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한해의 끝이 언뜻 보인다. '이렇게 보낼 수는 없어!' 나뭇잎 깡그리 떠나 보내는 나무의 아쉬움으로 소리 질러 본다.
하늘은 저리 높고 새는 날개 한껏 펴 창공을 나는데 일상의 파닥거림만 거듭하다가 또 한해 무심히 가버릴 것만 같다. 단풍 현란한 산으로 갈까. 비췻빛 물결 눈부신 바다로 갈까.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만 같아 괜스레 마음 분분하다.
결실의 계절, 사색의 계절, 문화의 계절, 축제의 계절, 여행의 계절, 독서의 계절. 참으로 가을은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붙는 계절이다. 제철 관계없이 생산되는 작물이 많아지긴 했어도 '결실의 계절'이라는 말을 여전히 가을 상징의 첫 번째로 꼽고 싶다. 그러나 먹거리의 풍요로움만으로 온전한 결실을 누릴 수는 없다. 내적인 결실 없는 가을은 더욱 공허할 터이니.
깊은 사색으로 인생의 깨달음도 얻고, 문화마당과 축제의 장소를 찾아 즐거움도 누리고, 어디 훌쩍 여행도 떠나면 좋겠지만, 만만찮은 미국생활, 훌훌 털고 날려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무엇을 해도 좋은 이 계절에 마음만 먹으면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은 독서, 그건 또 쉬운가.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흐지부지되기 십상이다.
몇 해 전 뜻을 같이하는 문우 넷이서 사계절이라는 이름으로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봄.여름.가을.겨울 중 자신이 좋아하는 계절을 선택해서 애칭으로 불렀다. 책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정겨운 만남이 한동안 이어졌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지속되지 못했다. 독서, 혼자 해보려고 끙끙대 보았지만 정보의 바다 인터넷을 헤엄쳐 다니느라, 흥미 가득한 스마트폰 기능 따라잡느라 책은 손에서 더 멀어졌다. 때로 종이 활자의 푸근함이 그리워 책을 펼치면, 의지력이 희박한 탓인지 한 권의 책이 온전히 내 것이 되는 기쁨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게 아닌데, 하는 갈급함이 더해질 즈음 '독서 지도사' 클래스가 있다는 소식이 귀에 쏙 들어왔다. 독서, 나부터 지도해야 할 것 같아 반가운 마음으로 등록했다. 6개월 동안 매주 화요일 저녁 3시간의 수업과, 한 주에 한 권 선정도서를 읽는다. 제대로 한 권 읽기도 벅찬데 독서보고서를 작성하고, 주마다 주어지는 제목으로 한 편의 글쓰기 과제를 완성해야 한다. 쇼핑도 만남도 최소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알찬 것들로 촘촘히 쌓여가는 느낌, 내가 부쩍부쩍 자라는 기쁨이라니.
온종일 일하고 학습원으로 달려오는 풋풋한 20대 청년, 산달이 임박한 임신부, 1.5세라 한국책 읽기가 쉽지 않다면서도 결석 한 번 하지 않은 30대 초반의 성실한 아기 아빠, 직장 일로 바쁜 남편에게 한 번만 가보고 아니면 그만둬도 된다며 살살 꾀어서 같이 왔다는 행복한 중년 부부.
감동과 자극을 주는 학습원들의 면면을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열정적인 수업 태도, 정성을 다하는 과제물, 글쓰기 발표할 때의 겸손하고도 당당한 태도들을 보며 인생 공부 다시 하는 기분이 들었다. 과정이 모두 끝났지만 계속 이어지는, 책맛을 들인 사람들과의 대화는 참으로 풍요롭다. 독서는 분명 알곡 가득 남는 장사다.
미주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5.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