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인이 겪은 6. 25 한국전쟁
오정방
(註) 여기 소개하는 글은 대전에서 살고 있는 동창 국향 남순자 여사의
6. 25 경험담이다. 교직에 계셨던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양양에 살다가
엄청난 사변을 만난 것이다. 내용에서 보듯이 가장 중요한 것은 6. 25
한국전쟁은 북괴가 이미 오래전에 치밀하게 계획하여 저지른 남침이었
다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일부 6. 25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
들과 경험했으면서도 저쪽 물이 많이 든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6. 25
전쟁은 남쪽이 북침을 한 것이라고 호도하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편지는 울진중학교 5회 동창들의 E-mail 모임인 연호전우회蓮湖
電友會 멤버들에게 보내진 것이지만 널리 공개해도 하자가 없는 경험담
이어서 여기에 소개하는 것이다. 우리 12명의 멜친들은 거의 모두
70대를 맞았다. (오정방)
…………………………………………………………………………………
내가 겪은 6. 25 동란
1950년 6월24일밤 양양 남자중학교 운동장엔 수많은 군인들이 우렁찬
함성과 노래로 시끄러웠다. 나는 노래소리를 들으며 운동장에 나가 보았다.
사택은 학교 뒤쪽에 있었으니까 ....
노래곡은 쏘련의 상징 노래인데 이승만을 비방하는 가사를 붙여 노래하고
있었다. 한 소절 기억나는 것은 ‘술단지에 대가리 박고 못나오는 이승만.....’
이것만 생각이 난다. 다음날 6월25일 새벽 앞이 잘 안보이는 안개낀 아침
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마차와 군용차 들이 남대천 다리를 건너 남으로
남으로 달리는 모습을 집에서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
다응날 그 당시는 무슨 영문인줄도 모르고 학교에 갔었는데 선생님이 전쟁이
일어났다 했으며 3 일만에 서울은 물론 그 남단까지 진격 남침을 했다는
소리와 거의 승리한것 같은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불과 12일만에 국군의
맹공격이 시작 됐다.
7월7일 아침 나에겐 19살된 오빠(고3)가 있었는데 이날 고등학생 모두가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그날은 유난히도 무더운 날씨였다.
어머니는 어린 동생을 업고 오빠 배웅을 위해 청곡리 역전까지 갔다 오시는
중이었는데 남한의 맹공격 함포사격이 시작됐다. 언니는 남대천에서 친구
들과 놀다 집으로 와서 파죽음이 돼서 오신 어머니와 방공호에 피신했는데
밖에서 놀던 나는 어느 선생님의 손을잡고 폭탄이 제일 많이 떨어지는 남대천
강변을 향해 뛰고 있었다. 선생님이 엎드리라고 소리치면 엎드렸다 다시뛰고
했는데 시내를 공격 한다는 것이 잘못 됐는지 남대천 들판에 집중적으로
폭탄이 떨어졌다. 그 선생님은 그 쪽이 안전하다고 어머니가 안계시니까
데리고 간 모양인데 얼마를 업드렸다 뛰다 하다보니 선생님도 간데 없고
건너마을까지 갔는데 그 때는 폭음 소리도 그쳤고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야하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서성거리던 중 마침 아는분 을 만나
무사히 집까지 돌아오긴 했는데 집에서는 온통 난리가 났다.
나는그날 얼마나 놀랬던지 다음날 하늘도 노했음인지 벼락치는 소리와 천둥
번개 소리가 하루 종일 끊이지 않았는데 나는 하루종일 이불 뒤집어 쓰고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잘못되는줄 알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그런 천둥
번개소리는 들어 본적이없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우리는8월초까지
학교를 다녔는데 방공호에서 공부를 했다. 전기까지 연결돼 있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전쟁준비를 미리 해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군의 공격은 계속 되었고 비행기 공습으로 철산 광산에 피했던
사람중 3명만 살았다는 소식도 들었고 현남에서는 방공호에서 학생들이 많이
희생됐다고 했다.
여름방학이 되면서 전쟁은 점점 치열해졌고 국군의 공격은 점점 치열해저
우리 가족은 4Km정도 되는거마리라는 농촌 마을에 피신을 해야했다. 그곳
에서는 매일 감자를 삶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전쟁시엔 우선 식량이 제일중요하다 생각 했음인지 옷가지를 주고
쌀을 바꿔 모으기 시작했다. 거기 머물면서 식량이든가 필요한 것 가지러
집에 가시면 나와 동생도 따라갔는데 비행기 소리만 나면 길옆 콩밭에
숨었고 어머니 등에 엎인 3살박이 동생은 좋아라 웃고 있었고 나와 동생도
숨바꼭질이나 하는 것처럼 낄낄거리곤 했었다. 그렇게 오르내리며 여름을
지냈는데 드디어 9월28일 서울탈환과 함께 인민군 패잔병들은 계속 후퇴
하고 있었다.
우리가족은 잠시 피해야만 했다. 이때 아버지는 선생님들과 먼저 피신을
해야만 했고 아버지와 잠시 헤여져야만 했다. 우리는 뒨전골이라는 곳으로
피신을 했는데 중학교 선생님 집인것 같았다. 그날은 보름달이었는지
유난히도 달이 밝은 밤이었는데 맑은물이 흐르는 큰 돌다리를 건너던 그
아름다운 경치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금의 내설악이었던 것 같다.
왠만한 농촌은 전기가 들어왔는데 그곳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아주 산골
이었다. 아버지와 헤어져 그곳에서 며칠 머물렀는데 어느분이 찾아와서
이젠 집으로 가도 된다고 해서 우린 다시 집에 머물게 되었다.
집에오니 인민군이 가마솥에 기름을 부어 밀가루 반죽해서 튀겨먹고 닭도
잡아먹고 온집안이 아수라 장이었다. 우린 아버지 소식을 몰라 애태우던중
헤어진지 한달여 만에 무사히 돌아오신 아버지를 만났다. 헤어질 때 엄마가
조금씩 나눠준 쌀은 다 떨어져서 먹을 것이 없어 바닷물로 간을하고 밭에
남아있는 강릉시래기 같은 배추를 끓여 먹기도 했다 한다.
그당시 아버지는 학교에 근무했고 사상적으로 이북에서 주목받던터라,
국군이 들어왔을 때 별다른 조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민간단체 무슨 내용
인지는 몰라도 어떤책임을 맡아달라고 했다.
인민군과 패잔병들은 계속 후퇴를 했고 신의주까지 아군은 북진을 했는데,
중공군의 맹공격으로 다시 후퇴하기 시작한것이 바로 1-4 후퇴인 것이다.
우리는 그 때 사태가 안좋다는 소식을 듣고 남보다 일찍 고향 울진을 목표로
피난길에 올랐다. 그 당시 경찰에 다니는 집안 아저씨가 찾아와 도움을
주었다. 머리맡엔 항상 각자 배낭 하나씩 놓고 있었는데, 그속엔 미숫가루와
백설기 말린것 옷가지 조금 약품 같은 것을 넣은 배낭 이었다. 피난가자 하면
배낭부터 둘러메고 소풍이나 가는것 처럼 좋아했던 철부지 기억도 난다.
떠나던날 아침, 아버지는 어디 다녀오신다고 하더니 편지 한통을 들고 오셨다.
남자고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아버지 춘천사범학교 동기동창생이었던 어른은
아버지와 무척가까이 지내셨었는데 우리집에 오시면 조그만 라디오를 이불로
가리고 방송을 듣는 모습도 가끔 보았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남한방송을
들으셨다고 한다. 그분은 강릉이 고향인데 같이 피난오려고 했는데 몸이 많이
아파 도저히 걸을수가 없어 먼저 가라시면서 당신 어머니께 전해달라는
부탁과 강릉집에 머물다 가라 하셨다고 했다.
그후 우린 강릉99칸짜리집 (지금의 성교장) 그분집에 3일만에 도착해 그
편지를 전하고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분 어머니는 하얀머리를 곱게 빗은 대가집 마님 다웠다. 마침 양력설
이어서인지 그렇게 큰 상차림은 처음 본 것같았다. 며칠 쉬어가라 하셔서
3일걸은 여독도 풀겸 며칠 쉬어온 기억도 난다.
우리가 나올 떄에는 피난민 행렬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인지 오면서 잠도
방에서 잘 수 있었고 따뜻한 밥도 지어주었다. 나중에 나온 사람들에 의하면
잠도 추녀밑에서 자고 먹을 것이 없어 힘들었다고 한다. 우린 미숫가루와
백설기 말린것을 물을 마셔가며 점심은 해결 할 수 있었다. 긴 여정속에
드디어 하루 30리도 걷고 40리도 걸으며 510리 길을 16일만에 걸어서
고향 울진까지 도착했다.
내가 이 글을 쓴 것은 6. 25당시 이북에서 살았던 내가 직접 경험한 내용과
멜친들이 겪은 경험담을 생각하며 그 당시 남한에는 좌익들이 많았고 지금도
그 잔당들이 선동을 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6. 25 전쟁은 북에서 남침을 한 것임이 틀림없었음을 증언
하고 싶기 때문이다.(국향 순자)
⊙ 작품장르 : 6.25이야기
오정방
(註) 여기 소개하는 글은 대전에서 살고 있는 동창 국향 남순자 여사의
6. 25 경험담이다. 교직에 계셨던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양양에 살다가
엄청난 사변을 만난 것이다. 내용에서 보듯이 가장 중요한 것은 6. 25
한국전쟁은 북괴가 이미 오래전에 치밀하게 계획하여 저지른 남침이었
다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일부 6. 25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
들과 경험했으면서도 저쪽 물이 많이 든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6. 25
전쟁은 남쪽이 북침을 한 것이라고 호도하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편지는 울진중학교 5회 동창들의 E-mail 모임인 연호전우회蓮湖
電友會 멤버들에게 보내진 것이지만 널리 공개해도 하자가 없는 경험담
이어서 여기에 소개하는 것이다. 우리 12명의 멜친들은 거의 모두
70대를 맞았다. (오정방)
…………………………………………………………………………………
내가 겪은 6. 25 동란
1950년 6월24일밤 양양 남자중학교 운동장엔 수많은 군인들이 우렁찬
함성과 노래로 시끄러웠다. 나는 노래소리를 들으며 운동장에 나가 보았다.
사택은 학교 뒤쪽에 있었으니까 ....
노래곡은 쏘련의 상징 노래인데 이승만을 비방하는 가사를 붙여 노래하고
있었다. 한 소절 기억나는 것은 ‘술단지에 대가리 박고 못나오는 이승만.....’
이것만 생각이 난다. 다음날 6월25일 새벽 앞이 잘 안보이는 안개낀 아침
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마차와 군용차 들이 남대천 다리를 건너 남으로
남으로 달리는 모습을 집에서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
다응날 그 당시는 무슨 영문인줄도 모르고 학교에 갔었는데 선생님이 전쟁이
일어났다 했으며 3 일만에 서울은 물론 그 남단까지 진격 남침을 했다는
소리와 거의 승리한것 같은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불과 12일만에 국군의
맹공격이 시작 됐다.
7월7일 아침 나에겐 19살된 오빠(고3)가 있었는데 이날 고등학생 모두가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그날은 유난히도 무더운 날씨였다.
어머니는 어린 동생을 업고 오빠 배웅을 위해 청곡리 역전까지 갔다 오시는
중이었는데 남한의 맹공격 함포사격이 시작됐다. 언니는 남대천에서 친구
들과 놀다 집으로 와서 파죽음이 돼서 오신 어머니와 방공호에 피신했는데
밖에서 놀던 나는 어느 선생님의 손을잡고 폭탄이 제일 많이 떨어지는 남대천
강변을 향해 뛰고 있었다. 선생님이 엎드리라고 소리치면 엎드렸다 다시뛰고
했는데 시내를 공격 한다는 것이 잘못 됐는지 남대천 들판에 집중적으로
폭탄이 떨어졌다. 그 선생님은 그 쪽이 안전하다고 어머니가 안계시니까
데리고 간 모양인데 얼마를 업드렸다 뛰다 하다보니 선생님도 간데 없고
건너마을까지 갔는데 그 때는 폭음 소리도 그쳤고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야하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서성거리던 중 마침 아는분 을 만나
무사히 집까지 돌아오긴 했는데 집에서는 온통 난리가 났다.
나는그날 얼마나 놀랬던지 다음날 하늘도 노했음인지 벼락치는 소리와 천둥
번개 소리가 하루 종일 끊이지 않았는데 나는 하루종일 이불 뒤집어 쓰고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잘못되는줄 알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그런 천둥
번개소리는 들어 본적이없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우리는8월초까지
학교를 다녔는데 방공호에서 공부를 했다. 전기까지 연결돼 있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전쟁준비를 미리 해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군의 공격은 계속 되었고 비행기 공습으로 철산 광산에 피했던
사람중 3명만 살았다는 소식도 들었고 현남에서는 방공호에서 학생들이 많이
희생됐다고 했다.
여름방학이 되면서 전쟁은 점점 치열해졌고 국군의 공격은 점점 치열해저
우리 가족은 4Km정도 되는거마리라는 농촌 마을에 피신을 해야했다. 그곳
에서는 매일 감자를 삶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전쟁시엔 우선 식량이 제일중요하다 생각 했음인지 옷가지를 주고
쌀을 바꿔 모으기 시작했다. 거기 머물면서 식량이든가 필요한 것 가지러
집에 가시면 나와 동생도 따라갔는데 비행기 소리만 나면 길옆 콩밭에
숨었고 어머니 등에 엎인 3살박이 동생은 좋아라 웃고 있었고 나와 동생도
숨바꼭질이나 하는 것처럼 낄낄거리곤 했었다. 그렇게 오르내리며 여름을
지냈는데 드디어 9월28일 서울탈환과 함께 인민군 패잔병들은 계속 후퇴
하고 있었다.
우리가족은 잠시 피해야만 했다. 이때 아버지는 선생님들과 먼저 피신을
해야만 했고 아버지와 잠시 헤여져야만 했다. 우리는 뒨전골이라는 곳으로
피신을 했는데 중학교 선생님 집인것 같았다. 그날은 보름달이었는지
유난히도 달이 밝은 밤이었는데 맑은물이 흐르는 큰 돌다리를 건너던 그
아름다운 경치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금의 내설악이었던 것 같다.
왠만한 농촌은 전기가 들어왔는데 그곳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아주 산골
이었다. 아버지와 헤어져 그곳에서 며칠 머물렀는데 어느분이 찾아와서
이젠 집으로 가도 된다고 해서 우린 다시 집에 머물게 되었다.
집에오니 인민군이 가마솥에 기름을 부어 밀가루 반죽해서 튀겨먹고 닭도
잡아먹고 온집안이 아수라 장이었다. 우린 아버지 소식을 몰라 애태우던중
헤어진지 한달여 만에 무사히 돌아오신 아버지를 만났다. 헤어질 때 엄마가
조금씩 나눠준 쌀은 다 떨어져서 먹을 것이 없어 바닷물로 간을하고 밭에
남아있는 강릉시래기 같은 배추를 끓여 먹기도 했다 한다.
그당시 아버지는 학교에 근무했고 사상적으로 이북에서 주목받던터라,
국군이 들어왔을 때 별다른 조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민간단체 무슨 내용
인지는 몰라도 어떤책임을 맡아달라고 했다.
인민군과 패잔병들은 계속 후퇴를 했고 신의주까지 아군은 북진을 했는데,
중공군의 맹공격으로 다시 후퇴하기 시작한것이 바로 1-4 후퇴인 것이다.
우리는 그 때 사태가 안좋다는 소식을 듣고 남보다 일찍 고향 울진을 목표로
피난길에 올랐다. 그 당시 경찰에 다니는 집안 아저씨가 찾아와 도움을
주었다. 머리맡엔 항상 각자 배낭 하나씩 놓고 있었는데, 그속엔 미숫가루와
백설기 말린것 옷가지 조금 약품 같은 것을 넣은 배낭 이었다. 피난가자 하면
배낭부터 둘러메고 소풍이나 가는것 처럼 좋아했던 철부지 기억도 난다.
떠나던날 아침, 아버지는 어디 다녀오신다고 하더니 편지 한통을 들고 오셨다.
남자고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아버지 춘천사범학교 동기동창생이었던 어른은
아버지와 무척가까이 지내셨었는데 우리집에 오시면 조그만 라디오를 이불로
가리고 방송을 듣는 모습도 가끔 보았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남한방송을
들으셨다고 한다. 그분은 강릉이 고향인데 같이 피난오려고 했는데 몸이 많이
아파 도저히 걸을수가 없어 먼저 가라시면서 당신 어머니께 전해달라는
부탁과 강릉집에 머물다 가라 하셨다고 했다.
그후 우린 강릉99칸짜리집 (지금의 성교장) 그분집에 3일만에 도착해 그
편지를 전하고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분 어머니는 하얀머리를 곱게 빗은 대가집 마님 다웠다. 마침 양력설
이어서인지 그렇게 큰 상차림은 처음 본 것같았다. 며칠 쉬어가라 하셔서
3일걸은 여독도 풀겸 며칠 쉬어온 기억도 난다.
우리가 나올 떄에는 피난민 행렬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인지 오면서 잠도
방에서 잘 수 있었고 따뜻한 밥도 지어주었다. 나중에 나온 사람들에 의하면
잠도 추녀밑에서 자고 먹을 것이 없어 힘들었다고 한다. 우린 미숫가루와
백설기 말린것을 물을 마셔가며 점심은 해결 할 수 있었다. 긴 여정속에
드디어 하루 30리도 걷고 40리도 걸으며 510리 길을 16일만에 걸어서
고향 울진까지 도착했다.
내가 이 글을 쓴 것은 6. 25당시 이북에서 살았던 내가 직접 경험한 내용과
멜친들이 겪은 경험담을 생각하며 그 당시 남한에는 좌익들이 많았고 지금도
그 잔당들이 선동을 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6. 25 전쟁은 북에서 남침을 한 것임이 틀림없었음을 증언
하고 싶기 때문이다.(국향 순자)
⊙ 작품장르 : 6.25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