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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어디로 갈 것인가?
                                                                                                                     작가 김 우 영

  스무 살 시절. 장발長髮에 청바지와 스카프 목에 걸치고, 굽 높은 구두에, 통기타 하나 달랑 둘러매고 몇 년을 전국 방방곡곡 팔도강산 삼천리 주유천하全國 坊坊曲曲 八道江山 三千里 周遊天下를 하였다. 이때 여행길에서 만난 각 지방의 민속자료 중에 각별하게 섭렵하고 채록한 것이 오늘날의 ‘술의 나라’ ‘술나라‘에 나오는 민속주 등이다.

  스무 살 후반에는 서울에서 살았다. 이때는 문학청년으로 열심히 철학서적 등을 보며 번뇌에 사로잡혀 있을 때이다. 절망과 허무의 늪에 빠지기도 했다. 염세적인 생각으로 허무와 절망감을 처연하게 체험하기도 한다. 스스로가 쌓은 아집의 성에 갇혀 까닭 없이 슬퍼하고 분노하고 외로워하며 때로는 지구의 마지막까지 떠밀려나온 듯 한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던 시절이다. 그러던 터에 어떤 문학모임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그 무렵 고향의 아버님의 작고로 인하여 아내와 상중예식을 하고 고향에 정착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서천으로 내려갔다. 홀어머니 모시고 가정과 안정적인 직장을 잡고 한동안 잘사나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질 못하고 3년여 만에 다니던 직장을 일정한 대책도 없이 접었다. 이젠 총각이 아닌 가장 실업자가 된 것이다.

청바지 시절 절망과 허무의 늪에 자주 빠지던 보헤미안 기질이 도진 것일까? 그러나 그때는 총각으로 홀몸이나 되었지. 그러나 지금은 어머니에 아내와 자식이 태어나질 않았는가? 어찌하려고 또 보헤미안 기질이 나왔단 말인가?

서천에서 몇 년 방황을 하다가 충청남도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응시하여 당진군으로 첫 발령을 받았다. 바다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2년여 살았다. 당진 고대항의 나오는 싱싱한 실치회와 면천 두견주에 맛을 들일 때 쯤 하여 푸르런 삽교호수를 넘어 온양 땅으로 이사를 왔다.

온천과 관광지답게 사람 사는 술렁거림이 있는 온양에 와서 제법 살갑게 살았다. 친구도 사귀고 전국의 문인들이 관광차 오면 술께나 사주며 실속 없이 허허 거리며 살았다.

2년여 온양에서 살다가 예산으로 이사를 했다. 능금의 고장 예산으로 가서 맑은 예당저수지의 물고기와 삽교의 곱창 맛에 예당들판을 다니며 호기를 부렸다. 왕년의 장항선 예산 깡패는 아니었지만 그런 비슷한 부류들과 읍내를 어울려 다니며 어깨에 힘을 주곤 했다.

예산에서 정이 들만 하자 다시 아산시로 이사를 했다. 아산에서 송악면 외암마을을 자주 찾아 이득선옹과 함께 고택 툇마루에 앉아 연엽주를 마시곤 마셨다. 또 가까운 평택으로 다니며 방석집을 기웃거리다가 밤늦게 귀가하며 흰색 와이셔츠에 루주를 묻혀와 아내한태 혼이 나기도 했다. 대신 집 앞에 있는 세탁소박씨는 이를 보고 좋아했다.

“비 오고 난 다음날이면 이런 세탁물이 많어유. 지는 맨 날 비만 왔으믄 좋겄시유!”
“박씨 그게 무슨 말여유. 누구 일 나는 줄 모르구유!”

서울로 공부를 하기 위해 학교를 다녔다. 야간수업이라서 공부를 마치고 장충동 공원 근처 족발 집에서 과우課友들과 밤이 늦도록 앉아 철학과 인생, 문학을 토론 했다. 안경잡이 서울 친구는 술에 취해 해롱거리며 말한다.

“우리는 어둠을 불평하기보다는 단 한 자국의 촛불이라도 밝히고 사는 것이 낫다!”

또 멀리 공부를 위해 경주에서 올라온 자칭, 신라시인은 족발을 입 안에 몰아넣으며 말한다.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너는 울고 모든 사람들은 기뻐했다. 그러나 네가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모든 사람들이 울고 너 만은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하라”

전주에서 올라온 잠바차림의 소설가는 술 취해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말한다.

“한恨이 있는 인생으로 한恨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자니 위태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도다!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말했도다. 알렉산더 대왕으로 부터 어떤 은혜를 받고 싶냐? 는 질문에 잠시라도 햇볕을 더 받게 해달라며 막고 있는 길을 비켜 달라고 했다고 허허헛---”

학교 과우들과 헤어져 서울역으로 왔다. 심야에 경부선 열차를 타고 졸다가 천안에서 내리지 못하고 영동까지 갔다. 상행선을 바꿔 타고 올라오면서 졸다가는 다시 천안역에서 또 내리지 못하고 평택 수원까지 오르락내리락 하다가는 까아만 어둠을 뚫고 여명이 다가오는 날이 여러 번 있었다.

1997년 고향 서천으로 이사 가기로 결심했다. 십 여 년 전 고향 서천을 떠나와 살면서 그리 먼 세월이 아니건만 10여년 객지로 떠돌다가 고향 산천이 그리웠다. 꿈속에서 지겹도록 금강과 장항도선장과 한산갈대밭이 나타나 나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로 오라, 노스탤지어여!’ 서천으로. 이사하기 전 날 아내와 아이들은 울먹이며 나에게 권고를 했다.

“여보, 남 들은 아이들 교육문제로 다들 대도시로 나오는데 우리는 왜 시골로 내려가요?”
“아빠, 우리도 곧 대학에 가잖아요. 그러니 여기 아산은 천안 서울도 가깝고 하는데 그냥 여기서 살아요?”

그러나 이미 고향에 머리를 둔 상태인지 가장인 나의 고집을 막지는 못했다. 서천에 가서 어려서부터 자란 고향 산천을 두루 둘며 향토의 정취에 심취하였다. 여기에서 지금의 계간 문예마을 잡지가 2000년 12월에 장항에서 회원들과 창간을 하였다.

고향에서 문학과 시 낭송 등 활동을 하면서 직장과 가정에 충실하며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다시 방황의 고개가 들리기 시작한다. 첫 째는 여고3학년의 큰 딸의 대학진학을 위해서는 대전 쪽으로 이사를 해야 하는 부득이함과 두 번째는 고향이라는 안온하기만 했던 고향 서천이 나를 서서히 떠밀고 있었다. 어머니만 같았던 고향의 품이 낯설게 찬바람으로 바뀌고 있었다. 주변의 선배가 충고한다.

“고향은 자네같이 열심히 활동하는 젊은 사람이 오는 게 아니여? 고향은 늙어서 나중에 쉬러나 와. 어여 빨리 이곳을 떠나게.”

2001년 9월 1일. 타의 반 자의 반으로 고향 서천을 떠나 대전 문화동으로 집을 이사를 하고 직장은 중구 안영동 고개 너머에 있는 금산 복수면으로 옮겼다. 그러기를 1년 1반이 되자 다시 연기군 조치원으로 직장을 옮기어야만 했다.

연기군의 복숭아와 막걸리에 취해 머물 던 1년 반 세월이었다. 다시 직장을 옮기어야 할 형편이 되었다. 장고 長考 끝에 고민을 마치고 2004년 3월 2일 대전광역시 중구로 직장을 옮겼다. 이러는 사이에 까맣던 머리는 희끗희끗하여 불혹의 후반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고등학생이던 두 딸은 대학생이 되어 아가씨가 되어있고 초등학생이던 풋내기 아들은 이젠 턱수염이 까칠까칠하게 나오며 나와 비슷한 아저씨 목소리가 되어 있었다.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간 집의 이사와 직장을 많이도 옮겼다. 서천군에서 당진군으로, 아산군에서, 예산군으로, 아산시에서 다시 서천군으로, 서천군에서 금산군으로, 금산군에서 연기군으로, 다시 연기군에서 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로 옮겨왔다. 그간 7개 군, 1개시, 1개구 즉 9개 군. 시. 구로 자리를 옮기며 살았다는 것이다. 평균 2년여를 살면서 이사와 직장을 옮겼다는 얘기이다.

나는 어디를 옮겨가 살든 사람 사귀기를 좋아한 탓에 아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폭넓은 교유를 하며 살았다. 반면 아이들은 2년 간격으로 이사를 다녀야 했기에 세 아이들이 보통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2-3개교의 전학을 다니는 바람에 공부에 지장이 많이 생겼다. 또한 잦은 이사로 인하여 장롱과 웬만한 살림살이는 거의 망가졌다. 또한 이사를 인한 가정의 경제적 손실이 많았다.

대전 문화동에 애초에 살 때는 1층 이었으나 중간에 조카가 오는 바람에 2층이 생겨 집이 넓어졌다. 더러 손님이 오면 방이 비좁아 힘들었던 문제점은 해결되었다. 그 실례로 엊그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친구 내외가 왔는데 2층 독채 전체를 사용하고 가면서 아이들한테 30달러를 주고 갔다. 증축 이후 외화를 처음으로 벌어들인 경우이다.

저녁을 먹고 2층으로 올라가 난간에 기대여 앉았다. 이웃집 불빛이 보이는 저편으로 어둠을 뚫고 보문산이 뿌연 하늘을 머리에 이고 게슴츠레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심호홉을 하며 바라본다. 충청도 서천 시골에서 태어나 살면서 이곳저곳으로 부평초처럼 살아온 나는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문득 평소에 애송하던 시 한편이 생각이 나는 밤이다.

산 넘어 언덕 넘어 / 하늘도 멀리 행복은 있다고 / 사람들은 말 하네/ 아! / 나는 벗 따라 찾아갔다가 / 눈물만 머금고 돌아 왔다네 / 산 넘어 언덕 넘어 / 더욱 멀리 행복은 있다고/ 사람들은 말 하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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