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해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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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得音이

2017.04.26 22:50

지/필/묵 조회 수:1261

은혜 강가로.jpg

(사진: 염직 아티스트 화가 강진주  )


여자는 몸에서 양수가 조금씩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 양수는 자궁에서 천천히 허벅지를 타고 발끝에 닿아 있었다.

여자는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짧은 시간 안에 태아가 밖으로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 였다.

여자는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수많은 간판 들과 건물들이 시야로 빨려 들었다.

이 가운데 '천국 시네마'란 간판을 내 건 극장이 여자의 시선을 붙들었다.

여자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극장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매표 구에 구겨진 돈을 내밀고 표 한 장을 구해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여자의 두 다리에선 여전히 많은 양의 양수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자는 입술을 깨물고 아랫도리에 잔뜩 힘을 주며 여자 화장실로 향했다.

여자는 화장실에 들어서자 마자 쏜살같이 변기에 걸 터 앉았다. 

여자는 황급히 두루마리 화장지를 잔뜩 뜯어 입 안 가득히 문 뒤 코를 통해 깊은 쉼을 들이마시고는 아랫배에 온 힘을 가했다.

여자는 한번씩 힘을 줄 때마다 엄청난 고통을 느꼈다.

지구별에 와서 이처럼 느끼는 고통은 처음이었다.

여자의 자궁 에서는 양수와 함께 시뻘건 하열이 쏟아지고 있었다.

여자는 그때마다 변기에 부착된 스틸 레버를 누르고 물을 내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순식간에 밖으로 나올 것만 같았던 몸 속의 핏덩이가 막상 세상 밖으로 밀어내려 하자 뱃속에서 마치, 탯줄을 꼭 붙잡고 ‘바깥 세상은 두려워서 나가기 싫다'는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자의 온 몸에선 비오 듯 땀이 솟구쳤다.

4개의 변기가 설치된 여자 화장실은 지금 영화가 상영중이여선지 화장실을 이용하는 인기척이 드물었다.

간간히 누군가가 들어와서 소변을 본 뒤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여자는 다시 변기 레버를 눌러 물을 내린 뒤 힘겨운 신음을 토하며 모든 기운을 아래로 집중시켰다.

그러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몸 속에서 거대한 느낌 하나가 빠져 나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느낌은 자궁을 통과해 이내 밖으로 나오자마자 물이 찬 변기 속으로 떨어졌다.

여자는 속으로 악을 쓰며 다시 변기의 레버를 누르고 물을 내렸다.

엄청난 속도로 회오리를 치며 배수관을 따라 흘러 가는 폐수 속엔 여자와 핏덩이를 연결한 탯줄이 수압으로 인해 빨려 들고 있었다.

여자는 변기에 얹힌 자신의 엉덩이를 들어내고 탯줄을 걷어 올린 뒤 앞 이빨로 탯줄을 끊기 시작했다.

탯줄은 생각처럼 호락호락 잘리지 않았다.

여자는 이빨로 탯줄을 자르면서 변기 속에 핏덩이를 흘끔 훔쳐 보았다.

두 주먹을 꼭 쥐고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핏덩이가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여자는 이 낯설고 부자연스런 핏덩이를 재빨리 자신에게서 떨쳐 버려야 하겠다는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핏덩이가 인간이 아닌 무릎 위에 쏟은 붉은 케첩처럼 느껴졌다.

앞니로 물어 뜯고 송곳니로 잘라내고 어금니로 질겅질겅 씹어 간신히 탯줄을 끊은 여자가 변기 속에서 두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핏덩이를 내려다 보았다.

핏덩이의 몸뚱이는 어느새 하얗게 변해 있었다.

여자가 수 차례에 걸쳐 변기 속 오수를 내려 보냈기 때문 였다.

여자는 벗어 던진 치마를 집어 다시 고쳐 입고 변기 속의 핏덩이를 들어내 화장지 위에 눕혔다.

화장지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핏덩이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던 여자는 이내 몸을 추스리곤 화장실을 빠져나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뛰쳐 나갔다.

핏덩이가 발견된 것은 영화가 종영되고 난 직후 였다.

화장실에 들어선 여자가 화장지 위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는 핏덩이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다.

핏덩이는 극장측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응급구조대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고 이 곳에서 핏덩이는 비로소 울음을 터뜨렸다.

갓난아이는 여아(女兒)였다. 

득음(得音)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이 소녀는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들을 취합해 듣고, 분석하고, 이를 다시 분해 하는데 천재 였다.

소녀처럼 만물의 소리들을 자유자재로 갖고 노는 인간은 이 지구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만큼 소녀는 소리에 관해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사 이래 전무후무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이 지구별에 올 때 자신을 만든 인간에게 버림을 받았다.

허나, 전화위복이라 할까...... 오히려 자신의 인생을 탄탄대로 위에 올려 놓은 양부모인 의사부부에게 맡겨져 성장했다.

소녀는 세 살 때부터 누구의 가르침 없이 스스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다. 

부모는 물론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득음은 다섯 살 나이 때에는 지구별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를 해석했다.


(천자千字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