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용사 초청 오찬회 후기
오정방
(註) 6. 25 한국전쟁 발발 59주년을 앞두고 내가 출석하고 있는 미국
포틀랜드의 온누리성결교회(담임 강재원 목사)에서는 같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6. 25 참전용사들을 초청하여 오찬을 대접하고 위로
하는 행사를 지난 16일(화)에 교회에서 가졌었다. 참전용사들이
가슴에 훈장을 달고 나와 자랑스러웠으며 또 존경스러웠다. 정말
저들이 없었더면 오늘날 조국이 이렇게 건재할 수 있었을까?
11시, 기념식에 이어 담임목사님의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는
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이어서 6. 25참상을 담은 동영상을
감상하고 동석한 60여명이 ‘전우야 잘자라’(유호 작사/박시춘 작곡)
를 4절까지 부른 뒤에 이배영 참전용사의 ‘전후담’을 들은 뒤에
내게 마이크가 넘어와서 6월 이맘때면 늘 불러보는 ‘6’25의 노래’
(박두진 작사/김동진 작곡) 1절을 불렀다.
요즘 서울에서 6. 25 한국전쟁 기념식을 하는지 않는지는 모르지만
두 번 다시 이런 끔찍한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라도
해두기 위해 ‘ 6. 25의 노래’는 계속 불려져야 한다고 본다. 계속해서
모윤숙 시인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암송하고 노병들이 원했던
가곡 ‘봄처녀’, ‘바위고개’, ‘가고파’를 부른 뒤에 앵콜곡으로 ‘동무
생각’을 불렀다.
이 아래 편지는 이 번 행사에 참석했던 어느 참전용사의 부인이
보내온 것인데 대학노트 크기 앞뒤로 빡빡하게 육필로 쓰신 것을
본인들의 양해없이 여기에 옮긴 것이다. 전쟁의 조그만 단면을 볼 수
있다고 생각되기에… (오정방)
………………………………………………………………………..
오 장로님께!
저와 저의 남편은 참전용사회에 처음나가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전에는 저희가 코인라운드리 사업관계로 쉬는 날이 없었고 작년에
은퇴하였으나 겨울에는 날씨 관계로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처음 나가서 마음이 기쁩니다.
첫째는 저희 남편이 많은 사람들(참전용사들)과의 대화를 나누고
만남을 가졋으며 둘째는 6. 25 전쟁 영상을 보고 그 때의 참혹한 광경이
다시 떠오르고 지금 축복받은 생활에 감사했고 셋째는 목사님과 장로님,
온누리교회 교인들의 사랑과 대접을 받은 것에 대해 감회가 컸습니다.
저는 고향이 서울인지라 6. 25때의 참상을 목격했습니다. 제 나이 7살 때
인민군들이 젊은 남자들을 효창공원에 끌고가서 따발총으로 쏴죽이는
것을 많이 보았고 인민군들이 젊은 여자 남자들을 끌어다가 인민군을
만들어 김일성 노래를 부르고 거리로 행진하였으며 매일 비행기들이
하늘을 날으고 폭격을 퍼부어 길가던 사람, 집에 있던 사람들이 죽어
갔고 건물은 불타고 먹을 것이(양식, 채소) 없어 고생하고 폭격이 무서
워서 효창공원 방공호에 들어가 사는 날도 많았습니다. 서울시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 옆에는 숙명여대가 있고 지금은 축구경기장도 있고
김구 선생 묘소도 있는 곳입니다.
저희 식구들은 1951년 1월 4일, 1.4후퇴 때 피난 길에 올라 수원(경기)
시에서 20리 떨어진 시골(父의 고향)으로 갔으나 거기도 인민군이
들어와 있었고 저희 큰언니(당시 14살)는 다락에 숨겨놓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인민군에 안끌려가고 희생제물이 되지않고 지금 74인데 가족과
행복하게 사십니다. 6. 25참상을 보면서 그 때 기억이 생생하고 ‘전우야
잘자라’노래도 그 시절 많이 불렀습니다.
현재 한국의 상황이 걱정과 안타까움이 더하여 마음이 슬퍼서 영상을
보면서 눈시울을 적셨습나다. 지금 참전용사를 비롯해 60대~80대들이
이 땅을 떠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친북세력자들 탈북을 가장한 간첩들
(합법적)이 교회 목사들 속에 군장성들 속에 국회의원, 교수 교사, 일반
단체들 속에서 활약하며 국가를 전복 김정일 세상을 만들려하며 특히
요즘은 노00의 죽은 혼까지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흔들어서
구역질 나는 노00 사모파 부대들이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기가 너무 힘겨워 이 대통령이 불쌍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더 강경책을 써서(보수진영의 힘을 빌어)밀어 붙였으면 하는
바램도 있습니다.
김00은 죽지도 않고 계속 국민들을 선동하는 발언(망언)을 하고 정부를
비판하고 있는 파렴치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가관이지요. 우리는
후세들에게 옳바른 정신문화와 신앙교육으로 유산을 물려주어야 겠지요.
참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지금 이민 2-3세와 현재 한국의 40대 이후 젊은
세대에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장로님의 시는 때때로 일간지, 주간지 같은 곳에서 읽었습니다.
그러나 모습은 오늘 처음 뵈었고 온누리교회에 시무하시는 것도 오늘
에야 알았고 시만 잘 쓰시는줄 알았더니 노래 수준도 가이 기성가수
못지 않는 실력이었습니다. 주로 여자들이 좋아하는 가곡을 부르셔서
장로님의 성품이 문학자 답게 온화하고 여성적이라는 것을 알았고
용모도 제보다 2살 위이신데 매우 젊게 보이는 동안이었습니다.
교회 음식도 맛이 있었으며 참전용사들을 사랑하시고 온 정성을 온
교인들(목사님, 장로님, 집사님, 교사들, 어린학생까지)이 쏟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이들 말처럼 기분이 ‘짱’이었습니다.
장로님 더욱 건강하시고 좋은 시를 더 많이 쓰시고 기도하시는 모든
소원 이뤄지시기를 바라며 온누리교회도 더욱 부흥(질적,양적)될 것을
믿습니다.
두서없는 난필 용서하시고 참전용사들의 건재함을 위해 애써주시기를
바라오며 안녕히 계십시오.
2009. 6. 16 고00, 고00 부부 드림
⊙ 작품장르 : 6.25이야기
오정방
(註) 6. 25 한국전쟁 발발 59주년을 앞두고 내가 출석하고 있는 미국
포틀랜드의 온누리성결교회(담임 강재원 목사)에서는 같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6. 25 참전용사들을 초청하여 오찬을 대접하고 위로
하는 행사를 지난 16일(화)에 교회에서 가졌었다. 참전용사들이
가슴에 훈장을 달고 나와 자랑스러웠으며 또 존경스러웠다. 정말
저들이 없었더면 오늘날 조국이 이렇게 건재할 수 있었을까?
11시, 기념식에 이어 담임목사님의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는
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이어서 6. 25참상을 담은 동영상을
감상하고 동석한 60여명이 ‘전우야 잘자라’(유호 작사/박시춘 작곡)
를 4절까지 부른 뒤에 이배영 참전용사의 ‘전후담’을 들은 뒤에
내게 마이크가 넘어와서 6월 이맘때면 늘 불러보는 ‘6’25의 노래’
(박두진 작사/김동진 작곡) 1절을 불렀다.
요즘 서울에서 6. 25 한국전쟁 기념식을 하는지 않는지는 모르지만
두 번 다시 이런 끔찍한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라도
해두기 위해 ‘ 6. 25의 노래’는 계속 불려져야 한다고 본다. 계속해서
모윤숙 시인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암송하고 노병들이 원했던
가곡 ‘봄처녀’, ‘바위고개’, ‘가고파’를 부른 뒤에 앵콜곡으로 ‘동무
생각’을 불렀다.
이 아래 편지는 이 번 행사에 참석했던 어느 참전용사의 부인이
보내온 것인데 대학노트 크기 앞뒤로 빡빡하게 육필로 쓰신 것을
본인들의 양해없이 여기에 옮긴 것이다. 전쟁의 조그만 단면을 볼 수
있다고 생각되기에… (오정방)
………………………………………………………………………..
오 장로님께!
저와 저의 남편은 참전용사회에 처음나가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전에는 저희가 코인라운드리 사업관계로 쉬는 날이 없었고 작년에
은퇴하였으나 겨울에는 날씨 관계로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처음 나가서 마음이 기쁩니다.
첫째는 저희 남편이 많은 사람들(참전용사들)과의 대화를 나누고
만남을 가졋으며 둘째는 6. 25 전쟁 영상을 보고 그 때의 참혹한 광경이
다시 떠오르고 지금 축복받은 생활에 감사했고 셋째는 목사님과 장로님,
온누리교회 교인들의 사랑과 대접을 받은 것에 대해 감회가 컸습니다.
저는 고향이 서울인지라 6. 25때의 참상을 목격했습니다. 제 나이 7살 때
인민군들이 젊은 남자들을 효창공원에 끌고가서 따발총으로 쏴죽이는
것을 많이 보았고 인민군들이 젊은 여자 남자들을 끌어다가 인민군을
만들어 김일성 노래를 부르고 거리로 행진하였으며 매일 비행기들이
하늘을 날으고 폭격을 퍼부어 길가던 사람, 집에 있던 사람들이 죽어
갔고 건물은 불타고 먹을 것이(양식, 채소) 없어 고생하고 폭격이 무서
워서 효창공원 방공호에 들어가 사는 날도 많았습니다. 서울시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 옆에는 숙명여대가 있고 지금은 축구경기장도 있고
김구 선생 묘소도 있는 곳입니다.
저희 식구들은 1951년 1월 4일, 1.4후퇴 때 피난 길에 올라 수원(경기)
시에서 20리 떨어진 시골(父의 고향)으로 갔으나 거기도 인민군이
들어와 있었고 저희 큰언니(당시 14살)는 다락에 숨겨놓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인민군에 안끌려가고 희생제물이 되지않고 지금 74인데 가족과
행복하게 사십니다. 6. 25참상을 보면서 그 때 기억이 생생하고 ‘전우야
잘자라’노래도 그 시절 많이 불렀습니다.
현재 한국의 상황이 걱정과 안타까움이 더하여 마음이 슬퍼서 영상을
보면서 눈시울을 적셨습나다. 지금 참전용사를 비롯해 60대~80대들이
이 땅을 떠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친북세력자들 탈북을 가장한 간첩들
(합법적)이 교회 목사들 속에 군장성들 속에 국회의원, 교수 교사, 일반
단체들 속에서 활약하며 국가를 전복 김정일 세상을 만들려하며 특히
요즘은 노00의 죽은 혼까지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흔들어서
구역질 나는 노00 사모파 부대들이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기가 너무 힘겨워 이 대통령이 불쌍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더 강경책을 써서(보수진영의 힘을 빌어)밀어 붙였으면 하는
바램도 있습니다.
김00은 죽지도 않고 계속 국민들을 선동하는 발언(망언)을 하고 정부를
비판하고 있는 파렴치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가관이지요. 우리는
후세들에게 옳바른 정신문화와 신앙교육으로 유산을 물려주어야 겠지요.
참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지금 이민 2-3세와 현재 한국의 40대 이후 젊은
세대에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장로님의 시는 때때로 일간지, 주간지 같은 곳에서 읽었습니다.
그러나 모습은 오늘 처음 뵈었고 온누리교회에 시무하시는 것도 오늘
에야 알았고 시만 잘 쓰시는줄 알았더니 노래 수준도 가이 기성가수
못지 않는 실력이었습니다. 주로 여자들이 좋아하는 가곡을 부르셔서
장로님의 성품이 문학자 답게 온화하고 여성적이라는 것을 알았고
용모도 제보다 2살 위이신데 매우 젊게 보이는 동안이었습니다.
교회 음식도 맛이 있었으며 참전용사들을 사랑하시고 온 정성을 온
교인들(목사님, 장로님, 집사님, 교사들, 어린학생까지)이 쏟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이들 말처럼 기분이 ‘짱’이었습니다.
장로님 더욱 건강하시고 좋은 시를 더 많이 쓰시고 기도하시는 모든
소원 이뤄지시기를 바라며 온누리교회도 더욱 부흥(질적,양적)될 것을
믿습니다.
두서없는 난필 용서하시고 참전용사들의 건재함을 위해 애써주시기를
바라오며 안녕히 계십시오.
2009. 6. 16 고00, 고00 부부 드림
⊙ 작품장르 : 6.25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