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 무지개 사라진 자리 책 속으로
2021.06.27 21:52
무지개 사라진 자리
책 속으로
눈물 속에서 모든 일정을 끝낸 후, 저는 언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근데 이게 웬 말입니까? 책상 서랍에서 발견된 한 권의 노트…….’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언니의 넋두리가 온통 뾰쪽뾰쪽한 바늘이 되어 내 가슴을 사정없이 찔러댔습니다. 가슴팍에 맺힌 핏방울들이 배어들어 온몸은 금세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손이 떨려서 노트 장을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환각 세계를 왔다 갔다 하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에서 쓴 글들이었습니다.
죽고 싶다는 말이 페이지마다 나열되었고, 이제는 구제불능이야 하고 자학하는 구절들이 군데군데 진을 치고 있었어요. 학교 공부를 따라가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언니는 결국 마약에까지 손을 댔고,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떤 땐 또 지극히 정상이었고요.
아, 나는 영원히 좋은 딸, 최고의 딸이 돼야 하는데, 이제는 다 글렀다는 말도 몇 번이나 반복되었어요. 무지개는 사라지고 언니는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온통 눈물로 얼룩져 있는 언니의 독백……. 도저히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어 저는 허리를 꺾고 그 자리에 엎드려 엉엉 울었습니다.
다시 노트 장을 넘기던 저는 맨 마지막 장에서 그만 경악하고 말았습니다.
아주 말짱한 정신으로 쓴 것이 분명했습니다.
졸업식에 오신다고 지금부터 야단인데 큰일 났어. 정말 큰일이야. 다 들통이 날 텐데 말이야.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못 오시게 해야 돼. 무슨 좋은 거짓말이 없을까? 도무지 대책이 없다.
졸업을 하는 척하고 그냥 가운을 빌려 입고 쇼를 할까? 나를 하늘같이 믿고 있는 부모님을 절대로 실망시킬 수는 없어. 부모님께는 영원히 좋은 딸로 남아야 해.
차라리 교통사고라도 나서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한테 대해 실망은 않을 것 아냐. 어머머, 미쳤어. 미쳤어.
내가 미쳤어. 내가 죽으면 되지 왜 그런 끔찍한 생각을? 아니지, 내가 죽으면 안 돼. 그 뒷감당을 어찌하라고. 부모님한테는 이보다 더 큰 형벌은 없을 거야. 엄마도 자살을 해버릴지 몰라. 또 아빠는? 아빠는?
그럼 어떡하지? 어떡하지?
살아도 죽어도 해결이 안 되는 좋은 딸, 언니는 그 좋은 딸로 남아 그렇게 부모님을 동반하고 영원히 가버렸습니다.
--- 「무지개 사라진 자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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