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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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아침의 문

2010.10.06 05:10

오연희 조회 수:9302



박민규[-g-alstjstkfkd-j-]2010 제 34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대상수상작 박민규의 '아침의 문'
우수상: 배수아의 '무종' 전성태의 '이야기를 돌려드리다'
윤성희의 '매일매일 초승달' 김중혁의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편혜영의 '통조림 공장' 손홍규의 '투명인간'
김애란의 '그곳에는 밤 여기의 노래'


초판 2010 1.22
초판17쇄 2010 2. 20


남기고 싶은 구절 모음

'무종에서'

나에게 운명이란 것이 있다면, 그곳은 그 운명조차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한 그런 예외의 섬이었다고. 마치 꿈속에서 또다시 꿈을 꾸듯이, 여행지에서 다시 여행을 떠나온 마음.

나의 여행이란 '글을 쓸 수 있는 새로운 셋방' 이란 말과 사실상 거의 동의어.

마치 오래 전에 꾸었던 꿈속으로 잘못 미끄러져 들어온 나의 현재라는 시간처럼, 여기서 길을 잃을 나와 그 나를 지켜보고 있을 나는 잠시 동안 서로 이별할 것이고.

저마다 다른 표정이었던 창들 그곳에 머물던 몇 달 동안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이었던 지하철역의 이름들과 함께, 주변 거리의 사소한 풍경들, 아이스크림 가게와 빵집과 주말에만 파는 브런치를 먹던 야외 카페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 오르곤 한다.

공기의 싸늘함과 태양빛의 따뜻함이 각자의 성격을 분명하게 유지한 채로 혼재하는 독일 전나무의 기후 아래서, 정원의 통나무 식탁에 앉아 뜨겁게 끓인 커피를 마시며

과거에 미처 몰랐던 미세한 감정들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렸던 것들, 다시 오지 못랄 것들, 당연하면서도 놀라운 것들, 잊혀질 것들, 아무도 모를 것들이며, 이제 세상의 다른 기억 돌과 마찬가지로 없었던 것처럼 되어버린 일들이 그 우연한 재회를 통해서 시간을 관통하여 내 앞에 하나하나 되살아 나는데, 기억은 우리의 유령에 속하는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우리의 실제의 일부인지

지금 다시 살아 돌아오는 그러한 일상적 말과 장면들은 오랜 시간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발휘되는 어떤 성분들로 충만하고

그들 또한 우리에게 매번 고유하고도 비밀스러운 작별의 몸짓을 보냈을 테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고, 더없이 소중한 이름을 부르듯이 그 편지들을 들여 다 보았고 이제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 그것 또한 우리가 지나쳐 온 이 길처럼 아름다울 터이니, 나는 오래된 편지로 인해 다시금 불러일으켜진 그 정체 모를 그리움과 아픔이 바로 내가 생의 최후로 간직하게 될 행복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어.

오빠는 다른 도시에서 내 건강을 걱정하는 편지였을 뿐인데, 그 안에는 어떤 절실함의 연계, 고백하지 않는 애정, 더 이상 함께 살지 않게 된 젊고 가난한 오누이가 서로를 생각하는 안타까운 심정이 생생하게 되살아 나고 있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토록 오랜 시간의 저편에서 다시 등장했음에도 불수하고 변함없는 현재성을 유지하고 있는 인간의 마음이란 것 때문에, 나는 차마 편지를 끝까지 다 낭독할 수 없었고, 눈물을 닦아내는 오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지. 그날 편지를 읽었던 것을 나는 두고두고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나에게 찾아온 소리 없이 격렬하면서도 고요한 그 행복감을 오빠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길을 모르고 말았을 테지. 그 해의 생일은 오빠가 이 세상에서 맞은 마지막 생일이었고, 당시 이미 암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던 오빠는 그 얼마 후에 영원한 세상으로 건너가고 말았으니까.

나는 바닥을 살짝 디디면서 한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가볍게 허공으로 뛰어올랐는데, 내 구두는 흰빛이었고, 지상은 온통 희박한 어둠과 연기로 덮여 나는 내 구두를 볼 수 없었지만, 내 몸이 땅에서 항상 반 뼘 정도 위로 들려 있는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고.


'이야기를 돌려드리다'에서

치매는 가까운 기억부터 차근차근 갉아먹다가 종내 에는 자신마저 망실하는 병이다.

소설은 기억의 산물이다, 라는 명제를 당위적으로 써왔다, 그 말의 진실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그 말처럼 뼈저리게 다가오는 말은 없었다. 기억이 없으면 그를 누구라 해야 할 것인가, 나에 대한 기억이 없는 어머니를 더 이상 어머니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깜부기를 털거나 까투리 새끼를 쫓으며 지루한 한나절을 보내고 있었다. 일 더위는 보리 까끄라기 만큼 따가웠다. 이랑을 하나씩 타고 엎드려 낫질하는 어른들의 대화가 한없이 지루했고 누른 보리밭 위로 풀무치나 방아깨비 날갯짓 소리도 맥맥했다. 무심코 고개 들어 바라본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화살처럼 떨어졌다. 그것은 희었다. 종발만 한 머리도 있고 꼬리도 있었다.

어른들이 허리를 폈다. 흰 빛 줄기는 머리 위에서 세 토막으로 나뉘면서 남쪽 산마루로 사라졌다.

저게 혼불이야. 지금 막 꼴깍한 사람 몸에서 나온 거라고. 어른들의 눈길을 피해 보릿단 뒤에서 담배를 그슬리던 큰형이 내게 말했다. 큰형의 말을 듣는 순간, 하늘의 불덩이가 흡사 내 이마에라도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정말로 이마가 뜨거웠고, 눈앞이 깜부기처럼 검어졌다. 나는 무릎을 접으며 밭이랑에 꼬꾸라졌다. 어른들은 더위를 먹었다고 하였으나 혼불이 이마로 달려드는 환영을 지울 수 없었다. 만약 그때 내가 좀 더 자랐더라면 머리 위로 날아간 물체가 별똥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열살, 낮에도 별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나이였다.물론 어른들의 거짓말을 ,그게 의도적인 거짓이든 무지한 미신이든 짐짓 알고도 모른 척할 수 있는 나이이기는 하였다. 열살 먹은 도회지 아이들도 산타클로스가 거짓부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의 선물을 받듯이 나 역시 망태 할아버지나 조리뱅이와 같은 요괴들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그들을 경외했다, 요괴들을 자꾸 들먹이고 사는 어른들의 세계가 조금은 비밀스러워 보였다. 그 무렵인지 그 뒤인지 모르지만 나는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강렬한 동경이 아이들을 자라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시간이 흘러서는 어른들도 인생에 대해서는 서투르고 허술한 큰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말이다.

'매일매일 초승달' 에서

인생은 자신이 원할 때 멈춰지지 않는다.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아버지는 계속 잠만 자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언니들이 동생을 미워한 덕에 셋째는 누구보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을 금방 구분할 줄 알게 되었다.

이야기를 반복하면 언젠가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탄생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중에서

설탕이 새까만 커피 속으로 유성처럼 쏟아졌다.

'통조림 공장'에서

아무도 없는 공장에서 정지된 기계의 전원을 켜는 일은 매번 낮선 개의 잠을 깨우는 것처럼 긴장되었다. 개가 짖듯 기계가 요란하게 웅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그제야 하루가 시작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원을 끄고 정적 속에 남아 있으면 거대한 깡통 속에 잠긴 숨 죽은 꽁치나 고등어가 된 기분이었다.

'투명인간'에서

동생이 부주의 하게 깊숙이 꽂는 바람에 짧은 초와 높이가 같았다.

정맥이 두드러진 그의 손등은 이국 도시의 지하철 노선도를 연상시켰다.

냉장고 문이 탁 하고 닫힐 때 그의 시선도 잘려나갔다. 아니 부력을 잃은 물체처럼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누군가를 없는 사람처럼 다루는 일이 권력을 부여 받는 것과 비슷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마음이 불편했다.

집 안을 유영하는 점액질의 공기들 사이로 그보다 더 차지고 끈끈한 침묵이 느릿느릿 흘렀다.

감정이란 빛처럼 파동이면서 입자인 것 같았다. 이따금 나는 화가 났을 때 노려본 사물이 똑같은 강도의 감정을 되쏘는 걸 느낀 적도 있다. 제풀에 지친다는 말은 그런 의미인지도 모른다.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시간들이 거실 안에 패총처럼 쌓였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에서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가는 의혹을 보았다. 그의 가슴에 던져진 돌멩이 하나가 그의 감각뉴런을 활성화시켰다. 나는 그가 발단 감각신경을 곤두세우는 걸 느꼈다. 의혹의 파문은 그의 육체에 갖히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머리칼 끝에서 허공으로 전달되어 그를 둘러싼 공기들에도 파동이 전해졌다. 그가 흥분한 만큼 그의 영토도 흥분했다.

우리는 거울을 연극에 동참시키지 않았으므로, 거울이 그의 형상을 비추지 않는다거나 슬그머니 테두리 밖으로 미어낸다거나 하는 일은 벌어 지 않았을 테니,

아버지의 목소리는 허공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잘게 부서지며 선반, 소파 장식장 같은 사물들에 먼지로 내려앉았다. 아버지는 필담을 시도했다.

나는 철길 건널목 건너듯 아버지 앞을 후닥닥 지나 내 방에 들어갔다.

일상이 부식되어 탁한 녹물로 흘러내리는 집에서 그와 나는 고치 속에 웅크린 유충처럼 안전하게 하루를 소화시켰다.

아버지의 눈길에 놀라서 혹은 지쳐서 꽃잎 몇 장쯤은 떨어졌으리라.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인류란 매번 존재했으나 매번 멸망했다가 매번 새로 탄생해야 했던 인류와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곳에 밤 여기의 노래'

바람은 자기 몸에서 나쁜 냄새가 나지 않을까 염려하는 노인처럼 주춤거리며, 저도 모르게 물컹해져, 저도 모르는 봄 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입춘까지는 보름이나 남았지만, 도시는 감기를 앓듯 간질을 앓느라 어렴풋한 미열에 달떠 있었다.

컴컴안 택시 안, 미터기와 계기판 불빛이 빛난다.

누군가와 악수하기 전, 그는 옷섶에 손바닥을 닦는 버릇이 있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는 사람만의, 매끄러운 확신이 담긴 음성.

질 나쁜 녹음 환경 때문에 잡음 섞인 이국 말은 실제보다 더 먼 곳에서 오는 무전음처럼 절박하게 들린다.

그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 광활하고 오래된 대륙- 믿을 수 없고, 믿고 싶은 소문이 무성한 고장의 풍경이 흔들렸다.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길 잃은 나그네에게 친절하다고. 그러니 외지에 나가선 대답 하는 것보다 질문 할 줄 아는 용기가 중요하다고.

정성으로 이야기하면 서로 이해 못 할게 없다는, 소통에 관한 한 순진할 정도의 믿음이 있던 여자, 일도 참 잘했지만 공부를 했다면 더 좋았을 젊은 아내

언제나 말이 고파 크게 벌어졌던 눈, 지구 축처럼-사람을 향해 십오 도쯤 기울어져 있던 마음. 그 경사에 스스로 미끄러지면서도 아프면 그저 '아야' 하고 말던 성격. 그녀는 용대를 진지하게 대해준 사람이었다.

햇살을 등진 구경꾼들의 눈부신 멸시

대륙에서 여러나라 말은 마른 바람에 섞여 뒹굴었다. 몇몇은 사람의 뼈다귀처럼 깡마르고, 쓰는 사람이 거의 없는 말들이었다. 그녀는 말들이 일으키는 먼지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자랐다. 때론 굳건하게, 그보다는 자주 흔들리며 말이다.

소리와 억양이 환기시키는, 어떤 냄새에 대해서도, 죽어도 완벽해질 수 없는 딴 나라 말의 질감에 대해서도 명화는 알아갔다.

밀항선에 실려 자신의 운명이 어딘가로 배달되는 기분이 들던, 세계의 기온보단 명화의 체온이 조금 더 높던 밤이었다.

그들의 목소리엔 천진함과 피로, 어렴풋한 두려움과 희망이 섞여 있었다.

고용주는 망설이는 척하면서 낮은 임금의 노동을 반겼다.

처음에는 유명해지고 다음에는 천박해져 버리는 음식점이 아니라. 허름하고 보잘 것 없지만 맛 하나만은 단정한 그런 집들을 말이다.

부러 그런 게 아니고 몰라서 였다.

차분하고 아늑하게, 가끔은 질경이처럼 푸르고 질기고 흔한 웃음을 터트리며.

도시 곳곳에는 한쪽 손을 번쩍 들어 택시를 잡은 뒤, 술에 취해 아름답고 어그러진 말들을 차비처럼 내려놓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때론 두서 없고 엉뚱한, 어느 때는 철렁하고 알 수 없는 말들을 반짝이는 동전처럼 흘리고 가는 사람들이, 무례한 사람이야 그보다 많았지만,

자기 위치가 초라할수록 풍선처럼 커다란 허풍을 떤다는 것을 말이다. 풍선 끝 부력에 매달린 사람들은 둥실둥실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사람들은 여전히 허황된 말을 잘했다. 이상한 점은 금방 들통 나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들이 그런 말 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렇게 잠깐 살고 만 북쪽여자도-용대에게 끝까지 제목을 알 수 없는 노래가 아니었을까. 다 듣고 내리지 못한 노래. 생각도 잘 안 나면서 잊을 수 없는 소리 말이다.

열에 달뜬 청춘처럼 새삼스럽게, 늙은 추방자들처럼 절박함 말이다.

작대기로 때려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 뱀처럼 완강하게 서로 엉켜 있었다.

사랑을 하며 자기 몸이 자기 것으로 느껴지는 기분도 좋았다. 그것은 너무 당연하게 생생한 감각으로 다가왔다.

이제부터 집에 가는 길이 아주 멀고 불편해지겠구나

넓고 장사가 안 되는 오리고기집에선 끝까지 남은 젊은 남녀가 천천히 섹스의 가능성을 재고 있다.

라디오 볼륨을 높인다.핸들 위의 손가락을 까닥인다.

불콰해 진 얼굴로 논두렁에 처박힌 채

지훈네 집안에서 일종의 부드러운 오만함이, 용대네 쪽에선 열등감이 비쳤다.

무더운 날 눈치 없는 사람이 내미는 뜨거운 악수 같은 것.

용대는 술을 억병으로 마신 뒤 명화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겨울밤.'빈차'등을 밝힌 택시들이 긴 불빛을 그으며 날아다닌다. 개개의 사연과 얘기. 그리고 노래를 실은 도시의 나비 떼들이. 용대는 손님이 없나 창 밖을 살피며 차를 몬다.

겨울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약속처럼, 나뭇가지에 끝끝내 매달려 있는 은행 몇 알이 방금 막 지나간 택시를 굽어보며, 떨어지지도 썪지도 못한 채 몸을 떨고 있다.


총평에서

치매에 걸린 늙은 어머니의 기억이 핸드폰 액정화면 배터리 표시처럼 지워져 가는 것은 나는 목격한다.

'엄마!'와 '밥 좀 줘!' 그것은 기억과는 질적으로 다른 어떤 것 같다. 나는 한때 어머니가 물려준 설명할 수 없는 말랑말랑한 세계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머니는 그 말랑말랑한 세계로 자리를 옮긴 것 같다.

백년만의 폭설 속에 길을 헤매가다 편혜영과 박민규 앞에 이르렀다.

긴 속의 이야기가 어둠의 공간을 빠져 나와 아침에 이르면서 극적 결말에 도달한다. 죽음을 향한 선택과 삶의 고투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꽁치나 복숭아나 고등어 같은 것 말고도 사유라든가 우리가 흔히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조직화되어 곧 똑같은 통조림 통에 담겨 일괄적으로 쟁여질 것 같은 우울하고 기묘한 분위기가 소설 전체를 감싸고 있다. 소설이 끝나도 이야기가 무언가에 맞물려 계속되고 있는 것 같은 여운을 남긴다.

공부는 불쌍한 인간이 스스로에게 바칠 수 있는 유일한 공양이다.

글을 쓰는 행위나 방법에 대해선 사실 무관심하다. 내게 소설은 '그냥' 쓰면 되는 것이었다. 창작의 고통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그래서 늘 기분이 이상하다. 그냥...쓰면 되는 거 잖아. 절로 그런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떻게 써야 고통스럽지? 그런 고민을 한적도 있었다. 물론 잠시였다. 마조히즘에 특별한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나는 소설을 정신적인 것이라 생각 지 않는다. 이것은 '물질'이다 유기적이고 다분히 물러 보이긴 해도 분명한 물질이다.. 오히려 수학과 공학을 이해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그것은 자연에 대한 이해이다. 글도.

글을 쓰면 쓸수록 또 아무리 글을 써도..결국 나는 인간일 뿐이라는 '고통'이다. 변하지 않는 인간의 고통..아무리 글을 써도 변하지 않는 세계의 고통. 우리가 인간이라는 이 실질적이고...물질적인 고통. 단어와 문장. 6하 원칙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이 고통. 우주를 창조한 신에게도.

휠체어...이 의자에는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마음가짐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늦은 공부 모순과 편견 무지와 욕심 실수와 후회...이 많은 장애를 떠안은 나라는 인간에겐 달리, 다른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다. 소설을 쓰고 싶다 생각한 것은

망원경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아니다. 너머의 어둠과 빛...그것을 보고 느끼는 일이 그저 즐거워서 이다. 나는 지구에서 글을 쓰는 인간이야. 대로 너머를 향해 나는 속삭이기도 한다. 모든 이야기의 원형이 저 너머에 있다 믿기 때문이며, 그 순간 소년이거나 노인이 된 듯한 그 느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황홀하기 때문이다.

부지런기 걸어야겠다.
지각이다.

노인의 마음으로 쓴 소년의 글
소년의 마음으로 쓴 노인의 글

희망이 없음에도 희망을 얘기하려는, 또 다른 수밖에 다른 길이 없음을 어떻게라도 얘기 하려는 안타까운 의지의 표현으로 읽히는 것

박민규의 소설은 문학 바깥의 온갖 잡스럽고 이질적인 것들을 소설 안으로 끌고 들어와 소설의 익숙한 규범을 교란하고, 그럼으로써 소설 종의 경계를 허물고 넓혀가는 실험을 계속해왔다. 만화와 무협지.인터넷 게임 같은 엉뚱한 비문학적 요소들의 유희적 도입이 어떻게 문학적 체험의 확장과 갱생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깨우쳐준 것은 바로 박민규의 소설이었다.

비루가 우리의 삶의 진실
그 삶의 중력을 때로는 딴전 피우며, 때로는 농담과 상상으로 비껴가거나 무마시키는 방식으로 짐짓 아닌 척 대면해왔다.

갓 낳은 아이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빛에서 '허약한, 무방비 상태의 생명을 공격하는 그 느낌'을 알아채고 '자신의 진짜 이유'를 대면했다고 하는 서술을 통해 그것을 어렴풋이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녀가 억울함과 분노 끝에 비로소 깨닫게 되는, 인간과 세상의 진실이란 그런 것이다. 스스로가 자기가 그토록 혐오하던 바로 저 괴물이 되어가는 이야기다. 자기가 괴물임을 모르고 있는 두 괴물의 이야기인 셈이다.


‘’나’가 알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나’안의 어떤 것이 ‘’나’ 대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할터, 그것을 일러 우리는 또한 ‘나’ 안의 괴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어찌 그것이 ‘나’안에만 있겠는가.

박민규의 소설이 암시하고 있는 것은. ‘나’ 안의 괴물이란 다름 아닌 실체를 알 수 없는 불가해한, 그러면서 모두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거대한 부조리로서 삶 자체의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삶 자체가 괴물이다. 그리고 그 삶의 괴물성은 인간을 전염시킨다.
인간 삶의 저 우울한 진실을, 모두가 모른 척 회피하고 살아가는 우리 삶의 심연을 그렇게 다시 한 번 반복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인가. ‘죽음과 ‘탄생’이라는 익숙한 테마를 놓고 쓰여졌던 저 오래되고 낡은 클리셰(cliché)를 硏상시키는 까닭이다.

혁명은 결코 우아함과 예의 따위와는 어울릴 수 없는 것.

공격의 위협 앞에 놓인 무방비 상태의 생명을 보고

그가 의도한 결론의 상투를 통해 보이지 않게 누설하는 바로 그것, 이를 두고 우리는 희망 없는 희망의 멜랑콜리 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가난과 명시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려운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 저항하거나 분노할 여력조차 없다는 점이다. 그들의 얼굴에서 유쾌한 웃음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슬픔과 분노의 표정을 발견하는 것 또한 불가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얼굴 못생긴 여자라는 ‘21세기적 천민’에 대한 헌신적 사랑을 내세워 지금까지 자신이 보여주었던 사회적 타자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는 한편, 외모 지상주의에 빠진 사회에 대한 냉소와 비판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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