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2004.06.24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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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 윤동주(1917 ~ 1945)는 북간도 명동촌에서 당시 명동 학교 교시이었던 윤영석 씨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그를 매우 사랑하던 할아버지는 교회의 장로였습니다. 그 해 고종 사촌 형 송몽규가 윤동주보다 석 달 앞서 태어났는데, 몽규는 동주의 삶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인물입니다.

함께 학교를 다니고 문학 수업을 했으며, 민족 의식을 갖고 독립 운동을 구상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일본 경도로 유학가서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복강 형무소에 함께 수감되었고, 한 달을 사이에 두고 옥사하기까지 그들은 사촌 형제지간이라기보다 죽마고우이고 평생의 동지였습니다.

윤동주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민족 의식이 강했던 북간도의 분위기 속에서 중학교 시절까지 보냈습니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이이생활」이란 어린이 잡지를 정기 구독했으며, 명동 소학교 급우들과 「새명동」이란 등사판 잡지를 내는 문학적 관심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중학교는 송몽규와 함께 선교사가 운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인 은진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이 시절 <동아일보> 신춘 문예 꽁트 부문에 몽규의 '술가락'이 당선되었습니다. 이 일은 동주를 분발시켜 이때부터 습작 시노트에 시를 쓴 날짜를 기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해 몽규는 학업을 중단하고 김구 선생이 주관하던 낙양 군관 학교에 입학, 독립 운동에 투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현지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년만에 돌아와 '요시찰 인물'로 낙인이 찍힙니다.

이때 동주도 1935년에 평양의 기독교계 학교인 숭실 중학교에 편입했다가 일제가 신사 참배를 강요하자 그것에 대한 항의로 이듬해에 자퇴합니다. 그래서 동주는 용정의 광명 중학부에, 몽규는 평양 대성 학교에 편입하여 학업을 재개합니다. 그리고 1938년, 나란히 연희 전문 문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이들이 연희 전문을 택한 것은 이 학교가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학교이어서 민족 의식을 가진 많은 교수들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희 전문에서의 4년은 동주의 삶에 의미 있는 기간이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시 창작에 전념하여 오늘날 남아 있는 주옥 같은 시를 남겼습니다.그래서 1941년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 했으나 일제 말기의 험악한 분위기와 경제적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다만 3부를 만들어 존경하는 이양하 교수와 후배 정병욱에게 한 부씩 주고 자신이 나머지 한 부를 가졌습니다.

1942년 졸업 후, 그는 몽규와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릅니다. 몽규는 경도 제국대에, 동주는 경도 동지사 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1943년 7월 여름 방학을 맞아 귀향길을 서두르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들은 '요시찰 인물'로 몽규와 그의 주변 인물을 1년 동안이나 감시하여 독립 사상을 가진 몽규와 동주를 잡아들인 것입니다.

갖은 악형 속에서 1944년 4월 몽규는 2년 반, 동주는 2년의 징역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들의 죄명은 독립 운동이었고, 특히 '조선 학병들은 일본이 약해지거나 패전하는 기회를 타서 조선 출신 군인으로 목숨을 바쳐 궐기해야 한다'는 일본의 징병제에 대한 생각이 옥살이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1년 뒤인 1945년 2월 16일에는 동주는 복강 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때 시신을 수습하러 간 아버지와 당숙이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를 면회했는데, 몽규는 자신들이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고 있으며, 그 주사 때문에 동주가 죽었고 자신의 몸도 이 꼴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몽규도 한 달 뒤에 숨을 거두었는데 그들은 일본의 간악한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되어 체포된 지 1년 반만에 독립의 한을 품고, 28세의 일기로 원통하게 이승을 하직한 것입니다.

해방 후, 윤동주의 시 중 '쉽게 쓰여진 시'가 연희 전문 친구들의 주선으로 처음 세상에 빛을 보게 됩니다. 이후로 1948년 정병욱이 간직하고 있던 19편의 습작시 등 30여 편의 유고를 모아 생전에 고인이 제목으로 뽑아 두었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이름의 유고 시집을 내게 됩니다.

동주는 매우 내성적이며 온순한 성품이었으나 또한 자신의 뜻을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조선어 말살 정책을 폈던 일제 말기에 우리말로 시를 쓰며 민족의 문화를 보존하려 하였고, 시대의 풍파에 견고하게 견디어 나가는 자신의 삶을 자아 성찰의 시로써 다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민족과 정의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나에게도 십자가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속죄양으로 살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는 정지용과 백석의 영향으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리고 맑고 고운 동시를 남겼으며, 순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서정의 세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출 처 : [기타] 인터넷 : http://www.ahg21.com.ne.kr/4-2%B0%FA.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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