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오늘:
262
어제:
132
전체:
1,331,176

이달의 작가
수필
2015.12.11 04:20

냉장고 정리와 마음 청소

조회 수 38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한국 다녀와 냉장고를 열어 보니 텅텅 소리가 날 지경으로 비어 있었다. 남편은 밥 먹으러 나갈 생각조차 못 할 만큼 바빴다며, 사람 만나느라 몇 번 외식한 것 외에는 모두 내가 만들어놓고 간 음식만 줄기차게 먹었단다.

우리 애들 같으면 어땠을까. 오래 전 딸이 운전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남편과 함께 한국을 다녀왔더니 정성껏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 둔 음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저희 좋아하는 부리토, 피자, 햄버거 같은 것만 열심히 사 먹었던 모양이다. 운전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심정 모르는 바 아니지만 냉장고 문 열기도, 데우기도 귀찮아 손쉽게 해결한 것 같아 어찌나 얄밉던지.

내 주위에는 냉장고 두 대를 사용하는 가정이 더러 있다. 두 대에 꽉꽉 차있는 내용물을 거의 파악하고 있는 그들의 총기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난 한 대인데도 정리를 잘하지 못해 기한 넘긴 음식을 곧잘 버리는 좀 엉터리 살림꾼이다. 요즘은 주부의 영역처럼 여겨졌던 냉장고가 만인에게 공개되는 세월이다. 한국에는 흔한 재료로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요리를 선보인다는 취지의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쿡방을 비롯해 먹방 프로그램들이 채널을 장악하고 있는 것 같다. 나의 지인들도 요즘 뜨는 셰프 누구의 요리법인데 만들기 너무 간단해, 하며 요리를 한다.

먹방은 또 얼마나 먹음직하고 보암직한지. 그런데 간판에 무려 세 곳의 방송국 먹방 출연 경력을 자랑하는 OOO식당 앞을 오가며 고개를 갸웃했다. 밖에서 훤히 보이는 그 큰 식당 홀 안에 어쩌다가 한두 테이블 손님만 보여 저렇게 유명한 집에 어찌 손님이 없느냐고 근처 사는 분에게 물었다. 아마 본점에서 출연했나 보죠. 그러면 지점도 따라서 출연한 게 되니까요. 그렇네요, 실웃음이 나오려다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맛있게 먹는 모습으로 인기를 끄는 먹방 진행자와 인터뷰에 응하는 손님은 그날의 음식 칭찬 일색이다. 꿈에도 생각 못 했던 기회가 나에게도 왔다. 대전에 사는 한 시인과 함께 공주 '풀꽃 문학관'을 다녀오는 길에 청국장 잘하는 집이 있다 해서 들렀다. 입구에 카메라를 맨 젊은 남자가 왔다 갔다 하는 등 왠지 분위기가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먹방 촬영 중이라고 했다.

리포터가 다가와서 음식이 어떻게 맛있는지 한마디 해 달라고 한다. 청국장이 뜨겁지가 않아 아쉬웠지만 남의 장사 방해할 이유도 없고 해서 나름대로 칭찬을 늘어놓았다. 밥에 청국장과 김치를 올려 입에 넣는 장면을 찍고 싶다고 해서 폼을 좀 잡았다. 나만 찍었냐? 아니다. 테이블마다 거의 빠짐없이 돌아가며 촬영했다. 언제 방송에 나오냐고 묻는 한 손님의 질문에 빙긋 웃음이 났다.


12월이 가기 전에 냉장고 청소나 해야겠다. 속에 있는 것 다 꺼내, 버릴 것 버리고 합칠 것 합치고 깨끗하게 닦아내고 차곡차곡 다시 정리하고 나면 얼마나 뿌듯하고 개운할까. 냉장고 청소하듯 마음 깊은 곳에 똬리 틀고 있는 부정적이고 헛된 생각들도 싹싹 걷어내고, 작은 즐거움들 모두 모아 큰 웃음으로 만들어 놓아야겠다.




미주 중앙일보 < 이 아침에> 2015. 12. 9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49 엄마의 자개장 4 오연희 2016.05.10 179
348 수필 공항에서 만나는 사람들 2 오연희 2016.05.10 174
347 수필 인터넷 건강정보 믿어야 하나 2 오연희 2016.03.29 222
346 수필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낙서' 오연희 2016.03.12 265
345 수필 우리는 어떤 '가면'을 쓰고 있을까 오연희 2016.02.13 200
344 수필 가뭄 끝나자 이제는 폭우 걱정 1 오연희 2016.01.29 182
343 수필 굿바이, 하이힐! file 오연희 2016.01.14 153
342 수필 새해 달력에 채워 넣을 말·말·말 오연희 2015.12.29 190
» 수필 냉장고 정리와 마음 청소 오연희 2015.12.11 380
340 수필 추억은 힘이 없다지만 2 오연희 2015.11.25 257
339 수필 실버타운 가는 친정엄마 4 오연희 2015.11.05 354
338 수필 독서, 다시 하는 인생공부 오연희 2015.10.21 189
337 수필 자매들 오연희 2015.10.08 153
336 수필 일회용품, 이렇게 써도 되나 2 오연희 2015.09.16 525
335 네가, 오네 오연희 2015.09.12 201
334 독을 품다 오연희 2015.08.29 268
333 수필 북한 억류 선교사를 위한 기도 편지 오연희 2015.08.21 313
332 수필 다람쥐와 새의 '가뭄 대처법' 오연희 2015.07.29 364
331 수필 따뜻한 이웃, 쌀쌀맞은 이웃 오연희 2015.07.11 224
330 하늘에서 왔어요 오연희 2015.07.07 102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21 Next
/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