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오늘:
262
어제:
132
전체:
1,331,176

이달의 작가
수필
2015.11.25 10:56

추억은 힘이 없다지만

조회 수 257 댓글 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한국 사는 나의 자매들 모두 빌딩 상자 속에 둥지를 틀고 산다. 고층에 사는 막내 여동생 집 거실 유리창 밖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속이 울렁거리고 멀미가 인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 멀리 두면 울긋불긋한 가을 단풍과 바람에 나부껴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노란 은행잎이 얼마나 화사하고 화려한지. 한국 가을이 이리 아름다웠나? 감탄이 절로 터진다.

한국은 사람도 환경도 점점 더 세련되어 가는 것 같다. 특별한 모임 외에는 편안한 캐주얼 차림으로 다니는 나와 달리 싹 빼고 다니는 멋쟁이가 참 많다. 백화점이든 은행이든 동네 커피숍이든 연령층이 다양한 미국에 비해 대부분의 직원들이 젊고 예쁘고 매너도 좋다. 하지만 개인 매너는 좀 아닌 것 같다. 마켓 갔다가 문을 열고 동생을 기다리는데 정장 차림의 한 중년 남자가 열어 논 문으로 쏙 빠져나간다. '익스큐즈미' 아니 '고맙다' 말도 안하고 뭐야, 속으로 구시렁대며 미국서 온 티 좀 내고 있다.

건강보험 제도, 쓰레기 분리수거 등 한국이 특별히 잘 하고 있는 것이 많지만, 지하철 시스템은 정말 최고다. 서울 지리도 잘 모르는 내가 승차권을 사서 지하철 노선을 몇 번씩 갈아타며 지인들을 만나러 다닌다.

버스 타면 시간이 절약된다고 해서 강남 지하철역 앞에서 수원 가는 버스를 탔다. 얼마예요? 물었더니 2500원 이란다. 5000원짜린데 어쩌죠? 했더니 나를 멀뚱히 쳐다 보던 기사 아저씨가 내릴 때 내란다. 일단 우아한 한 부인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버스에 오르는 사람들이 입구에 있는 기계에 카드를 대니까 '환승입니다' 낭랑한 음성이 응답을 한다. 돈 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걱정이 돼 옆 부인한테 돈 좀 바꿔 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없네요' 하며 모호한 웃음을 짓는다. 그때 '안전 벨트를 매라' 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아참, 하며 얼른 안전 벨트를 찾아 맸다. 방송이 두 번 더 나왔지만 승객들이 꿈쩍도 않는다. 옆 부인도 안 매길래 '안 매는 거예요?' 물었더니 '매야죠.' 말만하고 또 빙긋이 웃는다. 은근히 기분이 나빠 '촌에서 왔더니 참말로 어렵네' 중얼댔더니 '아, 촌에서 왔구나' 하며 또 웃는다.

내릴 때쯤 기사 아저씨한테 다가가 '5000원 짜린데 어쩌죠?' 했더니 '이 버스 오늘로 그만 타는 거 아니죠?' 라며 웃는다. '네' 라는 답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찰나 말 뜻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나는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은 공짜 버스를 탔다. '대중교통 환승 시스템' 의 역사가 짧지 않음에도 수도권 버스는 타 본적이 없어서 몰랐다는 우리 자매들, '고생했네' 로 미안함을 대신한다.

한국 올 때면 설렘과 기대도 크지만, 한국의 변화와 한국말의 진의를 따라잡지 못해 어리벙벙한 촌놈이 되고 마는 일이 생길까 봐 사실 좀 긴장한다. 미국 사는 세월이 길어질수록 반기는 사람은 줄어들고, '추억은 힘이 없다'는 어느 드라마 속 대사를 실감하며 아픔도 느낀다. 그럼에도 그리움이 너무 많아 늙고 낡아가는, 그래서 더 정겹고 푸근한 오랜 것들을 찾아 나는 또 한국에 온다. 세월 갈수록 단풍은 더 곱게 물들어 가고.




미주중앙일보 < 이아침에> 2015.11. 23

?
  • 김예년 2015.12.06 20:19
    촌이요?ㅎㅎㅎ
    고생하셨네요
  • 오연희 2015.12.07 10:30
    촌넘 맞죠...모..ㅋ
    공짜 버스도 타고...인심 좋은 거죠.^^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49 엄마의 자개장 4 오연희 2016.05.10 179
348 수필 공항에서 만나는 사람들 2 오연희 2016.05.10 174
347 수필 인터넷 건강정보 믿어야 하나 2 오연희 2016.03.29 222
346 수필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낙서' 오연희 2016.03.12 265
345 수필 우리는 어떤 '가면'을 쓰고 있을까 오연희 2016.02.13 200
344 수필 가뭄 끝나자 이제는 폭우 걱정 1 오연희 2016.01.29 182
343 수필 굿바이, 하이힐! file 오연희 2016.01.14 153
342 수필 새해 달력에 채워 넣을 말·말·말 오연희 2015.12.29 190
341 수필 냉장고 정리와 마음 청소 오연희 2015.12.11 380
» 수필 추억은 힘이 없다지만 2 오연희 2015.11.25 257
339 수필 실버타운 가는 친정엄마 4 오연희 2015.11.05 354
338 수필 독서, 다시 하는 인생공부 오연희 2015.10.21 189
337 수필 자매들 오연희 2015.10.08 153
336 수필 일회용품, 이렇게 써도 되나 2 오연희 2015.09.16 525
335 네가, 오네 오연희 2015.09.12 201
334 독을 품다 오연희 2015.08.29 268
333 수필 북한 억류 선교사를 위한 기도 편지 오연희 2015.08.21 313
332 수필 다람쥐와 새의 '가뭄 대처법' 오연희 2015.07.29 364
331 수필 따뜻한 이웃, 쌀쌀맞은 이웃 오연희 2015.07.11 224
330 하늘에서 왔어요 오연희 2015.07.07 102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21 Next
/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