것이 내 처지와 비슷해서 나도 모르게 애잔한 마음이 들었죠.
우리 아버지는 월남 파병 용사였어요. 부상을 당해 다리를 몹시 절며 집으로 돌아오셨어요. 내가 여섯 살 때였어요. 어릴 적이지만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네요. 전사하시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었으나 날이 갈수록 우리 집은 불행이 겹쳤어요.
아버지는 항상 술에 절어 있었고, 성격은 날로 포악해져서 어머니를 마구 때리고 어린 저를 개 패듯 팼어요.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엽제 질병에까지 걸렸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병에 걸린 파병 용사들이 무지무지 많았다는군요. 생활고에 시달리며 밤새워 간호하는 가족들에게 더 이상 고통을 줘서는 안 되겠다며, 자살을 한 전우도 많았대요.
너무 궁금해서 백과사전을 찾아보니까, 고엽제란 초목 및 잎사귀 등을 말라 죽게 하는 농약으로 인체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물질이라고 쓰여 있더군요. 이 고엽제는 대외적으로는 베트남 정글에 서식하는 모기를 박멸한다는 공중보건상의 목적을 내세웠으나, 사실은 밀림의 초목들을 말라 죽게 하여, 깊은 산림이나 산중에 은신 및 매복해 있는 베트콩들을 노출시키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대요.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알기로, 고엽제 질병은 오장육부가 썩어들어가는 병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삶의 가치와 행복을 완전히 파괴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병이에요.
우리 집도 결국은 그렇게 망가져 박살 나고 말았죠.
어머니는 아버지의 학대에 못 이겨 집을 나가버렸어요. 어린 저를 혼자 남겨두고요······.
아버지는 병원을 들락거리면서도 술은 자꾸 더 늘어갔어요. 자연히 술버릇도 심해져 내가 얻어맞는 횟수도 잦아졌지요. 엄마 몫까지 얻어맞는 나날이 계속된 거예요.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구요. 엄마처럼 도망이라도 쳐야지······. 정말, 맞아 죽겠더라구요. 그런데 아버지가 나보다 먼저 죽었어요. 한밤중에 술에 취해 집에 오다가 쓰러져서 길모퉁이에서 잠이 들었대요. 그것도 한겨울에······. 당연히 얼어 죽었지요.
내 나이 열 살 적이었어요. 세상에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이게?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전쟁이 없었다면, 아버지가 전쟁에 나가서 다치고, 몹쓸 병에 걸려 오지 않았다면, 내 팔자가 달라졌을지도 몰라요. 망할 놈의 전쟁만 없었다면··· 물론 고아도 안 됐을 거고요.
생각해 보세요. 열 살짜리 아이가 부모 없이 어찌 살았겠습니까? 보육원 직행이었지요. 한데 보육원에서도 맨날 얻어터지기 일쑤였고, 밥 굶기를 밥 먹듯 했지요. 나는 늘 말썽꾸러기였으니까요. 규칙 중의 하나가 사고를 치면 밥을 굶기는 것이었어요. 참 잔인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부엌에 숨어 들어가 몰래 밥을 훔쳐 먹다가 들켜서 또 얻어터지고···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납니다.
견디다 못해 나중에는 보육원에서 도망을 쳤지요.
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여기저기 쓰레기통을 뒤지던 그 시절······ 아! 생각하기도 싫어요.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알 수가 없지요, 젠장!
사실 그때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었어요. 아주 많이. 엄마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요. 그러나 어린 아들을 버리고,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친 엄마가 무슨 엄마입니까? 내게는 그런 엄마 있어봤자 개뿔도 좋을 게 없다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어요.
그러다가 또······ 아버지 죽고, 내가 보육원에 간 것을 알 수도 있을 터인데 찾아보지 않은 걸 보니, 혹시 죽었는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결혼 하고 나서 아주 나중에 깨달은 일입니다만······ 우리 마누라 생긴 것이 우리 엄마와 비슷한 데가 많아요. 얼핏 그런 느낌이 들어서 소스라치게 놀라곤 합니다. 무섭지요. 그럴 때면 마누라가 불쑥 미워지는 겁니다.
참 묘하고 복잡합니다. 엄마가 그렇게 미우면서도 사무치게 그리웠던 모양이지요.
점점 크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 싶더라구요. 그러다 보니 운 좋게 구두닦이로 자리 잡게 되었고 이래저래 끈이 닿아 하우스보이로 미군 부대에서 일을 하게 되었죠. 내게 주어진 하나의 기회요, 기적이었어요. 미군 장교에게 입양이 되어 미국에 오게 된 것은 더 큰 기적이었지요.
그분은 스미스라는 분으로 내가 손도 닿을 수 없는 아주 높은 사람이었어요. 나이가 쉰이 넘었는데도 결혼을 안 한 독신이었어요. 어느 날 저녁, 우연히 부대 근처 개울가에 나갔다가 그분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 내가 그분 생명의 은인이 된 겁니다.
그분을 만난 다음 나는 완전히 딴 세상을 경험했어요. 아버지를 닮지 말고 이분을 ‘닮아야지, 닮아야지!’ 하고 굳게굳게 결심도 했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죽어도 아버지처럼은 되지 말아야지··· 그렇게는 되지 않으리라··· 골백번 결심했는데··· 그게 잘 안 되네요, 그 간단한 게 안 되는 거예요. 돌아보면 아버지와 똑같이 폭력을 휘두르는 내가 있는 겁니다. 절망이죠, 절망!
욕하면서 닮는다는 옛말이 꼭 맞아요. 아니면 유전자의 저주일까요.
그렇게 닮기를 원했던 양아버지를 닮았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젠장 그게 안 되니··· 미치는 거죠. 착하고 좋은 사람 그거 아무나 되는 게 아닌 모양입니다.
만일 그때, 상이군인한테 나오는 돈이 충분해 생활만 안정됐더라면 엄마가 도망 안 가고, 아버지도 얼어 죽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내가 좋은 부모 밑에서 잘 자랐을 터이니 착한 애가 되었을까요?
근데, 아니에요.
아, 나라에서 무슨 상이군인한테 준다는 돈이 쥐꼬리만큼 나오고, 고엽제 보상금도 있었던 모양인데··· 그까짓 거 아버지 술값도 못 됐지요, 젠장! 그리구 거 뭐라더라··· 아, 남은 유가족한테 주는 돈이 있다는 말도 얼핏 들은 거 같은데···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어린 거지 놈한테까지 찾아서 줄 리가 있나요. 그러다가 미국으로 와버렸으니··· 제기랄!
그러니··· 내가 뭐어--어, 착한 사람이 됐겠어요!
마누라가 미국에 오자마자, 우선 학교에 집어넣었어요. 영어를 해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살아갈 거 아닙니까.
그런데 마음을 못 놓겠더라고요. 나이도 어리고 얼굴도 예쁘니 어떤 놈이 수작을 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내가 일일이 따라다니며 감시를 할 수도 없고요. 회사 사무실에 데려다 놓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으나, 남자 직원이 득실득실하고, 또 사장 와이프가 일을 한다는 게 말이 안 돼, 포기를 했지요 너무 예쁘게 잘생긴 것도 탈이니, 원 세상 참 복잡하네요!
그런데 애가 생기고부터는 좀 안심이 됐어요.
나도 미국에 처음 와서는 학교부터 다녔어요. 영어는 웬만큼 통하는 상태였지만 워낙에 기초가 없어 공부를 영 못 따라가겠습디다. 이를 재빨리 알아차린 양아버지께서는 나를 친구 회사에서 허드렛일부터 배우게 했어요. 부동산과 주식 투자를 관여하는 회사였어요. 열심히 노력하며 일을 배웠죠. 양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 죽을 둥 살 둥 참으로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뜻하지 않게 양아버지께서 비행기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시는 불상사가 터졌지 뭡니까! 나를 사람 만들어주시고, 기반을 잡아주신 다음에, 유산까지 물러주신 겁니다.
양아버지 관 앞에서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머리털 나고 그렇게 진짜로 울어본 건 정말 처음이었네요. 정말 진짜로 슬펐어요. 눈물이 사정없이 마구 흐르는데, 참을 수가··· 친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눈물이 안 났는데 말입니다.
양아버지께서는 이미 유언장을 다 만들어 놓으셨고, 보육원 등 자선기관에도 기부를 많이 하셨고, 생명보험, 사고보상 등, 군인에게 주는 베네핏 일부가 나한테 떨어졌어요.
정신 바짝 차리고, 우선 그 돈으로 부동산에 투자를 했어요. 집과 땅을 샀지요. 집을 샀다가 팔았다가 몇 번을 거듭했더니 지금 사는 어마어마한 저택을 살 수 있었구요.
돈 냄새가 나는지 여자들이 많이 따르기도 합디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벗겨 먹으려는 못된 년들밖에 없더라구요. 여자라는 것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어요. 엄마 기억 때문인지···
그러다가 세상 착해 보이는 아내를 만나게 된 거죠.
근데, 가정이라는 게, 좀 편히 쉴 수 있는 안락한 곳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집구석이라고 들어오면··· 아들놈은 나를 보면 슬금슬금 피하기부터 합니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아무 말 없이 자기 방으로 쑥 들어가서 문을 쾅 닫아버리지요.
마누라쟁이는 벙어리처럼 말을 거의 안 해요, 벙어리처럼!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해야지 고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닙니까! 아주 미칩니다, 미쳐요! 남편이 소리를 지르고 야단을 치면, 싸우자고 맞상대는 못 할망정 대꾸는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보통 여자들은 엉엉 울기라도 할 터인데 말입니다.
이것들이 나를 무시하는 건가? 하고 더 화가 납니다. 난 무시당하는 건 못 참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무시당하는 건 못 참는다구요!
집에 들어갔다가 다시 튀어나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와 봤자 갈 데가 있나요? 술집밖에······ 그리고 집에 가서는 또 한바탕 소동을 칩니다.
그다음에는 또 빌고요. 열심히 빌지요. 이거 참 창피하고 쪽 팔리는 말이지만, 제발 나를 버리고 떠나지 말아 달라고 빌어요. 어릴 적 날 버리고 집 나가버린 엄마 생각이 나서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홀로 버려지는 건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난 그게 제일 무서워요. 홀로 버려지고 싶지 않아요. 이런 마음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알 수가 없지요, 없구 말구요!
어느 날은 ‘잘해 줘야지, 잘해 줘야지’ 하는 마음이 불쑥 내켜, 데리고 나가 돈을 처발라 줍니다. 그래도 마누라는 그다지 좋아하는 기색이 없어요. 도무지 욕심이 없어요. 돈이 맥을 못 쓰는 건 처음 보네요, 젠장.
공순이로 가난한 집안의 소녀 가장이 되어 힘들게 살았고, 나중에는 부모형제를 다 잃는 불상사를 당했으면 좀 악착같은 면이 있어야 하잖아요? 나는 고아가 되었기에 완전 악바리가 된 것 같은데, 마누라는 아주 정반대입니다. 뭐든지 퍼 주려고 하고요. 사람들을 다 좋게만 봐요.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빌어먹을··· 지가 뭐 성인군자라도 되나?
강 사장이 머리가 좋다고 칭찬을 했는데, 근데 모르겠어요. 바보인지 천재인지······.
2년이나 학교에 다녔는데, 젠장 뭘 배웠는지 모르겠어요. 영어가 힘들어서 못 따라가, 가다말다 했대요. 그러다가 임신이 되어 주저 앉았다나요? 가만 보니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여자 같아요. 욕심도 없고, 의욕도 희망도 없고 목적도 없어요.
그러나 하나 있는 아들은 천재입니다. 자랑스럽지요. 수재만 모이는 영재학교 학교에 다니는데, 거기서도 올 A만 받아요. 가문의 자랑이지요. 그리고 어찌나 철이 빨리 들었는지 겨우 열두 살밖에 안 된 놈이 아이답지가 않고 어른 행세를 해요. 애늙은이지요, 애늙은이! 밖에 나가 놀지도 않고 방구석에 처박혀 컴퓨터만 들여다봅니다. 아빠한테 아주 먼 거리를 두고 있는 거지요.
마누라도 그렇고 아들놈도 그렇고, 내가 돈 잘 버는 것을 고마워할 줄 몰라요. 제 복을 모르는 거죠. 대궐처럼 큰 집에 좋은 차에, 돈이 모자라나··· 도대체 없는 게 없다니까요. 그러니 불만이 있을 게 뭡니까? 배가 불러서 지랄들이지··· 저것들이 고생을 안 해봐서 그래요. 어휴, 나 어렸을 적 생각을 하면··· 아유, 이것들을 그냥!
분명히 말하지만, 난 돈 벌어오는 기계가 아닙니다.
솔직하게 탁 깨놓고 말해서, 난 왕 대접을 받고 싶은 겁니다. 적어도 집안에서만은··· 왕 노릇 하고 싶다 이 말씀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내가 뭐가 모자랍니까? 돈 잘 벌어와, 이만하면 미남 축에 들어, 영어도 잘하고 건강해··· 바람을 피우나 노름을 하나··· 뭐가 모자라냐구요!
내 덕을 가장 많이 보고 사는 마누라와 아들놈은 나를 왕처럼 떠받들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한데 그렇지가 않으니 열불 나지요. 심지어 아들놈은 나랑은 전혀 다른 딴 나라에서 온 고귀한 인간처럼 굴어요. 지 애비인 나를 닮은 데가 하나도 없어요.
솔직하게 탁 깨놓고 말해서, 나는 말입니다, 제발, 내 아들놈은 나를 닮지 말아야 할 터인데 하는 생각을 간절히 하는 그런 아빠입니다. 이건 진짜 정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구요. 그런데 닮은 데가 너무 없다 보니··
아주 엉뚱한 상상이 들기도 해요. ‘저 녀석이 진짜 내 아들일까?’ 하고요. 그리고는 ‘내가 미쳤지. 미쳤지.’ 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순진무구하고, 맹하고, 착하고, 정직하고. 고지식하기 그지없는 와이프가 절대 그럴 리는 없어요. 그럴 위인이 못 됩니다. 그러면서도 자꾸 오락가락해요.
거기다가 미군 장교 라스트 네임을 물려받았으니, 이름이 크리스 스미스이잖습니까? 나도 스미스인데 아들놈 이름을 떠올리면 너무나 생소합니다. 내 피가 여--어--엉-- 하나도 안 섞인 느낌이 들어 소스라치게 깜짝 놀라다가 정신이 든다니까요.
하루는 갑자기 이런 소리가 귀를 탁 때리더라고요.
‘야! 너! 왜 그 모양이냐? 와이프는 착하디착하고, 아들은 너를 안 닮고 네가 그렇게도 닮고 싶어 하던 양아버지를 닮았으면 감사한 줄 알아야지······’
그러고 보니 내 아들놈이 양아버지를 닮은 데가 많아 깜짝 놀랐답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아들놈과 마누라를 사랑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한다구요. 쪽 팔려서 말로 하지 않아서 그렇지, 진짜 정말로 사랑한다구요.
사랑도 받아본 놈이 잘한다던데··· 그래요, 난 어렸을 적에 제대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고 사랑하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사랑할 줄을 모릅니다.
젠장, 요즘은 부동산 경기도 안 좋고 주식도 흔들흔들합니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기에 숨이 턱까지 찼어요. 이렇게 더 뛰다가는 얼마 못 가 쓰러질 것 같네요.
쓰러지면 누가 나를 일으켜서 보듬어 줄까요? 자신이 없어요.
제가랄··· 마누라도 아들놈도 외면하겠지요?
참 이상합니다. 생각만 해도 이가 부득부득 갈리던 엄마가 요즘 자꾸 머리에 떠올라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직도 예쁘시려나? 많이 늙었겠지? 그리고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그 처지가 이해가 돼요. 물론 재혼을 했겠지요? 살아 있다면 지금 76이나 77쯤 됐을 겁니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도 가져 봅니다.
한 번 찾아볼까요? 아마 마누라는 대환영할 겁니다. 천사처럼 착하니까요.
그러니까 쓰러지지 말고, 피눈물 나더라도 이겨내야 합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 지독한 고통을 견뎌냈는데, 설마 내 몸 하나 못 가누겠습니까? 기적에 기적이 거듭되어 이렇게 살아남았는데······.
또 다른 기적이 또 찾아올지 누가 압니까?
기적이 찾아올 거라고 난 믿습니다, 믿어요.
글벗동인 제 1 소설집 <다섯 나무 숲> 2020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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