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한과 영광의 미주 이민 100년

2008.09.1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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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의 미주 이민은 조선시대 말부터 시작되었다. 19세기 조선의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피폐, 정치적 혼미는 새로운 세계에서의 삶의 개척과 선진 문물을 습득 하도록 하는 동인이 되었다. 미주 지역의 이민은 이 같은 시대적 배경 하에서 시작되었다.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 이르러 미주 사회에서의 한인의 수와 그 위상ㅇ은 현저하게 강화되었다. 미주 한인사는 크게 4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개혁 성향 정치 엘리트/ 선진 문물 배우러 도미 1. 제 1기 (1885~1902) 개항 (1876년) 이래 조선에서는 서구의 문물을 수용하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일련의 움직임들이 있었다. 갑신정변(1884)을 주도하였던 당시의 정치 엘리트들의 개혁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들 개혁 세력들 중 서재필, 서광범 등은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그 이후에도 안창호, 김규식, 이승만 등의 조선의 개화 지식인들이 미국에서 새로운 학문을 습득하게 된다. 또한 개성의 상인들은 미주에서 새로운 사업을 전개하기 위해 미국으로 오게 된다. 제1기에는 주로 지식인들과 일부 상인들이 이민자의 주를 이루었다. 고단한 하와이 노동 이민/ 망국 설움 독립운동 승화 2. 제2기 (1903~1944) 미주 지역에 대한 최초의 한인 이민은 1903년 102명의 한인들이 하와이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들 초기 이민자들은 양반 계급의 착취, 자연재해, 사회적 정치적 불안정 등으로 새로운 삶을 찾아 미주에 까지 진출하였던 것이다. 또한 일본의 조선 침략 장책의 추진으로 경제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엇으며, 1905년에는 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의 주권이 상실되고, 1910년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이로써 한국인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갔으며,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한편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는 값싼 노동력 확보가 중요한 과제로 대두하였다. 이를 위해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한국인 노동자 모집에서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 초기 이민자들은 고된 노동과 낯선 곳에서의 언어장벽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많은 고생을 하였다. 이 같은 열악한 조건 가운데서도 한인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한 것이 교회였다. 한인교회는 단순한 종교적 회합의 장소 그 이상으로서 이만자들간의 정보 교환과 고단한 삶을 서로 격려하는 사회적 역할도 수행하였다. 또한 초기 이민자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특히 한인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로는 박용만, 이승만, 안창호 등이 있었다. 박용만은 무력 운동을, 이승만은 외교 활동을, 안창호는 교육 활동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독립 쟁취에 대한 이들의 방법론상의 차이는 결국 한인 사회의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안창호 선생이 조직한 국민회와 이승만 박사가 조직한 동지회간에도 갈등의 골이 깊어진 것도 이러한 사례에 속한다. 이런 가운데서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은 미주에서의 독립운동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미주 한인들은 본국에서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얼마 되지 않은 급여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기꺼이 기부함으로써 이를 적극 후원하였다. 한국전쟁 후 고난의 현실 / 고아. 국제결혼 여성 많아 3. 제3기 (1945~1964) 해방과 더불어 미주 한인도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되었다. 특히 해방된 지 불과 5년도 안되어 일어난 6.25전쟁은 미주 한인사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6.25전쟁은 한인의 미주 이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에 참전한 미국은 한인의 이민을 재개하였던 것이다. 또한 1951년에는 수 천 명의 전재고아들이 미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전쟁을 전후로 미군과 결혼한 한국인 여성과 전쟁고아가 이민자들의 다수를 차지하였다. 전쟁의 참화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는 수 천 명의 한국 학생들이 미국 대학에서 선진 학문을 배우기 위해 대거 유학을 왔으며, 일부는 미국에 정착하였다. 고국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한국의 근대 학문의 형성과 근대화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도시 전분직 출신 위주 / 본격 이민 중흥기 맞아 4. 제4기 (1965~ 현재) 1965년 미국 이민법의 개정은 미주의 한인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한인 사회도 급성장을 하게 되었다. 1970년 미주 한인이 약 70,000명에 불과하던 것이 2000년 이후에는 백 만 명 이상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의 이주자들은 중산층 출신으로서 도시의 전문직 출신들 즉 '신도시 이민자'들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 및 1970년대에 한국에서 본격화된 산업화와 더불어 사회가 급변하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미주로 이민을 하였다. 이들 중 상당수가 고학력 출신으로 한인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한인 사회는 통상 알려진 것처럼 동질 사회가 아니며, 언어, 출생지, 세대, 자아의식 및 계층별로 구분되어져 있다. 언어적 측면에서 볼 때, 크게 세 부류로 구분된다. 이민 1세대 대사수는 한국어를, 1.5세대는 이중 언어를 구사하는 반면에, 대부분의 2세대들은 영어를 구사한다는 것이다. 미주 한인들의 경우, 자영업장의 비율이 현저히 높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문화적 차이, 언어 장애 등을 극복하기 위해서 한인들이 개인의 성실성을 바탕으로 하는 자영업을 선호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미주 한인 사회와 관련하여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교회가 중요한 구심전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단지 종교적 기능이외에 낯선 곳에서 겪게 마련인 사회적, 문화적 충격을 함께 고유하고 이를 극복하도록 하는데 중요한 몫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미주의 한인 사회가 성장과 기쁨만을 누린 것은 아니었다. 문화적 차이와 몰이해 그리고 불실에서 야기된 이른바 4.29 사태로 불리는 1992년의 로스엔젤레스 폭동은 한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그 동안 애써 일구었던 삶의 터전과 기반이 하루아침에 사리지는 고통을 경험하였다. 한편 이 폭동은 한인들로 하여금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는 미주에서 다른 인종들과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 가에 대한 반성의 계기를 제공하기도 하였으며, 한인 스스로 코리안-아메리칸이라는 자의식을 가지는 기회가 되었다. 이 시련을 극복하고 일어 선 한인 사회는 보편적 가치와 이념아래 고유의 정체성과 문화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중앙일보, 2008년 9월 17일자, A-11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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