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다녀와 냉장고를 열어 보니 텅텅 소리가 날 지경으로 비어 있었다. 남편은 밥 먹으러 나갈 생각조차 못 할 만큼 바빴다며, 사람 만나느라 몇 번 외식한 것 외에는 모두 내가 만들어놓고 간 음식만 줄기차게 먹었단다.
우리 애들 같으면 어땠을까. 오래 전 딸이 운전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남편과 함께 한국을 다녀왔더니 정성껏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 둔 음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저희 좋아하는 부리토, 피자, 햄버거 같은 것만 열심히 사 먹었던 모양이다. 운전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심정 모르는 바 아니지만 냉장고 문 열기도, 데우기도 귀찮아 손쉽게 해결한 것 같아 어찌나 얄밉던지.
내 주위에는 냉장고 두 대를 사용하는 가정이 더러 있다. 두 대에 꽉꽉 차있는 내용물을 거의 파악하고 있는 그들의 총기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난 한 대인데도 정리를 잘하지 못해 기한 넘긴 음식을 곧잘 버리는 좀 엉터리 살림꾼이다. 요즘은 주부의 영역처럼 여겨졌던 냉장고가 만인에게 공개되는 세월이다. 한국에는 흔한 재료로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요리를 선보인다는 취지의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쿡방을 비롯해 먹방 프로그램들이 채널을 장악하고 있는 것 같다. 나의 지인들도 요즘 뜨는 셰프 누구의 요리법인데 만들기 너무 간단해, 하며 요리를 한다.
먹방은 또 얼마나 먹음직하고 보암직한지. 그런데 간판에 무려 세 곳의 방송국 먹방 출연 경력을 자랑하는 OOO식당 앞을 오가며 고개를 갸웃했다. 밖에서 훤히 보이는 그 큰 식당 홀 안에 어쩌다가 한두 테이블 손님만 보여 저렇게 유명한 집에 어찌 손님이 없느냐고 근처 사는 분에게 물었다. 아마 본점에서 출연했나 보죠. 그러면 지점도 따라서 출연한 게 되니까요. 그렇네요, 실웃음이 나오려다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맛있게 먹는 모습으로 인기를 끄는 먹방 진행자와 인터뷰에 응하는 손님은 그날의 음식 칭찬 일색이다. 꿈에도 생각 못 했던 기회가 나에게도 왔다. 대전에 사는 한 시인과 함께 공주 '풀꽃 문학관'을 다녀오는 길에 청국장 잘하는 집이 있다 해서 들렀다. 입구에 카메라를 맨 젊은 남자가 왔다 갔다 하는 등 왠지 분위기가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먹방 촬영 중이라고 했다.
리포터가 다가와서 음식이 어떻게 맛있는지 한마디 해 달라고 한다. 청국장이 뜨겁지가 않아 아쉬웠지만 남의 장사 방해할 이유도 없고 해서 나름대로 칭찬을 늘어놓았다. 밥에 청국장과 김치를 올려 입에 넣는 장면을 찍고 싶다고 해서 폼을 좀 잡았다. 나만 찍었냐? 아니다. 테이블마다 거의 빠짐없이 돌아가며 촬영했다. 언제 방송에 나오냐고 묻는 한 손님의 질문에 빙긋 웃음이 났다.
12월이 가기 전에 냉장고 청소나 해야겠다. 속에 있는 것 다 꺼내, 버릴 것 버리고 합칠 것 합치고 깨끗하게 닦아내고 차곡차곡 다시 정리하고 나면 얼마나 뿌듯하고 개운할까. 냉장고 청소하듯 마음 깊은 곳에 똬리 틀고 있는 부정적이고 헛된 생각들도 싹싹 걷어내고, 작은 즐거움들 모두 모아 큰 웃음으로 만들어 놓아야겠다.
미주 중앙일보 < 이 아침에> 2015. 1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